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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시모음

대지의 청문 : 지워진 문장 펼쳐진 대지 / 김종혁

작성자cbdc반대(박윤억)|작성시간26.06.17|조회수16 목록 댓글 0

대지의 청문 : 지워진 문장 펼쳐진 대지 / 김종혁

다 버리고 나니 길이 보였다
무엇을 더 배우고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족쇄였음을
안개가 걷히는 새벽녘에야 깨닫는다
지도의 정교함을 감탄하느라
정작 문밖에 펼쳐진 거친 대지를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이제 내게는 기억해야 할 문장도
증명해야 할 거창한 다짐도 없다
아름다운 말들로 삶을 포장하는 일은
얼음 위에 새긴 글자처럼 덧없나니
다만 침묵 속에서 깊어지는
대지의 울음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뿐

지식의 완성은 앎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하나의 글자마저 지워내는 일
책장을 덮고 방 문을 열어젖힐 때
비로소 세상은 가르치려 들지 않고
비바람을 견뎌낸 굳은살 같은 풍경으로 나를 맞이한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흙의 감촉
살결을 스치는 이름 없는 바람의 무게
그 속에 어떤 거룩한 진리가 숨어있지 않아도 좋다
내가 딛고 선 이 자리가 곧 진실이며
땅바닥에 떨어지는 땀방울과 눈물 속에 이미 모든 답이 살고 있으니

성찰마저 부질없어지는 지점에서
비로소 삶은 스스로 흐르기 시작한다
빛나는 방향타를 버린 배가
가장 깊은 바다에 당도하듯
앎이 사라진 그 무구의 자리에서
대지의 슬픔을 품은 오늘의 걸음은
비로소 단단하고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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