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림의 끝에서 마주한 온도 오늘도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통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이 마치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내 마음의 파편과 같다. 세상은 온통 회색빛 수묵화로 물들어갈 때면, 나는 어김없이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대라는 이름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낸다. 손에 쥔 스마트폰의 차가운 액정 화면을 켠다. 손가락 끝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대의 프로필 화면을 마주한다. 손바닥만 한 작은 사각형 화면 속에 멈춰 있는 그대의 사진, 그리고 짤막한 상태 메시지, 그것이 내가 그대의 안식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다. 화면 속의 그대는 여전히 그 눈부신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미소는 내게 닿지 못하고 액정의 차가운 질감 뒤에 갇혀 있다. 보고파서, 그리워져서 마주한 프로필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내 안의 그리움은 봇물이 터진 강물처럼 더 격렬하게 범람한다. 보면 볼수록 더 눈에 밟히고, 만질 수 없기에 더 간절해지는 이 감정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이 그대에게 닿을 때마다 나는 창밖을 향해 턱을 괴고, 저 쉼 없이 흘러내리는 빗줄기에게 슬그머니 그대의 소식을 물어본다. "그곳의 하늘도 이토록 흐린가요? 그대도 나처럼 이 비를 보며 잠시 지나간 시간을 서성이고 있나요?" 부질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비는 내 마음을 저 먼 곳, 그대가 있는 공간으로 배달해 줄 유일한 전령처럼 느껴진다. 내 마음은 이미 겉잡을 수 없이 비에 젖어 무거워졌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솜이불처럼 무거워진 마음을 이끌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대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상을 하게된다. 내가 그대가 되고, 그대가 내가 되는 신비로운 삼투압의 순간을 꿈꾸는 것이다. 그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대의 심장으로 이 그리움을 느껴본다면, 지금 내가 앓고 있는 이 지독한 열병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그대도 나만큼 나를 생각하고 있기나 할까?" 입안에서만 맴돌던 질문을 기어이 허공에 뱉어놓고는, 스스로가 멋쩍어 헛헛한 웃음을 한 번 지어본다. 이 웃음은 기대감이 아니라, 어쩌면 지독한 고독 속에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 보이는 슬픈 자조(自嘲)에 가깝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만이라도 그대의 하루속에 내가 스쳐 지나갔기를 바라는 소박한 이기심이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다. 사랑과 그리움의 무게는 언제나 저울의 수평을 맞추지 못한다. 대개 더 많이 사랑하는 이의 저울추가 아래로 무겁게 내려앉기 마련이다. 지금 내 마음의 저울은 바닥을 뚫고 내려갈 만큼 무겁지만, 때로는 그대의 저울은 가볍게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거운 저울추를 기꺼이 감내하는 것은, 이것이 내가 그대를 향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를 바라보고 또 만져보고 싶지만, 마음의 용량을 초과한 감정은 결국 통증을 유발합니다. 마음이 아리다 못해 저려오는 오늘 같은 날은, 내 안의 기억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눈물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남겨지게 됩니다. 인연을 가리켜 "아니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고,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내게 찾아온 그대라는 인연은 조절 가능한 다이얼이 아니었다. 한 번 켜진 마음의 온도는 식을 줄을 모르고, 오히려 빗물이 닿을 때마다 치익 소리를 내며 뜨거운 수증기를 뿜어 올린다. 눈물은 단순히 슬픔의 배설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와 함께했던 시간의 잔해물이며,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말들의 응축수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대지를 적시며 만물을 깨우듯, 내 눈 밖으로 흘러내린 눈물 조각들은 방바닥에, 혹은 마음의 고랑에 떨어져 온통 그리움의 이끼를 푸르게 키워낸다. 이 비가 그치지 않는 한, 그리고 내 안의 샘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그리움의 연대기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나는 창가에서 물러나 따뜻한 차 한 잔을 끓인다. 찻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바라보며, 기다림이라는 행위가 가진 본질적인 온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처음 그대를 그리워할 때 내 마음의 온도는 백도가 넘는 끓는점이었다. 당장이라도 바람이 되어 날아가 그대 곁에 머물고 싶었고, 그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격정적이었고, 잔인하리만큼 뜨거웠으나, 오랜 기다림과 비 내리는 날의 성찰을 거치며 깨달은 것은, 참된 그리움의 온도는 끓는점이 아니라 인간의 체온을 닮은 36.5°C의 미온(微溫) 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너무 뜨거우면 상대방을 데이게 하거나 나 스스로를 태워버리지만, 체온을 닮은 은은한 온도는 상대를 편안하게 감싸 안고 나를 지켜내기 때문이다. 오늘 마주한 이 빗속에서, 나는 그대 기다림의 적정 온도를 배운다. 비록 내 눈물이 산산조각나서 그리움에 젖어들지라도, 이 아픔은 파괴적인 절망이 아니다. 내 영혼을 맑게 씻어내고, 그대를 향한 감정을 더욱 순수하게 정제하는 시간의 과정이다. 비는 언젠가 그칠 것이고, 햇살이 눈부시게 대지를 비출 때, 내 마음에 푸르게 자라난 그리움의 이끼들은 아름다운 정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대가 나를 생각하든 그러지 않든, 나는 이 기다림의 끝에서 가장 따뜻하고 성숙한 나만의 온도로 그대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창밖의 빗소리가 점차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마음을 채워온다. 여전히, 그대와 함께했던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지만 참 좋은 날이다. - 하늘꽃 윤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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