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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 1章~13章

작성자소이도리|작성시간13.03.24|조회수2,586 목록 댓글 0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 1章~13章

 

 

 

 

[들어가는 말]

 

『태을금화종지』는 당나라(8세기) 때의 여동빈 대선사의 가르침이

오랜 세월에 걸쳐 구전되어 오다가 글로 엮어진 것이다.

초기 목판본의 간행은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920년경 『혜명경』과 함께 북경에서 1천 부가 출간되었다.

 

'태을[太乙]'은 생명의 근원, 뿌리자리를 가리킨다.

'금화[金華]'는 곧 ※금단[金丹]이요, 선천태을의 진기[先天太乙之氣]이다.

태을은 본체[體]가 되고 금화는 작용[用]이 되는 것이다.

 

수행을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삼라만상이 고요해지고,

마음은 극히 고요한 정적 속에 빠져들며,

광명이 충만하여 밝은 달이 중천에 떠 있는 듯하고,

대지가 모두 광명의 경계가 되는 듯 느껴지니,

이는 심체(心體, 본성)가 열리고 금화가 빛을 뿌리는 현상이다. 

기가 환히 빛나 어둠이 전혀 없는 굽이치는 대광명의 모습,

이것이 바로 참 성품 본래 모습이다.  

 

태을금화를 성취하는 방법은 '회광[回光]'에 있다.

육근[六根, 여섯가지 감각기관: 眼耳鼻舌身意]을 통해 누설되는

생명을 환원시켜 수렴 통일하는 수행법이다.

회광[回光]은 곧 '기[氣]를 되돌리는 것'이다.

밖에서부터 안으로 되돌려야 하고 식신[識神, 의식지각 작용]에서

원신[元神, 순수본성 작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몸 안에서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의 본체를 구하는 것이니,

곧 역법[逆法]인 것이다.

 

본서 『태을금화종지』에서는 그 관건을 '눈[目]'에 두고 있다.

눈은 인체의 모든 양기[陽氣]가 집중되는 까닭에

음부경『陰符經』에는 '기가 눈에 있다' 하였고,

눈은 신[神]이 노니는 현빈의 문[현빈지문玄牝之門]이라고도 하였다.

눈은 밖으로 향하면 오적[五賊]의 선봉이 된다고 하며,

하단전의 명문[命門]과 함께 또다른 인체의 명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눈을 억제하여

참 성품[眞性]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여러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태을금화종지는 수행의 대경대법을 설명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언제든지 수행에 임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마음의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방지하는 법이다. 

마음이 산란함은 스스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고칠 수 있지만,

수행시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잠에 빠지는 혼침은

음[陰]으로 빠져드는 것이라 크게 경계하고 있다.   

또한 새벽에 2~3시간 씩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수행의 긴요한 방법과 원리를 전하고 있다.

 

성과 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본체가 고요함[靜]을 이루어야 한다.

고요함이 극에 이르렀다는 것은 모든 것이 종일된 상태를 말함이다.

여기서부터 태을금화가 생하게 된다.

 

총괄하면 수행[修行]이란

심이 고요하고 기가 안정되는 것을 기틀로 하고 있는바[총시 심정기정위기總是 心靜氣定爲基] 

마음을 정정[定靜]에 이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태을금화종지는 혜명경과 더불어 수행의 요체를 전하고 있으니

이 책을 숙독하면 수행의 대경대법을 해오[解悟]하게 될 것이다.

인연있는사람들이 꼭 이 글을 만났으면 한다.

 

※금단[金丹] : 감괘[坎卦]의 안에 있는 양효 즉,

건괘의 순수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한 기[氣]를 말한다.

도가에서는 금단을 연[鉛]이라고도 말한다.  

글자를 파자하면 金公이 되는데

오행원리로 볼 때 생명의 정수인 수[水]의 고향[金生水]이 되므로

바로 여기서 글자를 취한 것이다.

 

 

제 1장 하늘의 중심[天心]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절로 그러함을 진리 내지는 이치라고 한다.[自然曰道]
진리[道]는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이 하나의 본성일 뿐이요,

사람의 생명 활동을 주재(主宰)하는 하나의 으뜸된 신[元神]일 뿐이다.
본성[性]과 생명[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빛[天光]에 의지하여 있는데 하늘의 빛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사람의 두 눈에 의지하여 있다.
옛날부터 선인(仙人)이나 진인(眞人)이라  하는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서로 가르쳐 전하였는데,

하나[一]를 가르쳐 전하면 하나를 체험을 통하여 얻곤 하였던 것이다.


 

가장 높은 스승이신 태상노군(太上老君)께서

세상에 몸을 나투신 뒤로 동화제군(東華帝君)이 전하여 받고,

다시 차례대로 여조에게 내려와서, 다시 차례대로 전하여져서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이라는  두 큰 맥으로 이어졌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의  태어나기 이전 상태를 온전히  보존하라고 가르치는

전진(全眞)의 가르침이 극도로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큰 세력을 떨친다는 것은 그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뿐,

오히려 그 마음에서 마음으로 남모르게  전해지던 가르침과 깨달음은

날로 희미해져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내면의 세계에  남은 것이라곤 없을 정도로 끓어 넘쳐서,

사람들은 분수를 모르고 잘난 체만 하는 풍조가 극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극도에  다다르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이치인지라,

동진(東晉)때의 허진군(許眞君)의 가르침을 따라서

맑고 밝음을 굳게 지키는 정명교(淨明敎)가 자비로움을 베풀어 

사람들을 널리 건지기 위하여, 문자만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떠나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주고자  하는 뜻을 특별히 세우고,

높은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을 맞이하여 이끌어 주게 되었다.


 

이를 듣는 사람은 천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만난 것이요,

이를 전하여 받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한때에 진리의 모임[法會]를 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허진군의  애쓰심을 우러러보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사회생활에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잘 지키고,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서 확실한 뿌리를 내린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야, 태어나기 이전의 참다운 세계[眞]를 닦고

본성[性]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외람되게도 스스로 사람들을 건지는 스승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먼저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라는 말의  뜻을 밝혀 낸 뒤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태을(太乙)이란, 이보다  더 이상의 위는 없다는  말이다.

단(丹)을 가르치는 법들은

모두  유위(有爲)한 것들을 빌어서 무위(無爲)함에  이르고 있는 것들이지,

유위(有爲)를 단번에  뛰어넘고 무위(無爲)에로

곧바로 들어가는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아니하다.
그러나 그 전하고 있는 종요로운 뜻은 본성을 닦고 불리는 일과

그 효과를 곧바로 드러내 놓고 있어서,

첫째 가는 가르침에 속하고 둘째 가는 가르침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묘하다[妙]"라고 한다.


 

금화(金華)란 말은 곧 빛을 말한다.

빛에는 색이 없으므로 황금 꽃[金華]으로 상징을 삼았는데,

그  꽃[華]이라는 글자의 뜻 가운데에는 보통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하나의 빛이라는 뜻도  들어 있으니,

다름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위없고 참된  기'[先天太乙之氣]라는 것이다.

『입약경(入葯經)』에서,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물을

고향으로 하는  납은 그 맛이 한가지이다."

[수향연,지일미水鄕鉛, 只一味]라고 말할 때의  납[鉛]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그 납이라는 것은 물을 상징하는  감괘(坎卦)의 두 음효(陰爻) 가운데에  있는

양효(陽爻)에 해당한다.


 

 빛을 되돌려 비추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스르는 법[逆法]을 써서,

하늘의 중심[天心]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 쏟아 붓는 것이다.
하늘의 중심[天心]은  해[日]와 달[月]의  가운데에 있는데,

『황정경黃庭經』에서는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 가운데의

사방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 힘차게 살아  나오고 있는

참된 기[眞氣]를 다스릴 수 있다"[寸田尺宅, 可治生]라고 말하고 있다.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이란 얼굴을 말하는 것이니,

얼굴 위에  있고 사방이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란

바로 하늘의 중심[天心]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사방 한치 정도 되는  가운데에는,

약초들이 빽빽하게 널려 자라고 있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는 평탄한 공간이 높다랗게 걸려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라든가,

옥황상제(玉皇上帝)께서 사시는 하늘나라 서울에 세워진

단청 입힌 궁궐이 보기에도 기묘한 모습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나아가서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한 신(神)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허중'(虛中)이라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영대'(靈臺)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조토'(祖土),'황정'(黃庭),

'현관'(玄關),'선천규'(先天竅)라고 한다.


 

어떻든 하늘의 중심은 마치 사람이 사는 집과 같은 곳인데,

빛이 그곳의 주인 어른이다.
그러므로 빛이 한번 그곳으로 되돌아 비치게 되면,

온몸에 두루 퍼져 있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기(氣)가

모두 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는 마치 성인(聖人)이 임금으로  되어서 서울을 정하고 지극한 법칙을

세우면, 그를 따르기 위하여 보물과 비단을 들고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수없이 많게 되는 것과 같고,  한 집의 주인이 깔끔하고  밝으면

그에 따른 사람들이 저절로 시키는 일을 잘 받들고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저 빛을  돌리는 일[回光]만을 하면 될 뿐이다.

위없이 묘한 비결이다[무승묘체無上妙諦].


 

빛이라는 것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어서,

한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가 어려운데,

이것을 되돌려 비추어 오랜 기간이 지나면, 이 빛이 모여서 엉기게 된다.
이 빛이 엉겨 모인 것은  곧 저절로 그러하고[自然] 진리 자체로

된 몸[法身]이라는 것이며,

아홉 하늘 위에 신(神)이 엉겨 모이게 된 것이다.

『심인경心印經』에서 이른바 

"뜻을 고요히 하여 하느님이  있는 곳을 지키노라면,
진리의 태아가 그곳으로 날아올라 가게 된다"[묵조비승默朝飛昇]는 것이다.


 

그 종요로운 뜻을 행하여 가기 위하여는,

힘들여 찾거나 한발 한발 밀어 올리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잡됨이 없이 하느님이 있는 이곳[上丹田]에다가

생각을 못박아 두면 될 뿐이다.

『楞嚴經능엄경』은 중생들이 본디 마음을 잃고 헤매이므로

일곱  세계에 윤회하게 되는 이치[칠취七趣]를 설명하는 곳에서,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오직 그것만이 있는 순수한 생각은

그 자체로서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으니,  반드시 하늘 위에 나게 된다"

[순상즉비, 필생천상 純想卽飛, 必生天上]라고 말하였다.

이곳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공기로 이루어진 푸르고 푸른 바깥 세계의 하늘이 아니고,

"진리의  몸을 선천팔괘방위(先天八卦方位)  가운데 건괘(乾卦)에

해당하는 궁궐에 태어나게 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 건괘에 해당하는 궁궐이다.
이 상태를 오래도록 지켜 나가면,

저절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 바깥에

또 다시 어떤 몸이 있게 되는 경지가 이루어진다.


 

황금 꽃[金華]는 다름아니라 금단[金丹]이다.

신의 밝음[神明]이 변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여러 스승들이 누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묘한 방법의 가르침은,

비록 털끝만큼도 어기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마치 힘찬 미꾸라지가 손아귀를 빠져나가듯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총명하여야 하고, 또한 반드시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여야 한다.
아주 총명한 사람이 아니면, 이 가르침을 행하여도 얻지를 못하고,

아주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가르침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얻지를 못한다.


 
제 2장 으뜸되는 신과 의식의 신[원신 식신 元神識神]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하루살이같이 보고,

큰  진리는 하늘과 땅도 물거품같이 본다.

오직 생명  활동을 주재(主宰)하는 으뜸된 신[元神]만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본성[眞性]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그 위에 있다.
그 정(精)이나 기(氣)라는 것은  하늘이나 땅을 따라서

썩거나 허물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생명 활동을 주재하는 으뜸된  신이 그에 머물러 있게 되면
곧 무극(無極)이 이루어진다.

하늘을  생기게 하거나 땅을 생기게 하는 것도 모두 이 이치에 말미암는다.
배우는 사람이 다만  이 으뜸된 신만을 감싸서  지킬 수 있으면,

음(陰)과 양(陽)이 변화하는 굴레를 뛰어넘어서 그 바깥에 태어날 수 있으며,

더 이상 길을 잃고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라는 

굴레 속을 윤회하지 아니하여도 된다.

이것이 곧  선(禪)을 하는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거나

크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가르침을  전할 때에 흔히 쓰는

"본성을 보아야지......"[견성방하 見性方可]라는 가르침이다. 

이른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는 본래의 모습'[本來面目]이 라는 것이다.


 

보통사람이 어머니의 태(胎)에 태어날  때에

그 생명 활동을 주재하는 으뜸된 신은 사방  한치 되는 곳[方寸]에

머물러  살게 되고, 의식(意識)의 신[識神]은 그 아래에 있는

심장(心臟)에 살게 된다.

아래에 있고 피와 살로 된 심장(心臟)은 모양이 마치 큰 복숭아 같은데,

허파가 그것을 덮어서 감싸고 있고, 간이 옆에서 돕고 있으며, 

큰 창자, 작은 창자가  밑에서 떠받치고 있다.

만일 사람이 하루 동안 밥을  먹지 아니하면,

심장(心臟)에 아주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놀라운 말을 들으면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화나는 일을 들으면

심장이 괴롭고 답답하며, 사망(死亡)을 보면  슬퍼지고,

아름다움을 보면 눈길을 빼앗긴다.

그러나 머리 위에  있고 하늘의 중심인 사방 한치  되는 곳에야

어찌 아주 미미한 흔들림이라도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의 중심인  사방 한치 되는 곳은 

절대적으로 움직일 줄 모르는 곳이란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사방 한치 되는  곳 가운데에 있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뜻[眞意]은 어찌 움직이겠는가?

그것이 움직일 때에는 별달리  묘(妙)한 일이란 없지만,

별달리 묘한 일이 없는 그것이 또한 가장 묘한 일이기도 하다.

보통사람이 죽을 때에도 이것이 움직이게 되는데, 그것은 정말 별일이 아니다.
가장 묘하다는 것은, 빛이 이미  모여서 엉겨지고 뭉쳐져서 되고,

진리 그 자체인 몸[法身]이 차츰차츰 신령스럽게 통하면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
위에 말한 것은 모두가 지금까지  몇천 년이 지나도록

가르쳐 전하여 주지 아니하였던 비밀이다.


 

아래에 있는 의식의 신이 마치  변방에 있고 세력이 강한 제후의 나라의

사나운 장군과 같아서 천자의 유약함을 업신여겨 아래에서 조정의 기강을 잡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상황이 오래되면 곧 임금과 신하의 지위가 전도(傳導)되고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빛을 엉기게  하여 으뜸된 신이 있는  궁궐[元宮: 원신이 머무는 곳, 즉 상단전]을 비추면서

지키게 되면, 마치 지혜가 빼어나고 밝은  임금이 위에 있는 것 같고,

두 눈을 통하여 밖으로 나가던 빛이 내면으로 되돌아 들어오게 되면, 

마치 왼쪽에 서 있는 문신(文臣)과 오른쪽에 서 있는  무신(武臣)이

마음을 다하여 보필하는 것과 같아진다.

안으로 다스림이 엄숙하게  이루어진 뒤에는,

모든 간사한 무리들이 저절로 창끝을 아래로 향하여 내려뜨리고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아니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단을 이루는  길[丹道]에 있어서는,

정(精)이라는 수(水)와

신(神)이라는 화(火)와

뜻[意]이라는 토(土),

이 세 가지를 위없는 보물로 삼는다.
정(精)이라는 수(水)는 무엇인가 하면,

다름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참되고 하나뿐인 기[先天眞一之氣]이다.
신(神)이라는 화(火)는 곧 빛이다.
뜻[意]이라는 토(土)는  곧 가운데 궁궐 속에  있는 하늘의 중심이요,

하늘의 마음[天心]이다.
신[神]이라는 화(火)는 작용(用)이 되고,

뜻[意]이라는 토(土)는 본체(體)가 되고,

정[精]이라는 수(水)는 터전(基礎)이 된다.


 

보통사람은 뜻[意]으로 인하여서  몸[身]을 낳는데,

몸이라는 것은  단지 7척(2미터)에 불과한 육체일 뿐만 아니라

몸에는 넋[백魄]이라는 것이 있는데, 넋은 의식에 붙어서 작용을 하게 되고,

의식은 넋에 힘입어서  생겨난다.

넋은 음(陰)하고, 의식[識]의 바탕이다.

의식은 끊임이 없으니, 생겨나고 또 생겨나고 한 세대(世代)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며,

넋의 모습이 바뀌어지거나, 그 넋이 몸담고 있는 그릇이나

그것을 이루게  되는 재료가 변하게 되는 일은 끝나지 아니한다.
오직 얼[혼魂]이라는 것이 있어서,  신(神)이 갈무리되어 있는 곳이 된다.

얼은 낮이 되면 두  눈에 깃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간(肝)에 가서 머문다.

얼이 두 눈에 깃들이게 되면  눈이 볼 수가 있고, 

간(肝)에 가서 머물면 꿈이 이루어진다.

꿈이라는 것은 신(神)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위로는 아홉 단계의 하늘[九天]과 아래로는 아홉 층계의 땅[九地]을

눈깜짝할 동안에 모두 다녀오기도 하는데,

깨어나면 그  모든 것이 언제 있었더냐는  듯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치 깊은 연못 속같이 된다.
어떤 형태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넋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돌리게[回光] 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얼[魂]을 불리게 되고,

신(神)을 보존하게 되면  넋[魄]을 눌러 놓게 되며,

의식[識]을 끊어버리게 된다.


 

옛 사람들이 세상을 벗어난 방법은,

음(陰)한 찌꺼기들을 모조리 불로 불려서 잡된 것 하나없이 순수한 양(陽)으로

이루어진 상태 곧 팔괘(八卦) 가운데의 건괘(乾卦) 상태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으며, 넋을 녹여 없애고 얼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음(陰)을 녹여 없애고 넋을 눌러 놓는 방법을

가르킨 것이다.

순수한 양(陽)만으로 된 상태인 건괘(乾卦)의 상태로 돌아오는 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빛을 돌리는[回光] 방법만이 있을 따름이다.
빛은 곧 순수한 양(陽)만으로 이루어진 상태인 건(乾)이고,

그것을 되돌려 비춘다는 것은 곧 그것을 떠나갔던 상태로부터

되돌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 방법만을 지키고 있노라면, 저절로 정(精)이 가득 차게 되고,

신(神)이라는 화(火)가 피어 나오게 되고,

뜻[意]이라는 토(土)가 엉겨서 흩어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스러운 태아[聖胎]가 맺힐 수 있게 된다.


쇠똥구리라는 곤충이 쇠똥을 동글동글  굴리면

그 알맹이 가운데에서 흰 빛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신(神)을 그것에 쏟아 부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신의 작용에 의한 보람[신공神功]이다.


이와 같이 쇠똥 알맹이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것의 조짐을 낳고

그 껍질을 벗어 버릴 수 있거늘, 나에게 있고 참다운 마음이 쉬고 있는

하늘의 가운데[天心]라는 곳에다가 신(神)을 쏟아  붓는다면,

어찌 또 하나의 새로운 몸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하나의 신령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성[眞性]이

하늘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공[건궁乾宮]에 떨어지고 나면,

그것은 곧 얼[魂]과 넋[魄]으로 나누어진다.
얼[魂]은 하늘의 중심[天心]에 있게 되는데
양(陽)하고 가볍고 맑은 기(氣)이다.

이것은 텅 비고 고요한 우주의 근원[太極]으로부터 온 것인데,

우주에서 가장 으뜸이며 근원이 되는 창조주[元始]와 같은 모습이다.
넋[魄]은 음(陰)하고 무겁고  탁한 기(氣)인데,

모양ㆍ모습이 있는 모든 생물의 육체에 붙어 있다.
얼[魂]은 살기를 좋아하고, 넋[魄]은 죽기를 바라는 성질이 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色]을  좋아하여 움직이는 모든  기(氣)는

모두가 넋[魄]이 그렇게 하는 바이다. 

다름아니라 의식의 신[識神]인 것이다.

붙어 있던 생물이 죽은 뒤에는 피로  된 음식을 받아 먹는데,

되살아나는 경우에는 음(陰)한 것들이 음(陰)한  것에게로 돌아가서

같은 것끼리  뭉치게 되기 때문에 아주 큰 불행이 일어난다.
배우는 사람은 그 정(精)과  기(氣)와 신(神)을 불리는 과정에서

이 음(陰)한 넋[魄]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  버리면,

곧바로 잡된 것 하나없이 순수한 양(陽)으로 되는 것이다.


 
제 3장 빛을 돌게 하고 중을 지킨다[회광수중回光守中]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말이 어찌하여 나왔는가?
문시진인(文始眞人) 곧 관윤자(關尹子)의 『문시진경文始眞經 』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빛을 돌게  하면, 하늘과 땅의 음(陰)하거나  양(陽)한 기(氣)가

모두 모여서 엉기지 아니함이  없게 된다.

이른바 깔끔하고  세밀하게 깊이 생각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고,

기(氣)를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도록 순수하게 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려보는 생각[想]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도록 순수하게 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사精思 순기純氣 순상純相]

 

처음에 이 방법을  행할 때에는 어떤 존재가 있는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없는 듯이 느끼며 행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계속하여

보람이 이루어져서 피와 살로 된 보통의 몸 바깥에 또 하나의 어떤 몸이

이루어지는 때가 되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

그 어떤 존재가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백 번  거듭하는 동안 오로지 이 일만을 하게 되면,

그제야 빛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와 같이 참답게 된다.

이렇게 된 뒤에야, 그 빛이 신령한 불[神火]이 되고, 바른 생각[正念]을 이루게 된다.
위와 같이 배우고  닦으면서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백 번 거듭하고 나면,

빛이 저절로 모여들고  그 가운데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참으로 양[眞陽]한 어떤 하나의 점이 저절로  갑자기 생겨나오는데,

마치 기장쌀 알맹이 같은 구슬이다.

부부가 서로 합하면 아이가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땅히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빛이 돌면 몸 속에 있는  불[火]이 운행을 하는데,

마치 해가 운행을 하여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생기듯,

빛이 되돌려 비추는 곳에 따라서 몸 속의 불[火]이 운행하면서

여러가지 정황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빛의 돌아감이

곧 몸 속의 불[火]이 엮어내는 계절[候]가 되는 것이다.[화후火候]

 

우주 자연의 운행과 변화 가운데에는 어떤 양(陽)한 빛이 있어서

그것을 주재(主宰)하고 있는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日]가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눈[目]에 해당된다.
신(神)과 인식능력[識]을 밖으로 달려나가 버리고

흘러나가버리게 하는 일은 이 양(陽)한 빛을 병들게 하는데,

그것은 이것이 매우 순하게 변화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금꽃[金華]를 피우기 위한  길은

모든 것을 거꾸로 거스르는 방법[逆法]을 쓴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한 사람의 몸에 있고 뛰어나고 훌륭한 광채[精華]를 돌린다는 것만이 아니고,

곧바로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를 일으키는 그 선천(先天)의 참된 기[眞氣]를

돌린다는 말이며, 그때그때 일어나는 헛된 생각을 한때 그친다는 것만이 아니고, 

곧바로 천겁 동안이나 돌고 돌 윤회(輪廻)를 그쳐서 빌붙을 바 없는

공(空)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숨 한 번  쉬는 동안에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다 거치게 되니,

인간의 시각으로 따져서 일 년이  흐른 것과 같고, 캄캄한 가운데에서

숨 한번 쉬는 동안에 지옥에서부터 하늘 꼭대기까지 두루 돌아오게 되니,

그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거치는 기간이

마치 백년 동안이나 걸리는 긴 밤중과 같다.

 

보통 사람은 '으앙' 하고 한번  크게 울면서 땅에 떨어진 뒤로

계속해서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는 대로 따라서 살아갈 뿐,

늙기 전에 한 번도 그 변화를 거슬러 보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양(陽)한 기(氣)가 줄어들어 없어지고 마니,

곧바로 끝없는 밑바닥의 세계[구유 九幽]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楞嚴經능엄경』에서는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한 생각[想]은 그 자체로서 위로 날아 올라가고,

잡된 것은 그 자체로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순상즉비, 순정즉추 純想卽飛, 純情卽墜]라고 말하였다.
보통 배우는 사람은 생각[想]은  적고 정(精)이 많아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길을 따라 가라앉게 마련이다.
오직 진실하고 헛됨이 없는  진리를 깨달으면서 자세히 살피고[체관諦觀]

숨을 고르고 가늘고 길고  부드럽게 쉬어야만[息靜]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바로 거꾸로 거스르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 음부경陰符經』에서는 "그 열쇠가  되는 기틀이 눈[目]에 있다"라고

하였고, 『황제내경黃帝內經 』「소문(素問)」에서는 "사람의 몸에 있는 뛰어나고

훌륭한 광채[精華]는 모두가 위에  있는 텅 빈 구멍으로 올라가서 쏟아 부어진다"
라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이러한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한 구절을 알아듣고 몸으로 얻으면,
오래도록 사는 사람도 이에서 나오고,

굴레를 벗고 뛰어넘어서 높은 세계로 올라가는 사람도 이에서 나온다.
이것은 유(儒) 불(佛) 선(仙)이라는 세  종교의 어느 것에나 통하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것[工夫]이다.


빛은 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산과 물과 땅과 해와 달이 모두 이 빛 아닌 것이 없으므로,

오직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겠으며, 총명함이나 지혜나 간에

모든 정신작용이 운행되고 전환되는 것이

모두 이 빛 아님이 없으므로, 또한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과 땅과 빛은 그대로 이 세계를 천곱의 천곱을 또 천곱한 만큼의

세계[大千]에 가득 퍼져 있으며, 사람의  한 몸 빛도 역시 저절로

한번 빛을 돌리면[回光], 하늘과 땅과 산과 물 모든 것이 모두 도는 것이다. 
사람의 빛은 위로 눈[目]에  모여드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몸에 있어서의 큰 열쇠가 되는 사실이다.

그대들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
하루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靜坐] 있지 아니하면,

이 빛이 흘러서 돌아다닌다. 어느 곳에서 막아서 그치게 할 것인가?
만약 한 시각이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靜坐] 있을 수만 있다면,

지나온 전생(前生)이 만겁  도안에 천 번을 태어났을지라도

이 한 시각으로 완전히 끝내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은  결국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라[靜]'는 것으로 돌아온다.

참으로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처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묘한 진리[妙諦]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실제로 배우고 익히는 일[工夫]을 처음 시작함에 있어서는,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거친 곳에서부터 세밀한 곳으로 들어간다.

통틀어서 말하면, 사이사이에  끊어짐이 없이 계속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하며, 끊임이 없으면 묘한 보람이 저절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실제로 배우고 익히는 일[工夫]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一]라는 글자에 달려 있다.

다만, 그렇게 한결같이  하나를 지켜 내고 있노라면,

저절로 차가운 느낌도 오고 더운 느낌도  겪게 되는데,

그러한 경지나 느낌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눈앞에  나타나는 하늘은 텅 비어  있고, 바다는 드넓어져서,

모든 존재나 이치[萬法]가 하나같이 하나같아지고 평등해지느냐[如如]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바라던 바를 얻었다고 할 수가 있다.


성인(聖人)에서 성인으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은

되돌려 비추는 방법[反照] 아닌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는 "지혜에 이른다"[치지致知]라고 말하였고,

석가(釋迦)는 "마음을 살핀다"[관심觀心]라고  말하였고,

노자(老子)는 "안으로 살핀다"[내관內觀]라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이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만, '되돌려 비춘다[반조反照]'는 용어를  사람마다 말로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실제로 얻지를  못한다면,

이 용어의 뜻을 참으로 알았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되돌린다[反照]'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 가지고 있으면서

대상(對象)을 알고 깨닫는 능력[知覺]이 되는 마음 상태로부터

육신의 모습[形]과 그 신(神)이 아직 드러나기 이전인

사람으로서의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이 여섯 자밖에  안 되는 육신 가운데에서

하늘과 땅이 아직 생겨나기 이전의 본바탕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단지  한두 시간 할 일  없이 앉아서

자기만이 무엇인가를 눈여겨보고는,

곧 "되돌려 비추었다[反照]"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여서야 어찌 첫머리 시작이 되었던 곳에든

꼭대기 높은 곳에든 이르러 낼 수가 있겠는가?

 

불교(佛敎)나 도교(道敎)의  조사(祖師)들이 사람들에게

"코끝을 보아라[看鼻尖]"고 가르치는 것은,

생각을 코끝에 매어 두라는 말도 아니고,

눈으로 코끝을 보면서 생각은 또한 단전(丹田;中黃)에 쏟아 부으라는 말도 아니다.
눈길이 이르는  곳에는 마음이 또한 이르고, 

마음이 이르는 곳에는 기(氣)도 또한 이른다.

어찌 하나는 위에 있고 하나는 아래에 있게 할 수가 있으며,

또한 순간적으로 위에 있다가 순간적으로 아래에 있다가 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 이 말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손가락을 달이라고 잘못 알아듣는 것과 같은 사정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코끝'[鼻端]이라는 용어가 가장 그  뜻이 묘하다.

이 용어는 코를 가지고 눈길을 잡는 가늠쇠로 삼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 배우고 익히는 사람이  눈길을 코끝 가운데에 두지 아니하고,

눈을 크게 뜨면 먼 곳을 보게 되어 코를 보지 않게 되며,

눈을 너무 감으면 눈꺼풀이 붙어 버려서 역시 코를  보지 않게 된다.

눈을  크게 뜨면 눈빛이 바깥으로 달아나서 잃게 되어, 쉽게 흩어지고  어지러워지며,

너무 감으면 눈빛이 안으로 달아나서 잃게 되며,

쉽게 잠이 들어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오직 발을 내려서 가려  놓은 듯한[수렴垂簾] 상태만이 옳은 방법에 맞는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마치 코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듯이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코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써 가늠쇠를 삼은 것이다.
이 '발을 내려서 가려 놓은 듯함'[垂簾]이란 상태는

마치 햇볕이 자연스럽게 발을 뚫고 들어오는  상태이지,

애써 그것을 내려  쬐게 하거나 내려 쬐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코끝을 본다[간비단看鼻端]는 것은, 

제일 처음으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을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경우에, 눈길을 모아서 그곳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가늠쇠로서의  자리가 확실하게 잡히고 나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마치 이수(泥水)에 사는 훌륭한 목수가 줄을 이용하여 일을 하는 것과 같은데,

처음 시작할 때에  한 번 줄을 써서 좌우를 분명하게 갈라 놓고는

끝마칠 때까지 그에 따라서 일을 해 나가는 것이지,

계속해서 줄을 잡고 좌우를 번번히 맞추어 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치고[止] 비추어 살핀다[觀]"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인데, 원래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뜻을 부어가면서 두 눈으로 코끝을 살피듯이 보며,

몸을 바르게  하여 편안하게 앉아서,

마음을 이끌어다가 연중(緣中)이라는 곳에다가 매어 두는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단전(丹田) 즉 중황(中黃)이라고 하는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연중(緣中)이라고 하지만, 결국 같은 하나이다.
그리고 반드시 머리의 가운데에다가 생각을 매어 두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두 눈의 가운데로서 편편한 곳인

이른바 선천조규(先天祖竅)라는 곳에다가 생각[念]을 매어 두면 되는 것이다.
빛은 살아서 펄펄 뛰는 듯이 힘찬 물건이라서,

생각[念]을 두 눈 사이의 편편한 곳, 즉 조규(祖竅)에다가  매어 두면,

빛이 저절로 그곳으로 뚫고 들어간다.
반드시 뜻을 머리의 한가운데인  어떤 장소에다가

달라붙어 있게 하지 아니하여도 된다.
이상의 몇 마디 말로써 모든 중요한 방법과 요령을

이미 모두 다 말하여 버렸다.

그 나머지,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에 들어가고,

그로부터 나오는 요령과 그러한 요령에 앞서서 해야 하는 일과

그 뒤에 해야 하는 일들은,

아래의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치고[止] 비추어 살핌[觀]에 대한

짤막한 글을 맞추어 봄으로써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연중(緣中)이라는 용어의 뜻이 지극히 묘하다.
중(中)이라는 뜻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이 세계를 천곱에 천곱에 천곱을 한 그 많은 세계가 모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의 기틀[造化之機]이 이를 말미암아서

질서있게 제자리를 잡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치는 용어인 것이다.
연(緣)이라는 용어는, 이로  말미암아서 무엇인가 이루어지게 되는

실마리 또는 인연이라는 뜻이며, 확실하게  어느 하나의 사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중(中)이라는 용어와 연(緣)이라는 용어의 뜻은

매우 걷잡을 수 없도록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매우 알아내기 힘드는 것이지만,

깨닫고 보면 참으로 훌륭하게 사용한 용어이다.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친다[止]"는 뜻과 "비추어 살핀다"[觀]는 뜻은,

각각 용어의 뜻은 다르지만, 그에  따라서 배우고 익히는 경우의

실제에 있어서는 본래 따로 떨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흩어짐없이 한 곳에 머물러서[定]

슬기의 빛으로 조용히 비추고 있는[慧]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이루어진  뒤에는,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구태여 지난 날처럼 다리를 틀고 오롯이 앉을 필요는 없게 된다.
마땅히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어떠한 곳에  들어 있는가?",

"어디에 가서 사라지는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거듭거듭 끝까지

헤치고 들어가 봐야 하지만, 마침내 그러한 곳을 붙잡아 낼 수는 없고,

다만 그 자체로써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곳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그곳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토론할 필요도 없으니, 이른바 마음을 찾는다는 일[멱심覓心]도 

깨닫고 보면 본래 그렇게 될 수 없었던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와 너 즉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의 마음이 안정된 상태,

이것이 곧 비추어 살핌을 바르게 하는 일[正觀]이고,

이러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 곧 비추어 살피는 마음과

그 대상이 서로 맞지 아니하는 것을 비추어 살핌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邪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태로 되는  일은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처음 배우고  익힘을 시작하였던 때의

상태를 그대로 계속해서 끊어짐 없이 이어나가노라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헛된 생각을  그치고[止], 그것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노라면, 

비추어 살피는[觀] 경지가 이루어지고, 비추어 살피는 경지에 이르러서[觀],

그것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노라면, 헛된 모든 생각이 그쳐지게[止] 된다.

이러한 이치가 곧 "마음을 흩어짐없이 한곳에 머물러서[定],

슬기의 빛이 조용히 비치게 함[慧]을 함께 닦는다[雙修]"는 가르침이 된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이 되는데,

'돌린다[回]'는 것은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친다[止]'는 것과 같은 내용이고,

'빛[光]'이라는 것은 '비추어 살핀다[觀]'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생각을 그쳤다고 하는데[止], 비추어 살핌이 되지 아니하면,

돌리는 일[回]은 하고 있으나 빛[光]이 없다고  말하고,

비추어 살피는 일[觀]은 하고 있으나 헛된 생각이 그쳐지지[止]  아니하였으면,

빛[光]은 있으나 돌리는 일[回]은 없다고 말한다.
잘 알아두기 바란다. [회광=지관=정혜]


 
제 4장 빛을 돌게 하고 숨을 고른다[회광조식回光調息]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 가장 으뜸이며 핵심이 되는 내용은,

다만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마음만으로 실천하여 나가는 것일 뿐이다.

여러가지 효험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얻으려고 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크게 몽뚱그려셔 볼 때, 처음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것은,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혼침昏沈]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산란散亂],

두 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잘못을 물리치고 나면,

하늘의 비밀을 열어  볼 수 있는 어떠한 구멍[규竅]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마음[心]을 숨[息]에 함께 붙어 있도록 하는 수밖에는 없다.
숨[息]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며,

스스로의 마음은 숨[息]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한 번 움직이면 곧 기(氣)가 생기게 되는데, 그 이유인즉,

기(氣)라는 것은 본래 마음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사람의  생각은 그 움직임이 지극히  빨라서,

눈깜짝할 사이에 하나의 헛된 생각[妄念]이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그러는 과정에 한 번의 호흡(呼吸)이 그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속에서 일어나는 호흡[內呼吸]과 밖에서 일어나는 호흡[外呼吸]은

마치  사람의 목소리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결국, 하루에 몇만 번의  숨[息]을 쉬니,

그 자체로써 몇만 번의 헛된 생각[妄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흘러서, 내면 세계의 밝음을  유지하는 정신[神明]이

다 새어나가 버리면, 마치 나무가 죽어서 마르는 것과 같고,

불 꺼진 재가 싸느랗게 식는 것과 같아진다.
그렇다고 생각[念]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생각[念]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숨[息]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숨[息]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결국, 그러한 병(病)을 일으키는  얼개 자체가

바로 약(藥)으로 될 수 있음을 알아서 그렇게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름아니라, 마음과 숨이 서로 붙어서 의존하는 일[心息相依]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돌리는 일[回光]은

반드시 숨을  고르는 일[調息]과 함께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데,

그 방법은 처음부터  끝가지 귀의 빛[耳光]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빛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눈의 빛[目光]이라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귀의 빛[耳光]이라는 방법이다.
눈의 빛[目光]이라는 것은

바깥에 접해 있는 해[日]와 달[月]이 그 빛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고, 

귀의 빛[耳光]이라는 것은 속에  있는 해[日]와 달[月]이

그 정(精)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다.
그런데 정(精)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빛[光]이 엉겨서

한곳에 머물러 있는 장소이고, 같은 뜻인데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귀로는 잘 듣고[총聰] 눈으로는 잘 보는[명明] 것을 통틀어서,

그 모두가 하나의 신령한 빛에 지나지 아니한다.
배우고 익힘에 들어 자세를 잡고 앉을 때에는 눈을 가늘게 내려 떠서

마치 발을 내린 것과  같은 상태로 되는데,

그런  뒤에는 눈길을 코끝에다 맞추어 놓고 그 상태를 그대로 지켜낼 수 있게 되면,

모든 긴장과 의식을 풀어서 억지스러운 요소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모아서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 숨[息]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숨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아니되는  것이
배우고 익히는 요령이니,

여기에서 숨[息]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소리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가리킨다.

한번 소리가 나게 되면,  그 숨은 거칠고 들떠 있는 것이라서 가늘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잘 참아내면서,
숨을 가볍고 가벼우며 알듯 모를 듯하게 하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억지스러움을 다 내려놓고 더욱더욱 숨이 없는 듯한 상태로 되며,

숨이 없는 듯한 상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깊어지고

더욱더욱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  상태로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오래도록 지켜 나가노라면,

그 숨이 없는 듯한  상태조차도 갑자기 뚝 끊어진다.

이것이 곧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참된 숨[眞息]이라는 것이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과 몸이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무릇 마음이 가늘게 되면  숨도 가늘어지니,

마음이 하나로 되면 기(氣)를 움직이고, 숨이 가늘게 되면 마음도 가늘어지니,

기(氣)가 하나로 되면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마음을 흩어짐  없이 한곳에 머물게[定心] 하려면, 

반드시 그보다 먼저 기를 길러야[養氣]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마음을 가지고는 처음으로 손을 대서 시작할[入手] 곳이  없으므로,

기(氣)로 말미암아서 그  실마리를 삼는 것이다.
이른바 잡된 것 없이 순수한 기[純氣]를 지켜낸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움직인다'[動]는 용어의  뜻을 밝게 알지 못하고 있는데,

움직인다[動]는 것은  끈으로 묶어 당겨서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니,

결국 '끌어당긴다'는 용어의 별명(別名)에 해당한다.
바쁘게 달림으로써  그것을 '움직이게'[動] 할 수  있다면,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여 순수하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읨[靜]으로써

그것을 '편안하게'[寧] 할 수 없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바로 큰 성인(聖人)들께서  마음과 기(氣)의 어울림을 살펴 가지고

그때그때 알맞게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잘 세워서 뒷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곳이 된다.

 

단(丹)에 관한 책에서 "닭은  알을 품고서 마음으로 변함없이

알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알을 깔 수 있는 까닭은 '따뜻한 기운[暖氣]' 때문이다.

따뜻한 기운은 다만 알 껍질만을 따뜻하게 함에  그치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데,

닭이 마음으로 그 기운을 이끌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마음을 그곳에 쏟아 붓는다. 

마음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 기(氣)도 들어가게 되고,

따뜻한 기운을  얻어서 알이 깨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탉이 가끔씩 둥지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변함없이 알 속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 신(神)을 쏟아 붓는 바에는 조금도 틈이 생기지 아니하게 한다.

신(神)을 쏟아 붓는 바에 조금도 틈이 없게 하니,

따뜻한 기운도 역시 밤이나 낮이나 틈이 없게 된다.

신(神)이 살아 있는 것이다.

 

신(神)이 살아나기 위하여는 먼저  그 마음이 죽어 버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을 죽여 버릴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전체를 주재(主宰)하는 가장 으뜸된 신[元神]이 살아난다.

그런데  마음을 죽여 버린다는 것은 나무가 말라 죽듯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서[專一] 나누어지지 아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께서는 "마음을 한 곳에 놓아 두고, 무엇이든 일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라"[치심일처 무사일변置心一虛 無事不辨]고 말하였다.
마음은 달아나기를 잘하므로 기(氣)로써 

그것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되도록 하며, 

기(氣)는 거칠어지기를 잘하므로 마음으로써 그것을 가늘어지게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어찌  흩어짐이 없이 한곳에 머무르지[定] 아니하는 일이

있겠는가?

 

크게 묶어서 말하면,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昏沈]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散亂]이라는 두 가지 잘못이 있는데, 그 두 가지 잘못은

오직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는 일[靜功]에 의하여서만 고쳐진다.
하루하루 끊어짐없이 그 조용히 하는 일을 배우고 닦아 나가노라면

저절로 크게 쉴 곳이 있게 된다.
만약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 있는 배우지 않는 경우라면,

비록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흩어지더라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게 된다.

일단 마음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나면,

그 알아차렸다는 자체가 그와 같이 마음이 흩어짐을 막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어도 스스로도 그러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어두움 속으로  빠져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과는,

그 차이가 너무나 커서 서로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진짜 빠져 있는 것이고,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어두움 속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맑고 밝음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흩어지는 것은

신(神)이 이리저리 달려가기 때문이고,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는 것은

신(神)이 아직 맑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잘못은 좀 쉽게 고칠 수 있지만,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잘못은 치료하기가 어렵다.

병에 비유해 보면, 아프거나 가려운 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가 있으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몸의 어느 부분 또는 팔다리의 감각이 없어지는

마비  증세와 같은 것이어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흩어지는 것은 거두어들일  수가 있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 것도 가지런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서 정신을 잃어버리면,

멍청하고 또 멍청하여 깜깜하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흩어지더라도,

그 흩어지고 어지러운 장소는 아직 있기 마련인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오로지 넋[魄]만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경우에는 아직도 얼[魂]이 남아 있는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완전히 음(陰)만이 주장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어서  조용함을 배우며 익히려고 하는 경우에

잠이 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잠을 끊어 버리는  방법은

오직 호흡을 고르는 일[調息]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호흡[息]은 입과 코로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을 말한다.

비록 태어나기 이전부터 쉬고 있던  상태와 같은 참다운 숨[眞息]은 아니지만,

그 참다운 숨이라는 것도 역시 이 입과 코로 쉬는 호흡에 붙어 있는 것이다.
마음과 기(氣)를 닦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는 언제나 반드시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여야 하며,

기(氣)를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할[靜]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있다.

호흡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오직 마음으로만 스스로 알고 있어야 되지,

귀에 그 소리가 들려서는 아니된다.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가늘어지고[細], 가늘어지면 맑아지는데[淸],
거꾸로 소리가 들리면  기(氣)가 거칠어지고[粗], 거칠어지면 흐려지고[濁],

흐려지면 곧 저절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昏沈] 잠이 오게 마련이다.
비록 그와 같이 마음의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작용을 올바른 쪽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서는

아주 훌륭하게  그 작용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도

결국 작용하지 아니하는 작용이다.

오직 알듯  모를 듯하게[微微] 빛으로 비추고[照]

마음으로 들어야만[聽] 할 뿐이다.

 

"알듯 모를  듯하게 빛으로 비추고[照] 마음으로  듣는다[聽]"는

이 구절에는 숨겨진 뜻이 들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을 두고 빛으로 비춘다[照]고 말하는가?
눈의 빛[眼光]이 스스로를 비추는 것이니,

눈은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視] 바깥을 보지[外視] 아니한다. 

바깥을 보지 아니하면서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는 것[경敬]이

곧 안으로만 보는 것[內視]이  되고, 실제로 몸 속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겠는가?
귀의 빛[耳光]으로 스스로를 듣는 것이니,

귀는 오직 안으로만 듣고[內聽] 바깥을 듣지[外聽] 아니한다. 

바깥을 듣지 아니하는데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으면 곧 안으로만 듣는 것[內聽]이  되고,

실제로 몸 속에서 나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聽]는 것은 그 소리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본다[視]는 것은 그 모양없는 모양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는 바깥을 보지 아니하고,  귀로는 바깥을 듣지 아니하면,

기(氣)가 닫히고 막혀서 안으로 달려들어가려고 한다.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視] 안으로만 들어야[內聽]

기(氣)가 바깥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고 안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게 되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마땅함[中]을 얻어서

어두움에 빠져 들어가지 아니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해와 달이 정을 어우르고 빛을 어우름'

[日月 交精 交光]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두움에 빠져 들어서 잠이  오려고 하거든,

즉시 일어나서 천천히 걷다가 정신이 맑아진 뒤에 다시 앉아서, 

배우고 익힘에 들라.

맑은 새벽의 한가한 틈이 있을 때에 향 한 자루가 타도록 앉아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참 좋다.

오후가 되면, 세상살이의 일들이 아주 어지러워져서

쉽게 어두움으로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오후에는 배우고 익히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며,

또한 그 앉아 있는 시간도 꼭  향 한 자루가 다 타도록 계속할  필요는 없다.

오직 모든 연분[緣]을 내려놓아 버리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잠시 앉아 있곤 하여야 할 뿐이다.

그렇게  오랜 나날이 지나노라면 무엇인가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있게 되고,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지 않게 된다.

 


제 5장 빛을 돌게 함에 있어서 조심할 점[회광차류回光差謬]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의 경지에 차츰차츰 잡된 것이 없어지고,

속속들이 익어가게 되면, 겉보기에 마치 마른 나무나 바위같이 앉아만

있을지라도, 그 나아가는 앞에는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질 일들이

많이 놓여 있으므로, 참으로 자세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어야만 한다.

 

이 가운데의 소식은 직접 몸으로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나, 그 가운데 몇 가지는

내가 지금 규칙을 세워서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과 선학(禪學)과는 같지 아니하여서,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에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나타나는 효험이 있다.

 

먼저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과  선학과의 차별이 되는 곳을 말하고,

그런 뒤에 다시 그 나타나는 효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의  종요로운 뜻을 밟아 나가려고 할 때에는,

먼저 그 경우경우에 맞는 방법들을  마련해 두어야 하고,

일을 당하여서 꾀를 쓰거나 알음알이를 내어서 

마음을 자꾸만 작용시켜서는  아니된다.

스승의 가르침들이 더하거나 빠짐이 없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서 힘차게 움직일 수 있도록 손을 대지 말라.
기(氣)는 조화를 이루고 마음은  한 가지 일에 오로지 일치하고 있도록 하라.
그런 뒤에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드는 것이다.[入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 때에는

반드시 하늘이 비밀로 하고 있는 어떤 기틀을 얻어내야 하고,

그 기틀에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구멍[竅]를 얻어내야 한다.
그냥 할 일 없이 마치  거북이가 등껍질 속에 들어가 있듯이

앉아만 있어서는 아니된다.
이른바 선(善)이다 악(惡)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아무 곳에도

빌붙을 바 없는 텅 빔[무기공無記空]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연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말똥말똥 깨어 있으면서

저절로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떤 뜻[意]를 일으켜서 어떤 현상이나 일을 맡고자 하여서는 아니된다. 

무릇 참다운 것만을 지나치게  인정하게 되면 이러한 결과로 되는데,

그렇다고 참다운 것만을  인정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참다운 소식[眞消息]은

그것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약존약망若存若亡] 사이에 있는 것이어서,

뜻[意]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어서 어두움에 빠지지 아니한 가운데,

모든 인연을 내려놓고 저절로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인연 따라 생겨나는 헛된 세계[蘊界]에 떨어져서도 안 된다.
이른바 인연 따라 생겨나는  헛된 세계라는 것은,

다섯 가지 음마(五陰魔 :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가 맡아서 좌지우지하는  세계이다.

만약 보통사람이 마음의 흩어짐없이 한곳에 머무는 상태에 들 때에[入定],

마른 나무 등결 같고 불꺼진 재와 같은 뜻이 많고,
큰 누리에 따뜻한 봄이 오는 듯한 뜻은 작은 상태로 되면,

음(陰)의 세계로 떨어지게 되니, 그 기(氣)는  차갑고, 그 숨[息]은 무거우며,

또한 여러가지 춥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경치와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러한 상태대로 오래도록 나가게 되면, 나무나 돌과 같은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인연도 따라가서는 아니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게 되면,

명주실 타래를 헝클어 놓은  듯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문득문득 찾아오는데, 그것을 쳐 없애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도리어 그것을 따라서 그 속에 빠져 버리면 오히려 흐름을 탄 듯이

편안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두고, 주인이 노예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상태로 오래도록 나아가면, 욕심이 들끓거나 아니면

물질로 이루어진 헛된 세계[色慾界]에 떨어지게 된다.

잘되어서 위로 간  사람이라야 신(神)들이 사는 여러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잘못되어서 아래로  떨어진 사람은 이리 같은  짐승이나 남의 노예로 태어난다.
천년 먹은 여우[狐仙] 같은  것이 이것인데,

그것은 이름난 산속에서 스스로 그 공기와 달빛과 꽃과 열매를 

남모르는 나무와 풀의 정기(精氣)를 받아 이용하면서,

삼백 년  또는 오백 년, 많으면 몇천 살까지도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쌓았던 노력에 대한 보답[報]이 다하고 나면,

다시금 그 쌓은 공덕에 따라서 여러가지 유한한 세계[취趣] 가운데에 태어나게 된다.
위와 같은 여러가지는 모두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임을 이제 알게 되었으면,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에 일어나는 효험들을

찾아보아도 좋다.

 


제 6장 빛을 돌리는 경우에 나타나는 효험[회광징험回光徵驗]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타나는 효험도 역시 여러가지이다.

뿌리가 작고 그릇이 작은 사람에게는 맡길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중생(衆生)을 모두 건질 생각을 일으킨 사람이어야 하며,

교만하고 가벼운 마음이나 조그마한 것에 만족하는 게으른 마음에게는

맡길 수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스스로를 낮추어 청하여 배우고,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이 말을 하여 주어야 한다.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 가운데 가늘고 길게 끊어짐이 없으면,

신(神)이 기쁘고 즐거워져서 마치 술에  취한 듯하고

따뜻한 물 속에 푹 담겨 있는 듯하다.

이렇게 되면 온몸이 양(陽)으로 조화되고,

황금 꽃[金華]이 갑자기 토해져 나온다.

 

모든 것이 이미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변화를 떠나서

함께 고요하게[寂] 되고 나면,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에  떠 있고,

온 누리가 모두 함께 빛나고 밝은 경계[回明境界]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경지가 되면 마음과 몸이 밝아지기 시작하니,

황금 꽃[金華]이 막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온몸에 빛과 밝음이  꽉 차게 되면,

찬바람과 서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되니,

남들은 그 일을 만나게 되면 그 일에 대하여 흥미를 싹 잃어버리는

어떤 일일지라도 내가 만나게 되면 오히려 정신이 더욱 왕성해진다.
황금으로 집을 세우고, 흰 옥으로 대(臺)를 쌓더라도,

그러한 세간의 썩고 낡아 허물어질 물질에 대하여는,

나의 참된 기[眞氣]를 가지고 웃어 버리고, 나는 생명을 확실하게 세운다.

붉은 피가  흰 젖으로 변하고, 일곱자밖에 안 되는 고깃덩어리 몸이

금과 보배 아님이 없게 된다.

이러한 경지가 곧 황금 꽃[金華]이 크게 뭉친 것이다.

 

제일 첫째 단계는 『관경觀經』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해가 떨어지고, 큰물이 흐르며, 

나무들이 쭉 늘어선 것과  같은 이치의 모습[日落大水 行樹法象]이다.
해가 떨어진다[日落]는 것은 음(陰)과 양(陽)이 나누어지기 이전 상태인

소용돌이[혼돈混沌]로부터 터전을 세우는 것이니, 무극(無極)인 것이다.
큰물이 흐른다는 것은 높은 선[上善]은 마치 물[水]과 같아서

맑고 흠이 없음을 말하는데, 이러한 경지는 태극(太極)이 주재(主宰)하는 경지이다.
솟아오르는 해요  동궁(東宮)을 막 나온 황제와  같은 경지로 되는데,

동쪽을 뜻하는 진(震)을 오행(五行)으로 나누면, 

목(木) 즉 나무에 속하므로, 쭉 늘어선 나무[行樹]라는 말로써 상징하였던 것이다.

『아미타경 』에 나오는 '일곱 겹으로 늘어선 나무[七重行樹]요,

일곱 구멍에서 나오는 빛의 밝음[七竅光明]이라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후천팔괘도(後天八卦圖)에서 서북쪽은 건(乾)괘의 방위인데,
한 자리를 옮겨가서 감(坎)괘의  자리로 되니 해가 떨어지고[日落],

큰 물이 흐른다[大水]는 것은 건(乾)이 감(坎)으로 되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감(坎)은 자(子)라는 방위이며 동지(冬至)에 해당하는데,

이 때에는 천둥[雷]이 땅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힘찬 세력을  감추고 있는 때이다.

떨어졌던 해가 진(震)괘의 방위 곧 동방에 이르러서야

그 밝은 모습[陽]이 비로소 땅 위로 나오게 된다.

이러함이 마치 열을 지어 죽 늘어서 있는 나무[行樹]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나머지 것들은 이와 같은 이치로 미루어 생각하면 된다.

 

둘째 단계는, 이와 같은 생태를 토대로 하여

그 위에다가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온 누리가 얼음판으로 되어서, 유리를 깐 보배로운 땅으로 변하고,

빛의 밝음이 점점 더  뭉쳐진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신선계에 있다는 봉래산이나

극락세계에 있다는 연화대가  있게 되고, 이어서 부처가 나타난다.

금빛 나는  본성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니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처라는 사람은 크게 깨달은 금선(金仙)인 것이다.

 

이상이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효험을 큰 묶음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옛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현재에 있어서도 찾아볼 수 있는 효험으로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배우고 익힘에 들어서  앉아 있노라면

신(神)이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서,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마치  몇리나 떨어져 있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듯하게 듣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또렷또렷하게 들린다.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모두 마치 깊은 산골짜기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 소리 같지만, 조용히 하고  있으면 아닌게 아니라 들린다. 

들리기는 하지만 내가 일찍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이다.

이러한 효험은 신(神)이 골짜기 가운데에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

그때그때 스스로 경험하여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어 있는 가운데에

눈의 빛[目光]이 높이 높이 올라가고, 눈앞에는  온통 흰 빛으로 꽉차서

마치 구름 가운데에 들어 있는 듯하다.

눈을  떠서 나의 몸을 찾아보아도 찾아서 볼 곳이 없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것을 두고 "텅 빈 방에 흰 빛이 생긴다"[허실생백虛室生白]고 말한다.
안과 밖이 서로 통하여 밝고 길하고 상서로운 일들이 가득하고 또 가득하다.

 

또 하나는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어 있는 가운데에

몸뚱이가 마치 솜뭉치 같고 옥돌 같으면서,

그 몸뚱이에 우주의 근본을 이루는 기운이 왕성하다.

앉아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여도 머무를 수가 없고,

위로 둥둥 뜨곤 한다. 

이러한 상태는 신(神)이 맨  꼭대기의 하늘[頂天]로 돌아간 경지이다.

그러한 상태가 오래도록  끊임없이 일어나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일도 어렵지 않게 곧 이루어지리라고 기다려 볼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는  모두 현재 경험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역시 말만으로는 그 느낌을 다  전달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마다 심어 놓은 전생(前生)의 뿌리와 타고난 그릇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마치 『지관론(止觀論』가운데에서 말하고  있는바,

"전생(前生)에 착한 씨앗을 뿌려서 이루어진 착한 뿌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선근발상善根發相]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 일은 마치 사람들이 물을 마셔보고,

그것이 찬지 더운지를 스스로 알게 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몸소 경험하여 믿게 된 다음에야 참다운 것이 된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一氣]가

그 자체로서는 눈앞에 나타나는 확실한 경험을 하노라면,

저절로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을 가지고 따져보게 된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一氣]를 얻게 되면,

단(丹)도 역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크기는 겨우 기장알만하지만,

진리의 세계에 있는 한 알의 참다운 황금 구슬[서주黍珠]이다.

한 알 또 한 알씩 모아서,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상태로부터

아주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까지 이른다.
그때그때의 경우에 해당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가 있는데, 한 알의 기장알만한  황금 구슬이 그것이고,

본바탕을 통틀어서 거느리는 '하늘과 땅이 구별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가 또한 있는데, 그것은 한 알의 알갱이일 수도  있지만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상태[無量]에까지도 이른다.
한 알의 알갱이에는 한 알의 알갱이로서의 능력의 크기가 있는 것인데,

그 능력의 크기를 본바탕을 통틀어 거느리는 경지의 헤아릴 수 없는

크기[無量]로까지 키우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에 따라서

그가 지니고 있는 얼의 크기를 가장 첫 번째로 키워야 하는 것이다.

 


제 7장 빛을 돌리면서 생활하여 나가는 법[회광활법回光活法]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빛을 돌리는 일이 제대로  순서있게 돌아가게 되면,

성현들이 가르친 도덕 규범에 따라서 살아나가는 한,

그 세상 생활[正業]을 버릴 필요는 없다.
옛 사람은 "
일거리가 생겨서 내 앞에 닥치게 되면, 그에 응하여 넘겨야 하고,
물건이 있어서 내 앞에  놓이게 되면,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 버려야 한다"

[사례요응과, 물래요식과 事來要應過, 物來要識過]라고 말하였다.

 

내가 바른 생각[正念]을 가지고 나에게 닥쳐오는 일들을 다스려 나간다면,

빛은 사물에 영향을 받아 굴러가지  아니하고, 빛 그 자체로서 스스로 돌게 된다.
이러한 것을 그때그때 알맞게 응하되, 어떠한 모습에도 한정됨이 없이[無相]

빛을 돌리는 일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떠한 모습에도 한정됨이 없이 빛을 돌릴 수도 있는데,

하물며 누가  보더라도 틀림없이 유한한 모습에 달라붙어 있다[着相]고

판단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서, 그러한 빛을 돌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하루하루의 생활 사이에는

그때그때의  일에 따르면서 빛을 돌이켜 내면의 세계를 비출[반조返照]수가 있으며, 

털끝만큼도 나라든가 너라든가 하는 유한한 모습[相]에 달라붙어 있지 아니할  수가 있는데,

이러함을 두고 각각의 경우에 따르면서 빛을 돌림[수직회광隨地回光]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첫째 가는 일이며, 배우고 익히는 일을 묘하게 운용해 나가는 것이다.

 

맑은 새벽에, 나에게 작용하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털어 버리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읜 채로  조용히 두세 시간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 이상 훌륭한 일은 없다.
모든 일거리에 응하고 물건에  부닥치게 될 때에는,

오직 빛을 돌이켜 내면의 세계를 되비추는 가르침을 이용할  뿐인데,

그렇게 하면 한 순간도 틈이 생기거나 끊어짐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이 그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나가기를 두세 달 하게 되면,

하늘 위에 있는 모든 진인[眞]들이 반드시 내려와서

나의 배우고 익힘이 잘못되지 아니하였음을 증명하여 준다.

 

 

 

제 8장 여유있고 한가롭게 배우고 익혀 나가는 법[소요결逍遙訣]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시천존(原始天尊)이 살고  있다는 옥청궁(玉淸宮)으로부터

여유있고 한가롭게 배우고 익히는 법이 내려왔는데 다음과 같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혀서[無爲而爲],
신을 엉겨 모이게 하여[응신凝神] 기혈(氣穴)로 들어가서,
한여름[六月]에도 갑자기 흰 눈이 날리는 것을 보게 되고,
한밤중[三更]에도 둥근 해가 이글거림을 보게 되거든,
물 속에서도 숨을 쉬면서 거센 호흡[손풍巽風]과 눈빛의 힘을 빌리고,
하늘 위로 헤엄을 치듯 돌아갔다가 다시금 내려와서 유순하고,

모든 것을 싣고 있는 땅의 공덕으로 먹여 키우라[식곤덕食坤德].
아직도 한마디 아주아주  우리의 가르침에 맞으면서도

훌륭한 곳[玄中玄]이라는 말이 있으니,
세속의 티끌과 번거로움이 없고 텅 빈 그곳[무하유향無何有鄕]이야말로,
영원한 진리와 통하는 나의 집[眞宅]이다.

 

위에 나오고 한 줄마다  일곱 글자씩 되어 있어서,

율시(律詩)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글의 뜻이 도교의 맛이 있으면서

진리를 완전히 다 드러낼 정도로 깊고 훌륭하다.

 

진리를 이루는 큰 방법의  요점은,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힌다

[無爲而爲]는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므로,

어떤 방법이나 장소나 모양, 모습에 의하여 가로막히지 아니한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히므로,

겉모습으로만 조용함에 들어서 어리석은 공[완공頑空]이나

생명없는 허망[사허死虛]에 떨어지는 일이 생기지 아니한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는  작용은

하나의 중(中)이라는 글자 밖에 있지 아니한데,

여닫이 문의 지도리처럼 가장 중요한 핵심은 두 눈에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두 눈이라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의 북두칠성의 자루[두병斗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원(圓)의 중심이 되어서 돌아감으로써,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이루어지고,

음(陰)과 양(陽)을 바꾸어  가면서 굴러가게 하는데,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가장 가운데의 중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坎)괘의 가운데 효(爻) 

즉 음(陰)한 가운데에 쌓여 있는 양(陽)함을 뜻하는

'물 가운데의 금'[水中金]이라는 하나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물 즉  감(坎)괘의 본래 자리인 단전(丹田)에 들어 있는

납[수향연水鄕鉛]이라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빛을 돌리는 방법은

걸음마를 배우는 처음 단계에서의 기틀을 가리킨 것이다.
밖에서부터 배우고 익혀서 안쪽의 세계를 눌러 다스리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신하[輔]의 도리로써 임금[主]을 얻는 것이었다.
그것은 배우고 익힘의 경지가  좀 낮은[中下] 사람들이

아래의 두 관문(關門)을 닦아서 위에 있는 하나의 관문을 뚫는 일이었다.

 

이제 이곳에서는,

가는 길이  차차로 뚜렷하여지고, 배우고 익히는 일의 요령[기괄機括]이

점점 익숙해진 경우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늘은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랑하지는 아니하니,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많은 시련이 놓여 있다.
이제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가르침의 위없이
귀중한 뜻[無上宗旨]을

곧이곧대로 말해 버리고자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함부러 남들 앞에 드러내지 말며,

오직 몸소 실천하기에 힘 다하기를 거듭거듭 당부한다.

 

무릇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 용어이다.
배우고 익힌 경지가 한 층씩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빛[光華]의
밝기가 한 차례씩 커지고,

그 빛을 돌리는 방법도 한 차례씩 거듭 묘해져 나간다.
앞에서는 밖에서부터 배우고 익힘으로 말미암아

안쪽의 세계를 눌러 다스리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살면서 밖의 세계를 거느리는 것이다.

앞의  것을 다시 말하면, 신하[輔]가 임금[主]을 옆에서 모시는 것이었고, 

이제의 것은 임금을 받들면서  나라의 뜻을 백성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 배우고 익히는 모습이 크게 한번 뒤바뀌게 된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法子]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려고[入靜] 하면, 먼저 몸과 마음을 진리의 가르침에 맞게

잘 거두어 잡아서[조섭調攝], 아무런 걸림도 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모든 연분[緣]을 내려놓아 버려서  실 한 오라기도 걸려 있지 아니한데,

하늘의 중심[天心]이 가운데의  바른 자리에 자리잡게 한  뒤에,

두 눈을 내려 떠서 발을 내린 듯이 한다.

마치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높은 신하들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으니,

감히 어느 신하가 달려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런 다음에,  두 눈의 초점을 이끌어서  안으로 단전[坎宮]을 비춘다.

빛[光華]이 이르는 곳에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참다운 양[眞陽]이 나타나서 그에 응한다.

 

성(性)을 상징하는 이(離)라는  괘는

바깥은 양(陽)하고 속은 음(陰)한데, 본바탕은 건(乾)괘이다.
본바탕인 건(乾)괘와 속에 있는  효에 하나의 음[一陰]이 들어와서

주인이 된 괘인 것이니, 

생겨나고 변화하는 사물에 따라서  마음도 생겨나서 흐름을 따라
흘러나와서 이리 굽어 흐르고 저리 굽어 흐르곤 한다.
이제 빛을  돌려서 안쪽을 비추며, 사물의  생겨나고 변화함을 따라서

마음을 생겨나게 하지 아니하게 되었으니,

음(陰)한 기(氣)는 곧 머무르고, 빛[光華]이 쏟아지며 비춘다.

다시 말하여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양[純陽]이 된 것이다.
같은 종류끼리는  반드시 가까워지게  되어 있으므로,

명(命)을  상징하는 감(坎)이라는 괘의 가운데에 있는  양(陽)이

위로 올라가게 된다.

이와 같이 위로 올라가게 되는 양(陽)은, 

본바탕이 되는 곤(坤)괘의 속으로 건(乾)괘에서 하나의 양[一陽]이 들어와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본래 감(坎)괘의 양(陽)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나 건(乾)괘의 양(陽)이 건괘의 양에 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離)괘 가운데의 음(陰)과 감(坎)괘 가운데의 양(陽)이라는

두 물질이 한번 만나게 되면, 곧 서로 묶어지고  맺어져서 흩어지지 않게 되고,

우주 자연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기운이 가득  차서 살아 움직이는데,

아주 빠르게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한다.

 

나 스스로의 단전[元宮]  가운데가 마치 우주의 태초처럼  크게

텅 빈 듯하고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이 커진 듯하여서 어리둥절하게 되며,

온몸이 가볍고 묘하여져서 막 날아오르려고 한다. 

이른바 온 누리의 산허리에 구름이 꽉 들어차 있는 모습[雲滿千山]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오고  가는 발자취가 없어지고, 뜨고  가라앉는 구별이 없어지며,
맥박이 멈추고 기(氣)의 운행이 멈춘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참으로 서로 어울려 합쳐졌다고 한다.

이른바 온 누리의 물마다에 달이 담겨 있다[월함만수月涵萬水]라는 것이다.

 

그때에는 당연히 어둡고 어두운 상태인데, 그 어두운 가운데를 지키고 있노라면
문득 하늘의 중심[天心]에서 한 차례 움직임이 있게 된다.

이것이 곧 하나의 양이 다시 찾아오는  것[일양래복一陽來復]이며,

양(陽)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자시[活子時]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생겨나고 없어지며,

늘고 줄며, 변화하는 소식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보통사람은 한번 보거나 듣는  경우에는

귀나 눈이 사물을 따라가면서 움직이다가, 사물이 없어지면  그친다.

이러한 움직임[動]이나 움직이지 아니함[靜]은
모두가 보통사람들의 경우인데, 이렇게  되면,

그 사람 전체를 주재하는 대뇌의 능력을 의미하는 하늘의 임금[天君]은

사물을 지배하고 거느리는 본래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따라다니는 역할을 하게 되어서,

언제나 음(陰)한 기운의 능력을 의미하는 귀(鬼)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 이제는, 한번 움직이거나[一動]

움직이지 아니함[一靜]이 모두 귀(鬼)가  아니라 양(陽)한 사람[人]이

나와 더불어 그러하게 되었으니, 나를 주재하는 하늘의 임금[天君]도

이제는 진리에 합쳐진 참다운 주재자[眞人]로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動] 다른 것들이 그와 더불어 함께 움직이는데[動],

이와 같이  움직일 때에는 상단전(上丹田)을 의미하는 '하늘의 부리'

[天根]에 근거하고, 그가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靜] 있으면

다른 것들도 그와 더불어 함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靜] 있는데,

이와 같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있을 때에는  단전(丹田)을 의미하는

'달이 숨어 있는 굴'[月窟]에 숨는다.
움직임[動]과 움직이지 아니함[靜]은  끝없이 꼬리를 물고 도는 것이니,

나도 역시 나를  주재하는 하늘의 임금[天君]과 더불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을 끝없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한다.
모든 것을 그치고 한가롭게  쉬는 것[休息]은
위와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나도 또한 나를 주재하는 하늘의 임금[天君]과 더불어

위와 아래의 단전(丹田)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그치고 한가롭게 쉰다[休息].
이른바 하늘의 뿌리[天根]와 달이  숨어 있는 굴[月窟] 사이를

아무런 꾸밈없이 한가롭게 오고 간다는 것이다[천근월굴한래왕天根月窟閑來往].

 

하단전(下丹田)을 의미하는 천심(天心)이 가라앉아서

조용한 상태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뜻이 움직여서 그  시기를 어기게 되는 경우를,

너무 어린 것을 캐려고 하는 잘못이 있다고 한다.
하단전(下丹田)을 의미하는 천심(天心)이 이미 움직인 뒤에

나의 뜻이 움직여서 그것에 응하고자  하는 경우를,

너무 늙은  것을 캐려고 하는 잘못이 있다고 한다.
하단전(下丹田)을 의미하는 천심(天心)이 한번 움직이려고 할 때에
지체없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眞意]을

대뇌(大腦)의 건(乾)이라는 궁궐로 올라가 있게 하고,

신(神)의 빛으로 하여금 정수리를 보도록 하여서, 그 움직인 것을 이끌어 올린다.

이것이 바로 움직임이 있을 때에 정확하게 그 시기를 맞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하단전(下丹田;天心)에서  움직이던 단(丹)이

이미 건(乾)이라는 궁궐로 올라가 있게 되면,  물 속에 둥실 떠 있는 듯하고,

스스로 "이제는 되었다" 하고 만족해 하며,

갑자기 모든 변화를 여의고 고요해 지려고 한다.
이때에는 재빨리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眞意]으로써 그 단(丹)을 이끌고 내려와서 중단전(中丹田)을

의미하는 황정(黃庭)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단전(丹田)을  의미하는 중황(中黃)에 있는
신의 방[神室]을 본다.

 

이미 모든 변화를  여의고 고요해지려고 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이 경지에 이르면 한 생각도 생겨나지 아니한다.
그러니 내면의 세계를 보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한마당 크게 놓여 버리고,

모든 연분이 자취도 없어지고 마는 경지로 되어서,

이제까지 나의 하단전(下丹田)과 상단전(上丹田)의 신의 방[神室]에

차려  놓고서 불을 때고 단(丹)을 불리던 화로[爐]와 솥[鼎]조차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된다.

나의  몸을 찾아보려고 하여도 그렇게 되지 아니한다.
이러한 경지를 두고, 하늘이 땅속으로 들어간 경지[天入地中]요,

모든 훌륭하고 묘한 것들도 그 뿌리로 돌아간[衆妙歸根] 때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神)을 엉겨 모이게 하여, 

하단전(下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 들어가게 하여

봉하여 두는'[응신입기혈凝神入氣穴] 일이다.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하나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흩어진 것들을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과정으로서,

사람의 여섯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아니한다.

이 과정을 두고 사람의 본래 타고난 근원[本源]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과정[함양본원涵養本源]이요,

등잔에 기름을 다시 채워서 꺼져  가는 불꽃을 다시 살려내듯이

명(命)을 잇는 과정[함유접명涵油接命]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거두어들여진 것들은

저절로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한가롭게 모여 있으니, 

깃털 하나 들어올릴 힘조차도  쓰게 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두고 사람이 비롯된 근원을  이루는 기가 들어 있는 구멍을
의미하는
단전에 신(神)이 편안히 있는 과정[안신조규安神祖竅]이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을 거두어들여서 모아 놓은

경지[흡취선천翕聚先天]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그림자나 산울림 같은 것들이 모두 없어져 버리고 나면

마음이 쓸쓸할 정도로 고요하면서 흩어짐 없이 한곳에 크게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두고 마음이 단전(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는 경지[칩장혈기蟄藏氣穴]요,

여러가지 훌륭하고 묘한 것들이 모두 그것이 자라나온 본래의 뿌리로

들어간 경지[중묘귀근衆妙歸根]라고 한다.

 

이러한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다.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아홉  가지의 마디가 갖추어져 있는 이치도 있는데,

그러한 이치는 배우고 익힘을 계속하며 기다리노라면,

뒷날에 가서 저절로 그러한 이치로부터 우러나는 능력을 떨쳐 낼 때가 온다.

 

지금은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는 경우에 대하여 말한다.
그 '사람의 본래 타고난  근원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과정'[함양涵養]은 

처음으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靜] 때가 되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을  거두어들여서 모아 놓은 일[흡취翕聚]도

역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함양涵養]로 되고,

마음이 단전(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게 하는 일[칩장蟄藏]도

역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함양涵養]로 되어 버리고,

뒤에 이르면 그러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涵養]이
모두 마음의 단전(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게 하는 일[蟄藏]인 것이다.
그렇게 되는 가운데에  들어 있는 한 층의  과정은

그러한 이치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있는 장소[處]를 바꾸지  아니하면서도 그 있는 장소가 여럿으로 나누어지니,
이러함을 두고 모습없는 구멍[무형지규無形之竅]이라고 한다.

천개 만개 장소[處]가 결국 하나의 장소[一處]이다.

 

그 해당하는 시간[時]이 변경되지 아니한 채로 시간이 나뉘어지니,

그것들 두고 어떠한 시간적인 마디를 나눌 수 없는 시간[無候之時]이라고 한다.

태초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돌고 돌게 되는 시간의 큰 마디 작은 마디들[원회운세元會運世]이

결국 하나의 순간인 것이다.

 

무릇 마음은 더  이상 조용할 수 없을  정도까지 변화와 움직임[動]을

여의고 조용해지지[靜極] 아니하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인데,

움직이고 움직여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본래의 바탕[本體]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나 물질을 느껴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성(性)에서 피어나온 욕심[欲]이라고 한다.
만약 어떠한 일이나  물건[物]에도 느껴지지 아니하고 움직인다면,

곧 하늘의 움직임인 것이다.

그러하므로 어떠한 일이나 물질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성(性)에서

피어나는 욕심[欲]이라는  것이며, 만약 어떠한 일이나 물건[物]에도

느껴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하늘의 움직임에  의하지 아니하고 움직이는 경우에는

하늘[天]이라는 용어에 대립하여서 성(性)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그 경우에 쓰이는 성(性)이라는 용어를 설명하자면

결국 욕심[欲]이라는 용어에 떨어지게 된다.
욕심[欲]이라는 것은 어떠한 일이나 물건이 있는 곳[有物]에 있게 되는데,

이것은 그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서  살피고 있는 생각[出位之思]이며,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하나의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하면, 

곧 큰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는 바른 생각[正念]이 생겨나니,

이것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

[眞意]이라는 것이다.
고요한 상태로 흩어짐없이  한곳에 크게 머물러 있노라면,

하늘의 기틀[天機]이 갑자기 움직인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도 일어나는 움직임이 아니겠는가?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힌다"

[無爲而爲]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 장(章)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詩)의 첫 두 구절은

황금꽃[金華]의 모든 작용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구절은 해[日]와 달[月]이 서로가 서로의 본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한여름[六月]이란 곧 괘로는 이(離)괘요, 오행으로는 불[火]이다.
흰 눈이 날린다[白雪飛]는 것은  곧 이(離)괘 가운데에 있는
음효(陰爻)에 해당하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참된 음[眞陰]이

그  본래 있었던 상태인 곤(坤)괘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한밤중[三更]이란 곧 괘로는 감(坎)괘요, 오행으로는 물[水]이다.
둥근 해[日輪]라는  것은 곧 감(坎)괘 가운데에  있는 양효(陽爻)에
해당하는

하나의 양[一陽]이 이글거리며 그 본래 있었던 상태인 건[乾]괘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감(坎)괘의 것을 가져다가  이(離)괘에 채우는 일[취감전리取坎塡離]에

대한 가르침이 이 가운데에 들어 있다.

 

그 다음의 두 구절은 돌아가는  바퀴의 바퀴통과 같은 역할을 하고

마음의 세계에서 북두칠성의 자루[두병斗柄]에 해당하는 것의 작용,

다시 말하면 빛[光]이 돌 때에 올라가고 내려가게 되는 모든 기틀을 설명하고 있다.
물 가운데에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센 호흡을 가리켜서 손(巽)괘로써 상징되는 바람[巽風]이라고 하는데,

그에는 눈길을 어떻게 가지느냐 하는 문제도 포함된다.
눈빛[目光]을 나의 몸의  감(坎)괘에 해당하는 곳에 비추어 들어가서

태양(太陽)한 정(精)을 끌어 모으는 일인 것이다.
하늘 위[天上]라는 것은 곧 나의 몸의 건(乾)괘에 해당하는 곳이다.
하늘 위로 헤엄을 치듯 돌아갔다가 다시금 내려와서 유순하고

모든 것을 싣고 있는 땅의 공덕으로 먹여 키운다는 것은

곧 신(神)이 기(氣)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늘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불을 기르는 것[養火]이다.

 

끝의 두 구절은 지극한 가르침[訣] 가운데 지극한 가르침이다.
지극한 가르침 가운데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씻고[세심洗心], 생각을 털어 버린다[척려滌慮]'는 것으로서,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일 가운데에서

따뜻한 물로 머리 감고 몸 씻는 일[목욕沐浴]에 해당한다.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배우는 일[聖學]은

먼저 그칠 곳을 아는 것[地支]으로부터 비롯하여서

지극한 선[至善]에 그쳐 머무르는 것에서 끝나는데,

결국 끝없이 커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우주 자연의 큰 근원[無極]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 큰 근원[無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에서는 "어떠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도록 하여서[無住],

그 마음 자체를 살리라[生其心]"는 것으로써  부처님과 여러 높은 스님들이 지은

불교경전[대장교大藏敎] 가운데에서도 하나의 큰 가르침으로 삼고 있다.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인 도교에서는 "텅 빈  상태에 이른다"[치허致虛]는

말로써 성(性)과 명(命)을 닦는 모든 일을 모두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갈래의 가르침[三敎]를 몽뚱그리면

한마디  말에 지나지 아니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을 벗어나서 삶을 보호하는 신령한 단'[神丹]이라는 것이다.
신령한 단[神丹]이란 어떠한 것인가?
어떠한 곳, 어떠한 경우에서든 언제나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것
[無心]일 뿐이다.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인 도교에서  가장 알기 어렵고 감추어져 있는 것은

'머리 감고 몸 씻음'[沐浴]이라는 것인데,

이 하나의 일을 온전하게 배우고 익히기 위하여서는,

"마음을 아무것도  빌붙을 바 없도록 비우라"[心空]는 말만 가지고도

그 일을  다 이루어 마칠 수가 있다.

이제  한 마디의 말로써 가르쳐 주어서 막힌 벽을 깨뜨려  버렸으니,

이 일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얻으려고 이 스승 저 스승을 찾아

몇십 년을 해메어야 할지 모르는 어려움을 줄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의 뜻을잘 알지 못한 듯하므로,

불가(佛家)에서 말하고 있는 공관(空觀)·가관(假觀)·중관(中觀)이라는

세 가지 진리를 보는 입장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세 가지 진리를 보는  입장으로는 먼저 공관(空觀)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물을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빈 것[空]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다음으로는 가관(假觀)이 있는데, 그것은 비록 그와 같이 빈 것[空]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모든 사물을 허물어  버리지 아니하고

그 빈 가운데에다가 모든 것을 세워두는 입장이다.
또한 그와 같이  모든 사물을 허물어 버리지  아니하고 세워두면서도

그 모든 사물에 빌붙지 아니하는 입장이 있으니,

이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비어  있다고 보는 공관(空觀)을 닦을  때에도

모든 사물은 허물어 버릴 수 없음을 알면서,

또한 그에 빌붙지도 아니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상태는 세 가지 입장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 보는 입장이 비었음을 깊이 깨달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공관(空觀)을 닦으면, 공(空)은 그대로 비어  있고,

가(假)도 또한 비어 있고,  중(中)도 또한 비어 있게 된다.
모든 사물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이 없어 비어 있지만

허물어지지 아니한다는 가관(假觀)을 닦으면, 작용과 이용하는 방면에서

깊이 깨달아 얻는 바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가(假)는 그대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있고,

공(空)도 역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있고,

중(中)도 또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남아 있다.
중(中)의 길을 갈 때에도 역시  모든 것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을

갖지 못하여서  비어 있다는 이치[空]을 그려보게  되지만,

사람들이 부르기를 공(空)이라 하지 아니하고  중(中)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비어 있으면서도 허물어지지 아니한다고 보는 입장[가관假觀]을  가질 때에도

역시 그것을 가(假)라고 하지 아니하고 중(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었으되  허물어지지 아니한다고 보지만,

그에 빌붙어 있지 아니하는 중(中)을 지키는 입장일 때에는

더 말할 필요없이 중(中)이라고 부른다.
내가 비록 때로는 이(離)괘  하나만을 말하고 때로는 감(坎)괘도 아울러서

말하였지만 끝에 가서는 말 한마디도 움직여 옮겨 놓은 것이 없다.
이 가르침을 처음 말할 때에, "배우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

여닫이 문의 지도리처럼 중요한 곳[추기樞機]은

두 눈[目]에 모두 들어 있다"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였다.
이른바 문 지도리[樞機]라는 것은 어떤 작용[用]이다.

그것[樞機]을 이용하여서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수레바퀴 구르듯 굴러 나간다는 것이지,

그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그것[樞機]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여섯 가지의 감각 기관[六根]이나  얼굴의 일곱 구멍[七竅]이

모두 빛[光明]이 갈무리 되어 있는  곳인데, 어찌 두 눈만 가지고  말하고,

다른 것은 모두 언급하지 아니하는가?

감(坎)괘의 가운데에  있는 양(陽)을 이용하면서, 

이(離)괘에 해당하는 곳의 빛[離光]을 이용하여  그것을 비추고 끌어 모으면, 

다름아니라 밝음이요, 해와 달의 합쳐짐[明]이 된다.
이름을 원육(元育)이라 하고, 
북종(北宗)의 법파인 주운양(朱雲陽) 스승께서는

일찍이  "눈먼 사람은 진리의 길을 닦끼에 마땅하지 아니하지만,

귀먼 사람은 괜찮다"라고 말하였는데, 나의 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특별히 그 주(主)되는 것과 보조[輔]되는 것의 중요하고 중요하지 아니함을 밝혔을 뿐이다.
해[日]와 달[月]은 근원에 있어서 하나의 물건으로 보아야 한다.
해[日] 가운데에 품어져  있고 어두운 부분이 참다운 달의 속알맹이[精]이다.
달 굴[月窟]이라는 것은  달에 있지 아니하고 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의 굴'[月之窟]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달[月]이라고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달 가운데에 있는 흰 부분이 참다운 해의 빛이다.

햇빛[日光]은 오히려 달 가운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뿌리'[天之根]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하늘[天]이라고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하나의 해와 하나의 달로 나누어  버리면, 각각 반 개씩에 그치게 되고,

합하여야만 한 개의 온전한  덩어리로 이루어진다.

마치 홀아비와 홀어미가 각각 홀로 살면 가정을 이루지  못하지만,

지아비와 지어미가 되고 나면 하나의 가정이 완전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건에 있어서는 꼭 사람의 경우와 같다고 말하기 어려우니, 

지아비와 지어미가 나누어져 버려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지만, 해와 달이 나누어져 버리면

온전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눈과 귀의 관계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내가 눈이 먼 사람을 말할  때에는 귀도 이미 없는 경우이며,

귀가 먼 사람을 말할 때에는 눈도 이미 없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사물을 보게 되면,

어떠한 하나의 물건을 말하거나, 어떠한 두 개의 물건을  말하거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말하거나 간에 같은 이치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根]을 말할 때에는,

그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전체로서 하나의  감각 기관[一根]이 되는 것이며,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七竅]을 말할 때에는,

그 일곱 구멍이 전체로서 하나의 구멍[一竅]이 되는 것이다.

 

나의 말은 그 말이 무엇에  대한 것이든,

다만 그 서로 통하는 곳만을 뚫어서 드러내놓는 입장에서 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둘'[兩]이라는 것을 보지 아니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그  서로 가로막혀 있는 곳에만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곳과 경우에 따라서 보는 눈빛[眼睛]을 다르게 바꾸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

 

 

제 9장. 백날 동안 터전을 쌓음[백일입기白日立基]

 

『心印經심인경』에서

“호흡과 빛을 섞어서 임. 독맥을 돌리기를 백날 동안 계속하면,

그 효험이 신령 해진다[회풍혼합 백일공령 回風混合 白日功靈]”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터전이 되는 일을 배우고 익히기를 백날 동안 계속하면

진리의 참된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치 그대들의 현재 상태의 눈빛은 신령한 불[神火]도 아니요,

 본성의 빛[性光]도 아니요, 슬기의 횃불이나 촛불[혜지거촉慧智炬燭]도 아니지만,

백날 동안 계속해서 임, 독맥을 돌리게 되면 정기(精氣)가 저절로 충분해지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은 참된 양[眞陽]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진리의 참된 불이 저절로 물 가운데에 있게 되는데,

이러한 일을 그침이 없이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나가면,

저절로 감리[坎離]가 서로 어우러지게[交構]되고,

진리의 태아[道胎]가 맺혀지는 일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제야 나는 한 번 가본적도 없고 들어서 안적도 없는 하늘에 가 있게 되고,

진리의 아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애를 쓰거나 꾸임이 있으면 그것은 옆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백날 동안 계속해서 터전을 쌓는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낮과 밤이 백번 갈아드는 그러한 백날이 아니다.

'한 날 동안 터전을 세운다'고  말할 때에도

낮과 밤으로 이루어지는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숨에 터전을 세운다[一息立基]라고 말할 때에도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부는 호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숨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숨으로 되는 것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사람의 본바탕을 이루고 있는 으뜸 되는 신[元神]과

으뜸 되는 기[元氣]와 으뜸 되는 정[元精]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서로 떨어지거나 서로 합쳐지는 것이

모두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며,

있음과 없음과 속이 비었음과 속이 차있음은

모두 생각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숨[一息]은 한평생 지켜 나가야 되는 것이니,

어찌 백날 동안 계속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그런가 하면 백날이라는 것도 또한 한숨이다.

백날이라는 것은 다만 깊이 깨달아 얻는 바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낮 동안에 깊이 깨달아 얻은 것이 밤사이에 받아서 이용하고,

밤 동안에 깊이 깨달아 얻은 것은 낮 사이에 받아서 이용한다.

‘백날 동안 계속해서 터전을 쌓는다’고 하는 말에는 단학의 깊은 뜻[玉眞]이 들어 있다.

높은 진리의 용어는 사람의 몸에 적용해서 맞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참된 스승의 말은 배우는 사람마다에 적용되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은 아득한 가운데 아득함이요,

도교의 진리 가운데 진리로 보통사람은 풀어낼 수 없는 것이다.

본성을 보고 깨닫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참된 스승의 말이나 글로 써서 가르쳐 주심을 찾아서 배우고 익혀야하며,

그렇게 하여 본성에 맡겨서 저절로 피어 나오게 하여야 하며,

하나하나 모두 증험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제 10장.  본성의 빛과 의식의 빛[성광식광性光識光]

  

빛을 돌리는 법은 원래 사람의 모든 행동,

곧 가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모두에 통하는 것인데,

중요한 문제는 스스로 그 통하는 기틀의 구멍[기규機竅]을 찾아 가지는 것일 뿐이다.

내가 앞에서 ‘텅 빈 방에 흰 것이 생긴다[허실생백虛室生白]’고

설명하여 보인 적이 있었는데 빛이 곧 흰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처음에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아니할 때에 이러한 효험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서,

만약 빛이 나타났다고 그것에 뜻을 붙여 놓게 되면,

그 자체로써 의식에 떨어지게 되니, 본성의 빛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대들은 그와 같이 빛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생각 없이[無念] 생각을 살려야[生念] 할뿐이다.

 

어떻게 하는 것을 '생각을 살린다'고 하는가?

한평생 지킬 수 있는 하나의 생각은 빗나감이 없는 바른 생각[正念]이니,

보통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같이 아니하다.

알고 보면 마음이 생각으로 되는 것이니 생각이라는 것은 나타나 있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그 자체가 빛이요 황금 꽃 가운데의 암꽃술[葯] 약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 물건을 볼 때에는 우선 눈으로 비추어 보게 되는데

처음에는 가름[分別]을 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가 본성의 빛[性光]이다.

마치 거울이 아무런 마음 없이 비추는 것과 같고

물이 아무런 마음 없이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의식의 빛[識光]이 생긴다.

거울에 그림이 비쳐서 나타나니 이미 거울은 없어진 것이고,

물에 모습이 비치어 나타나니 이미 물이 아닌 것이다.

빛에 의식이 생기고 나면 이제는 빛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의 경우 처음에는 본성의 빛이었지만

그것이 생각으로 바뀌게 되면 의식이 되는데,

의식이 일어나게 되면 빛은 어두워져서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빛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빛이 이미 의식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黃帝內經 황제내경』에서 ‘소리가 움직이면 소리를 생기게 하지 아니하고

울림을 생기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 이러한 의미이다.

『楞嚴經능엄경』의 어떤 해설서의 앞부분에서

‘티끌에도 있지 아니하고, 의식에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뿌리를 가려잡을 뿐이다[유선근惟選根]’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티끌이란 바깥 세계의 물질이니 이른바 일체 중생이 모여서 사는 세계[器界]라는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 나 자체와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 티끌을 쫓아가게 되면 바깥 세계의 물질을 나[己]라고 여기게 된다.

물질은 반드시 어디론가 돌아가는 곳이 있으니, 통함은 문과 창으로 돌아가고,

온전한 밝음인 해와 달의 합쳐짐은 해와 달로 각각 돌아가게 된다.

남을 빌어서 나라고 하니 끝내 나 아닌 것만 있게 되지만,

『楞嚴經』에서처럼 이치를 파고들어서

마침내 너가 돌려보내지 못하게 됨에 이르게 된 것에 이르면 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와 달이 합쳐진 밝음은 해과 달로 돌아가지만

해나 달의 밝음을 보는 자체는 돌아가지 아니하는 것이다.

하늘에는 해나 달이 없는 때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해나 달을 보는 본성이 없을 때가 없다.

그와 같다면 해와 달을 가름을 일으킨다고 하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본성의 세계 곧 내가 있다는 이치로 돌아갈 수 있지 아니 하겠는가?

밝음과 어두움을 원인으로 하여서

본성이 가름을 일으킨다고 하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본성의 세계 곧 내가 있다는 이치로 돌아가서

밝음과 어두움이 둘 다 없어질 경우에 이르면,

가름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게 될까?

그러므로 가름이라는 것, 즉 의식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내면의 세계에 있는 티끌이 된다.

오직 '본성을 봄'만이 돌아감이 없다고 하는데,

본성을 볼 때에의 그 본다는 것은 봄 자체가 아니니,

본성을 본다는 것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還者]은 그 의식이 온갖 세계를 돌고 돌면서

변하는 가운데에서 본성을 보게 되더라도

그와 같이 본성을 봄은 돌아갈 곳이 있어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楞嚴經』에서

“아난아! 너로 하여금 온갖 세계를 돌고 돌아서 변하게 하는 것은

마음과 눈 탓이다[심목위구心目爲咎]”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楞嚴經』에서 처음에

팔환[八還 :밝음, 어두움, 통함, 막힘, 연분, 어리석은 텅 빔, 울체된 것, 맑고 밝음]이라는

여덟 가지 돌아갈 곳이 있는 모습들과 본다는 관념을 가려 밝히는 때에

위의 일곱 가지는 모두 그 하나하나가 돌아갈 곳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본성을 본다는 것만이 남아서 아난으로 하여금

마치 길을 가는 선승들이 주장자라는 지팡이를 잠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듯이

그것을 잠시도 떼어 놓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본성을 본다는 것에는

이미 여덟 가지 의식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참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가장 마지막에 가서 이러한 상태조차도 한 번에 깨뜨려야

참다운 의미에서 본성을 깨달음[眞見性]이 될 것이고,

참다운 의미에서 돌아갈 곳이 없는[眞不還] 나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빛을 돌린다[回光]'고 할 경우에는

바로 그 가장 처음의 더 이상 돌아갈 곳 없는 빛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털 한 오라기만한 의식과 생각도 이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너로 하여금 온갖 세계를 돌고 돌면서 변하게 하는 것은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根]에 지나지 아니하지만,

너로 하여금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것도 역시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일 뿐이다.

티끌과 의식은 어느 것이나 쓰이지 아니한다.

감각 기관을 쓰는 것이 아니고 그 감각 기관의 가운데에 있는 본성[根中之性]을 쓰는 것이다.

이제 식신에 빠지지 않고 빛을 돌리면, 감각기관의 근본된 본성[元性]을 쓰게 되는 것이고,

식신에 빠져 회광한다면 감각기관 가운데에 있는 식성[識性]을 쓰는 것이다.

털끝만 한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를 가려내는 기준이 또한 여기에 있다.

마음을 쓰면 그 자체로서 의식에 떨어진 빛이 되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대로 본성의 빛이 된다.

털끝만 한 차이가 천리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니, 가려내지 아니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의식을 끊어 버리지 못하면 신이 살아나지 못하고,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지 못하면 단이 맺히지 아니한다.

마음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하면 곧 단이 이루어지고,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으면,

그 자체로서 단을 이루는 원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황금 꽃의 암꽃술이 된다.

하나의 사물도 붙여 두지 아니하는 것을

'마음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하다[心靜]이라 부르고,

하나의 사물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不留一物]을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다[心空]'이라 부른다.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으로 보게 되면,

그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은 아직 참으로 비어 있음이 되지 못한다.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되,

그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조차도 잊어 버려야

참으로 아무것도 그에 빌붙을 수 없는 비어 있음[眞空]이 된다.

  

 

제 11장. 감과 리가 서로 어우러짐[감리교구坎離交構]

 

여조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정과 신을 새어나가게 하고 변화하고 움직여서

사물과 엇갈리는 것은 모두가 이괘(離卦)로 상징할 수 있다.

무릇 신과 의식을 거두어 들여서 바꾸어 놓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여서

가운데로 가라앉는 것은 모두가 감괘(坎卦)로 상징할 수 있다.

이괘의 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음은 색을 쫓거나 소리를 따르기를 주로 하고,

감괘와 이괘라는 것은 곧 음과양이다.

음과 양은 그 자체가 성과 명이고,

성과 명은 그 자체가 마음과 몸이고,

마음과 몸은 그 자체가 신과 기이다.

한 번 스스로 숨을 거두어들이는 것만으로도 정과 신이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흘러내려 가면서 변화하는 어리석음을 짓지 아니하게 되니,

그렇게 하면 곧 음과 양에 해당하는 두 가지 것들이 참으로 어우르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가르침에 맞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게 깊이 진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들 경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제 12장. 원(圓)을 이루는 궤도를 도는 일[주천周天]

 

여조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을 그리는 궤도를 도는 일은 기을 주로 삼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훌륭하고 묘한 방법이라고 한다.

 

만약 끝까지 따져 보아서

'어떻게 하면 원을 그리는 궤도를 돌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마치 어린 모묘을 빨리 자라라고 뽑아 올려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을 씀이 없이 지키고, 뜻함이 없이 행하는 것이다.

 

우러러 하늘을 살펴보면 원을 그리며 365도를 도는데

한순간 한순간마다 변하고 자리를 옮겨가고 하지만,

북두칠성의 첫째별 두추[斗樞]을 포함하여

그 자루 두병[斗柄]이 가리키는 북극성은

끝내 옛 자리를 옮기지 아니한다.

 

나의 마음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은 곧 북두칠성의 첫째별이고 기는 곧 많고 많은 뭇별들이다.

우리 몸의 기는 원래 팔 다리와 모든 뼈마디에 통해 있어서

조금도 힘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불려서 의식으로 떨어져 있는 신식을 불리게 되면

거짓된 것을 보는 일견이 끊어져 없어지니,

그렇게 된 뒤에야 꽃에 있어서 암꽃술과 같은 알짜 약이 생겨난다.

 

암꽃술과 같은 알짜약라는 것은 모양 모습이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성의 빛, 성광이다.

그것이야 말로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참된 기이다.

 

그러나 반드시 마음과 기가 흩어짐 없이

한곳에 크게 머무른 뒤에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캐어내는 방법도 없다.

그것을 캐어내는 방법을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크게 잘못이다.

 

그것을 오래도록 보고 있노라며 마음자리가 빛나고 밝아지며

저절로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게 되고

마음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번뇌가 그치게 된다.

만약 오늘은 용과 범을 찾고 내일은 물과 불을 찾게 되면,

끝내는 헛된 생각을 그리고 만다.

나는 지난날 화용진인[火龍眞人]이 말로 전해주던 가르침을 이와 같이 받았었다.

단을 말하고 있는 다른 책들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루에는 하루대로 원을 그리는 궤도를 하늘이 한 바퀴 돌고,

한 시간에는 한 시간대로 한 바퀴를 도는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서로 반대 방향에 자리 잡고 있는

감괘와 이괘가 서로 어우르는 곳이 바로 원을 그리는 궤도의 한 바퀴이다.

 

나에게 있어서 두 가지가 서로 어우름이

하늘에 있어서는 원을 그리며 도는 것과 같다.

그 어우름을 쉴 수가 없으니 어우르는 때가 있는가 하면 어우르지 아니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늘이 원을 그리는 궤도를 돎은 일찍이 조금도 그쳐본 적이 없다.

 그러한 결과로 음을 대표하는 태[泰]괘가 이루어지고

온 누리가 봄처럼 따뜻하고 조화로워지며,

나의 몸에 있고 한 가운데 되는 곳, 중궁이 바른 자리를 잡게 되고,

모든 사물이 한꺼번에 힘차고 가득하게 되니,

다름 아니라 단을 가르치는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머리 감고 몸 씻는 방법[沐浴]인 것이다.

이것이 큰 원을 그리는 궤도를 도는 것[大周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가운데에서 일어나게 되는 시절의 변화나

내면적인 기의 변화의 모습[火候]을 볼 것 같으면,

구체적으로 그 하나하나에는 크거나 작거나 하여서 서로 같지 아니함이 있지만,

깊이 따져보게 되면 마침내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가르침을 배우고 익힘이 저절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감이니 이이니 하는 것이 무슨 물건인지,
하늘이니 땅이니 하는 것이 무엇과 같은 것인지,

무엇을 어우름이라고 하는지, 무엇을 두고 원을 그리는 궤도를

한 바퀴 또는 두 바퀴 돈다고 하는지 모르게 된다.

 

어느 곳에서 이것은 크다 저것은 작다 하는 가름을 찾을 수 있겠는가?

통틀어서 말하자면 사람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원 궤도의 돎은

어떠한 경우에도 진리에 합하는 참된 것뿐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된 것인 경우에는 원 궤도를 단 한 바퀴만 돌더라도

하늘과 땅과 모든 것들이 모두 그와 함께 원을 그리며 돈다.

다시 말하면 사방 한 치밖에 안 되는 곳에 있을지라도

그 매우 작음이 또한 아주 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단을 이루게 되는 기의 변화하는 모습[火候]은

그 배우고 익힘이 처음부터 끝까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저절로 일어나지 아니하면,

결국 하늘은 하늘로 돌아가 그저 하늘일 뿐이고,

땅은 땅으로 돌아가 그저 땅일 뿐이며,

모든 것도 제각각 모든 것으로 돌아가 제 각각일 뿐이다.

 

만약 억지로 그것들을 합쳐 놓더라도 끝내는 합할 수 없게 된다.

마치 기후가 대단히 가물어서 음과 양이 조화되지 못한 경우와 같으니,

해와 달이 하루도 돌지 아니하는 적이 없지만,

끝내 여러 가지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이 나타남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내가 능히 음과 양을 수레바퀴처럼 돌게 할 수 있어서,

몸이 조화롭게 길러지고 살아나서 저절로 그러함에 이르게 되면,

한때에 문득 구름이 뭉게뭉게 일고 비가 내리며,

풀과 나무가 술기운이 가득 오른 듯이 싱그럽고,

산이 푸르고 강이 힘차게 흐르며,

온몸이 탁 풀리되 가슴이 빠르게 쿵쾅거리는 듯 하다가

곧 단박에 풀어짐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곧 큰 원의 궤도를 도는 것이다.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의 모습이 매우 설명하기 어렵고 묘한데,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무엇이 바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때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하니, 마치 눈에 보이는 모습에 매이는 일 같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다.

 

그 무엇이 바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때[正子時]를 또렷하게 가리켜 내지 못한다면,

어디로부터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活子時]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이미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를 알아냈으면

확실히 그 무엇이 바른 자리를 자리 잡고 있는 때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가 곧 둘인 경우이고

바른 자리를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따로 있지도 아니하고,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가 따로 있지도 아니하는 경우이다.

 

모든 것은 결국 배우고 익히는 그 사람이

진리에 합하는 참된 것을 알아내야 한다는데 달려 있다.

하나가 진리에 합하는 참된 것이면,

그것이 바른 자리에 자리 잡고 있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요,

그것이 살아 나오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되지 못한 것을 보는 경우라면,

어떤 것이 살아나게 되도 어떤 것이 바른 자리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와 같으므로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라는 것은 때때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 무엇이 바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때에 이르게 되어

뜻과 기가 맑고 밝으면,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가

깊은 병에서 살아나듯 잠에서 깨어나듯 피어 나와서 나타나게 된다.

 

만약 미처 살아 나오는 때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은

직 바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때에 대하여서만 경험을 가지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바른 자리에 바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눈앞에 나타나 있지만,

살아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헤아리기 어렵게 신령하고 묘하지 아니함이 없다는 말이다.

   

 

제 13장. 세상에 권하는 노래[권세가勸世歌]

 

여조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행하는 자들이여!

내가 이제 세상을 건져

단을 이루는 이야기를 아낌없이 하였으니

속속들이 행하기를 바란다.

 

친절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한마디 하노라.

석가세존께서도 큰 인연을 위하여 생사의 근본 자리를 바로 가리켰건만 안타깝도다!

 

깨달은 자 얼마이던가!

노자께서도 우리 몸을 걱정하시어

곡신[谷神]을 가르쳐 주셨건만, 사람들은 알아내지 못하네.

내가 이제 진리의 길을 찾는 일을 간추려 말하노니,

한 가운데 길을 쭉 통하는 이치가 역[易]이라는 큰 진리에 실려 있도다.

 

내 몸의 어디엔가 바른 자리가 알고 보니

진리의 관문[현관玄關]이며,

자[子]와 오[午]의 중간에서는 숨을 안정시킨다.

 

빛이 있어 태어난 뒤로 막혀 버린

그 구멍[祖竅]로 빛이 돌아오면,

온몸의 신[神]이 편안해지고,

단약이 몸에 흐르는 강물의 근원에서 생겨나니,

하나의 기가 솟아나온다.

가려진 막을 뚫으면 금빛이 찬란하며,

한 덩어리 둥그런 해가 변함없이 붉게 빛난다.

 

세상 사람들은 감과 리의 속 알맹이라 잘못 알고 있지만,

신[腎]에서 신[心]까지 옮겨 가려면 아직도 그사이가 가로막혀 있다.

 

어찌하면 사람의 길이 하늘의 중심에 합할 수 있을까?

하늘이 만약 부합하여 준다면 사람의 길은 저절로 합하여 질 텐데…….

모든 연분을 내려놓고 털끝 하나의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태어나기 이전이요, 진리에 합하는 참된 무극이다.

 

태초같은 텅 빔이 아름답도록 고요하여 어떠한 낌새도 녹아 들어가 버리고,

성과 명으로 들어가는 곳[玄關]에서 의식을 잊어버린다.

의식이 사라진 뒤에야 본래의 참된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니,

물이 맑으면 구슬이 보이지만 그 깊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처음을 알 수 없는 번뇌의 가로 막음이 하루아침에 걷혀 버리면

하늘나라에서 아홉 마리 용이 수놓인 책을 내린다.

구름과 은하를 걸어서 하늘의 궁궐에 오르고 천둥 번개를 손에 잡고 벼락을 타고 달린다.

 

신을 엉겨 모이게 하거나 숨을 안정시키는 것은

처음 배우고 익히는 기틀이요,

비밀스러운 자리에 되돌아와 감춤이

바로 형상을 여의고 변함이 없음이며 번뇌를 끓음이다.

 

내가 접때에 장진노라는 사람에게 두 마디 글귀를 주어서

우리의 가르침의 큰 진리를 깨달게 하여 이끌어 주었다.

자의 뒤이니 오의 앞이니 하는 것들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후천팔괘 방위에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후천팔괘 방위에 있어서의 감괘와 이괘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람의 몸에 있어서 그 방위에 해당하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숨을 머무른다' 것은 숨을 쉴 때마다 그 숨이 마음과 서로 하나가되고

기가 우리 몸의 가장 한 가운데에 있는 뿌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앉아있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협척[夾脊]이라는 것은 등뼈의 마디마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로 곧바로 뚫고 올라가는 큰길 즉 독맥을 말한다.

등뼈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관문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신이 지켜 주어서 마음을 텅 비게 하고 번뇌를 끊으며,

'아무것도 없음'에로 돌아가는 경우에만 이 관문을 보게 되고

또한 뚫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옥 같은 액체도 이곳에서 변화되고, 피도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요소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며,

기가 이곳에서 신으로 돌아가고, 신도 이곳에서 텅 빔으로 돌아가며,

텅 빔도 이곳에서 진리의 길에 합하게 되고,

진리의 길도 이곳에서 그 공변된 뜻의 처음과 끝을 이어서

원을 이루어 완전하게 할 수 있으며,

공변된 뜻도 이곳에서 그 바라는 바를 다 채울 수 있는 곳이다.

 

노란 새싹[黃芽]이 땅속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진리에 합하는 참된 약이 생기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의 터전은 오직 나란히 있는 두개의 관문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큰길을 신이 지킴으로 말미암아 쌓여진다.

위의 두 글로써 진리의 길을 닦아 나아가는 일을 이미 다 말하였다.

이것들을 똑똑하게 알게 되면,

남들의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

 

접때에 공자와 그의 제자인 안자가 태산의 봉우리에 올라가

오나라 땅에서 노니는 흰 말의 떼를 바라본 적이 있다.

안자는 그것을 보고, 비단을 필채로 쭉 펴놓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공자가 급히 그의 눈을 가려 주었는데,

그 이유는 안자가 눈의 능력을 너무 많이 써 버려서

신의 나타남인 빛을 다 써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안자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

 

빛을 돌리는 일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다.

빛을 되돌리는 일은 잡됨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배우고 익혀 나가느냐 하는데 달려 있으니,

오직 마음과 숨이 하나로 합하여져서

몸의 한 가운데 해당하는 곳[中宮]에 초점을 맞추어 비추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지켜 나가면, 저절로 신령해질 수 있고 변화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움직임 변화를 여의고,

고요한 마음 가운데 기가 안정되어야만 그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기가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면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조차도 사라지고 마음이 깨끗이 비어 있게 되면 단이 이루어진다.

 

마음과 기가 완전히 섞여서 하나로 되면,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태를 열 달 동안 따뜻이 기르듯이

진리의 태아[道胎]를 따뜻이 기르게 된다.

 

마음이 밝게 빛나고 본성이 나타나면[明心見性],

진리의 길을 다 지나와서 마친 것이다.

 

수행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각자 제 나름대로 힘써 배우고 익혀 왔지만,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는가.

그것은 마치 전 인생을 헛된 것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제물로 바쳐 버리는 것이라 안타깝고 안타깝도다.

하루라도 이것[回光]을 행하지 아니하면

그 하루는 살아 있는 귀신이 되어 사는 것이며,

한 번의 호흡에서 이것을 배우고 익히면

그 한 숨 동안은 신선인 것이다.

수행하는 이들이여!

부지런히 배우고 익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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