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를 끝낸 늙은 농부는
이웃에 있는 남자와 함께
농사지은 것들을 가지고 한양에 장사하러
먼 길을 떠나고 있었는데요
꽃 피는 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올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숨짓는
남자를 보며 늙은 농부는
"자네 걱정이 있는가 보네"라며
넌지시 묻는 말에
"사실은 그게…."
남자가 뱉어놓는 근심을 조용히
듣고 있던 늙은 농부는
"내가 해결해 줄 터이니
한양으로 돈이나 벌로 가세"
늙은 농부의 단호한 말에
찡그린 해님 같은 얼굴로 한양에 도착한
남자는 국밥 한 그릇에 먼 길 온몸을
녹인 뒤 아랫목에 누워 팔자 편하게
누워만 있는 늙은 농부에게
"힌양에 오면 해결해 준다지 않았소…."
" 돈 벌어 내려가 보면 알게될 걸세 "
"한양가면 해결해 준다더니
이젠 내려가면 알게 된다는 소리만
하니 원...."
"자넨 내려가면 씨나 뿌리면 될 터이니
넘 걱정하지 말게"
"겨우내 언 땅을 늙은 어머니 혼자
힘으로 어찌 다 간단 말이오"
"글쎄 기다려 보면 알게 된다니깐"
"밭은 그렇다 치고
고래 심줄보다 질긴 친구 놈이
빌려 간 열 냥을 여기 한양에 누워서
무슨 수로 받아준다는 거요?"
"그것두 해결해 준다지 않았느냐?"
고향 땅에 있어도해결될 리 없는 일을
천리만리 떨어진 한양에서 해결해 준다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다
코를 골고 잠든 늙은 농부와는 달리
남자는
밤새 애먼 밤하늘만 올려다보던 시간이
한 계절을 불러다 놓은 어느 날
'이제 우리도 슬슬 고향으로
내려갈 채비나 하세"
"이제 서둘러 내려가면 뭐 합니까"
"며칠 전 장사 끝내고 먼저 내려가는
보부상에게 자네가 쓴 것처럼 해서
미리 편지를 줘 보냈네"
"까막눈인 울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서
뭘 해결한단 말이오"
"누가 자네 엄마에게 보냈다 했는가
옆집에 사는 자네 친구에게 전달해 주라 했지"
"그놈은 제집에 불이 붙어도 꼼짝 안 할
게으른 놈한테 뭘 어쩌려고 편지를
보냈단 말이오"
속만 더 끓는 소리만 해대는
늙은 농부가 모는 소달구지에 올라
뜨는 해와 지는 달을 밑천 삼아
고향에 도착한 남자는
오매불망 돌부처처럼
아들 오기만 기다리는 늙은 어머니에게
달려갔을 때
"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겨우내 꽁꽁 얼어붙어 있어야 할 밭이
모두 갈려 있었고 노모가 그 사이로
씨를 뿌리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옆집 사는 네 친구가 와서
밭을 다 갈아엎어 주더구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늙은 농부는
"내 걱정하지 말라 하지 않더냐 "
"도대체 편지 내용에 뭐라고 썼길래
게으른 친구가 이 넓은 밭을 다 갈아
엎었단 말입니까?"
"별말 안 썼느리라
밭에 금덩이를 묻어 놨으니 자네 엄마가
밭을 갈지 못하게 해달라고 쓴 것밖에…."
늙은 농부는
노을이 그려놓은 길을 따라 멀어지던
자신을 보며 엎드려 절을 하는
남자에게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자네 친구에게 빌려준 열 냥은
밭을 일구어준 품삯으로 대신
받은 셈 치게나…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