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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전투/신립 vs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작성자상근|작성시간15.04.20|조회수205 목록 댓글 0

탄금대 전투

-신립 vs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배수진背水陣과 언월진偃月陣을 궤멸시킨 소서행장小西行長-

전략 1 : '전쟁은 적을 속이는 것이다'

전략 2 : '적은 제 3의 길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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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지형도

  1592년 문경은 소도시인 '현'이었다. 대도시는 '부'와 '목'(경주부, 상주목)이었고, 중도시는 '군'(예천군)이었다. 공무원이 공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곳에는 '역'이 있었으며, 민간인은 '원'을 이용하였다. 문경현과 충주목 사이에 험준한 백두대간이 있으며, 주흘산을 중심으로 조령(새재)과 계립령(하늘재)가 있고, 또한 이 경계에 고모산성과 유곡역, 그리고 안보역과 충주산성이 있다. 단양과 영주 사이에는 죽령이 있는데, 영주 쪽에 비봉산성, 단양 쪽에 적성산성과 온달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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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모산성

  고모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와 명군 장수 이여송( 작전 사령관)이 이 성 아래를 지나면서 극찬을 했던 곳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주에서 이일 사령관을 격퇴하고, 함창을 거쳐 당교에 이르렀다. 고모산성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고 2~3번이나 정찰대를 보냈다. 1593년 일본군이 평양에서 한성으로, 다시 한성에서 부산으로 퇴각할 때 이여송이 이곳을 지나면서 일본군을 방어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한다. 이 성의 전략적 요충지는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실려 있다. 구한말 문경 지역의 의병장 이강년 선생도 의병을 일으켜 이곳을 방어했고, 1950년 한국동란(내란)때도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교는 문경(점촌 시외버스터미널)과 함창 사이 경계에 있는 다리이다. 통일신라를 건국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김유신이 당나라 소정방군을 격퇴시켰던 설이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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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흘산

▼ 문경에서 바라본 주흘산

  주흘산을 중심으로 좌측이 조령(문경새재)이고, 우측이 계립령(하늘재)이다. 삼국시대~조선시대 전기는 계립령을 통과하여 덕주산성을 거쳐 충주의 남한강으로 길이 나 있었다. 조선시대 전기부터는 계립령보다는 오히려 조령을 통과하여 곧장 충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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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령(문경새재)과 조령산

   1592년 당시에는 조령에는 관문이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설명된다. 현재의 제1관문 안쪽에는 역사 드라마 세트장이 설치되어 있다. 늦가을의 조령은 핏빛만큼이나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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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제1관문 주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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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배용순

② 제2관문 조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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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제3관문 조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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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배용순

▼ 주흘산 정상에서 바라본 월악산

   좌측 멀리 보이는 산이 월악산 영봉이고, 우측 가까이 보이는 산이 포암산이다. 주흘산과 포암산 사이의 고개가 계립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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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흘산 정상에서 바라본 문경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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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읍성 터

  신길원 문경현감이 1592년 4월 27일 일본군의 칼에 전사한 곳도 이곳이었으리라! '객사터 추정' 자리가 문경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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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주흘산

  사진 좌측 제일 먼 곳의 쑥 들어간 듯한 정상부가 보이는데, 주흘산이다. 바로 위의 사진 우측으로 들어서면 아래의 월악산 능선을 따라 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월악산 정상부에서 북쪽으로 6km 지점에 충주호가 있는데, 남한강이다. 남한강을 따라 서울 광진까지 뱃길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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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에서 충주로 향하는 상행(충주 단월 바로 직전 전경)

  문경의 조령을 넘어서면 충주까지 'V'자 형태의 계곡이 이어진다. 이 사진은 낮은 지형을 보이고 있는데, 전체는 이보다 훨씬 더 가파른 지형이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규모 기병을 행군시키기에는 부적합한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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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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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도

▼ 조선군(신립)과 일본군(소서행장)의 탄금대 전투 개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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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신립)과 일본군(소서행장)의 탄금대 전투 상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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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립의 탄금대 전투를 두고, 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은 크게 2가지 측면에서 비난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지형 선택에 있어 험지를 선점하지 않았다는 것이고(조령 방어와 산성방어), 다른 하나는 병력 배치에 관한 것이다(저습지대에서의 배수진과 각월진). 전자는 전략적 선택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전술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Ⅰ. 전략적 차원

1. 지형 선택(조령 방어)

  당대나 후대의 사람들은 충주목사 이종장, 종사관 김여물, 순변사 이일 등의 대화를 근거로 신립이 조령을 지키지 않았으니 패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선제 조건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당대의 기록을 토대로 신립이 조령을 지켰다면 과연 일본군의 진격을 늦출 수 있었을까? 사진에서 보면, 일본군이 충주로 진격해 들어가는 길은 크게 세 갈래이다. 하나가 조령이고, 또 하나는 계립령(하늘재)이다. 마지막은 하늘재에서 지름재를 거쳐 달천이라 부르는 계곡을 따라가는 것이다.

  전략상 지형 선택에 있어서, 조선군이 문경의 고모산성을 선점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조령과 계립령을 동시에 방어해야 한다. 시간대별로 보면 고모산성 방어는 이미 늦은 상태이다. 1592년 4월 26일 신립은 충주에 도착하고, 일본군은 문경현(주흘산 아래)에 도착하였다. 조선군은 문경을 향하여, 일본군은 충주를 향하여 문경현에서 동시에 출발한다 해도 조선군은 조령과 계립령 모두에 도착하지 못한다.  또한 군사를 나누어 하나는 조령으로, 하나는 계립령으로 진군한다 하더라도, 어느 하나를 선점하지 못하면 오히려 배후가 염려된다.

  조령과 계립령을 넘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 안보역에 군사를 배치하면 안되느냐고 할 수 도 있다. 안보역에 병력을 배치해도 되지만, 우회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달천을 통하여 충주성을 압박하는 것이다.

  이 세 갈래 길 모두에서 진격해 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은 단월 지역이다. 단월 지역 주변 산세는 대체적으로 낮지만 경사도가 심한 지형이다. 기병 중심의 전술 운용 상황에서는 단월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 차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탄금대 전투에 대한 의문점은 신립 장군이 단월에서 충주성으로 이동했다가 탄금대(달천강)로 이동한 것과 충주에는 남산에 남산산성(=충주성)이 있는데, 이를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신립 장군이 전략상 지형 선택이라는 것을 고려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신립 장군에 대해, 조령을 방어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신립 장군이 '패장이다', '지략이 없다', '어리석다'라고 하는 것이다.  

  신립 장군을 평가할 때, 탄금대 전투 자체(충주 지역의 탄금대 지역만 고려한)만 가지고 논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문경 지역까지 전역 범위를 확장시켜 보면, 그 시대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참고로 그 당시에는 문경 조령에 있는 3개의 관문 모두 축성되지 않았다. 사진 속의 관문은 2번째 관문인 조곡관이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평양까지 진격했다가 퇴각하고 난 이후인 1594년에 증축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는 돌무더기를 쌓다가 중지된 상태였다. 주흘관(1관문)과 조령관(3관문)은 1594년 이후에 축성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 올 때는 제 1관문부터 제 3관문까지 모두 없었다. 신립을 논하면서 왜 조령을 지키지 않았을까 하면서 문경 관문을 임진왜란 관련 서적에 싣고 있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 조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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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형선택(충주성과 산성 방어)

전략 : '적은 제 3의 길로 온다'

  신립 장군은 단월역에서 방어하면서 대림산성에서 공격하기로 계획을 한 것 같다. 일본군은 안보역 근처에서 우회하여 풍동 지역으로 진격(27일 밤중에 우회한 것 같음)(왕조실록 중에서 선전관 민종신의 말에 기습작전을 감행했다고 했음)했다. 일본군이 우회하여 풍동지역으로 기습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측면이 노출되었고, 대림산성과 단월역에 주둔한 군사를 퇴각시켜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충주성과 남산산성에서 방어하지 못한 이유는 선조와 유성룡의 대화에서 유성룡이 '충주성은 토적도 막아 내지 못할 정도'라고  말 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충주성은 고려 시대 읍성 신축 후 퇴락한 것으로 보이고, 수리를 말끔히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동래성 전투에서 보았듯이 평지성 방어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들어 났으며, 남산산성의 경우, 조선 각 지역의 산성이 방치되어 있었으므로 이 역시 방치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식량과 식수가 해결될 수 있었다면, 남산산성 방어 역시 가능성이 있었으리라 보여지지만, 그쪽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자 했다면, 병사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많았으며, 낮이었기 때문에 우왕좌왕 퇴각하는 경우에는 전투를 해 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하는 수가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경우 강 자체가 방어선이 되므로 전략적 방어 요충지가 될 수 있지만, 남쪽에서 침입하는 경우 협곡을 방어하지 못하면 무인지경이 되고 충주지역은 고립된다.

  신립이 야전에 강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충주성과 남산산성을 포기하고 달천에서 배수진과 언월진을 구사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그 당시의 전시 상황과 전략적 운용 방식에 대해 올바른 정보 분석을 토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책에서는 전투 몇일 전에 비가 많이 내렸다고 했는데, 조선왕조실록과 징비록, 일본사 어디에도 몇일 전 비가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비가 내렸다면, 계곡물이 불어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회가 쉽지 않다. 비가 내렸다고 한다면 질퍽질퍽한 저습지대를 택한 상황을 비판하면 안되고, 충주지역 전체가 고립지역이 되기 때문에 퇴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다. 비가 왔어도 고립상태였고, 비가 오지 않았어도 고립상태였음을 쉽사리 판단할 수 있다.

Ⅱ. 전술적 차원

3. 배수진

  탄금대 전투를 분석할 때, 그 당시 탈영병이 많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징비록과 일본사를 비교해 보면, 징비록은 무장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사는 용감한 적장(조선군, 예를 들면 정발, 송상현 등)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하고 있다. 탄금대 전투를 기록한 일본사에 따르면, 상급 지휘관들은 용감했지만 하급 병사들이 비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령 방어와 산성 방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조선군은 용감하게 싸우다 죽느냐, 아니면 비겁하게 도망치느냐 하는 두 가지 선택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신립이 지략이 약해서가 아니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군으로 하여금 탄금대 지역으로 몰아가도록 상황 창조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

4. 언월진

  언월진은 적을 포위하면서, 양쪽 날개에 강력한 병력을 배치해서 포위 돌파하는 진법이다. 탄금대 전투에서 중앙은 그럭저럭 버틴 것 같지만, 양쪽 날개 진형이 먼저 무너진 것 같다. 한신의 배수진은 한가지 특기한 점이 있는데, 복병을 적 주둔지 가까이 두고, 적이 아군의 본대로 들어올 때, 복병이 적 주둔지(산성)를 탈환하여 아군을 공격하는 적을 배후에서 다시 포위 공격하는 것이다. 한신이 배수진을 구사한 것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신립이 복병을 배치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지, 그리고 계획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복병장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휘하의 끈끈한 부하사랑이 있어야 하고, 강력한 정예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립은 그러한 부대 단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투 초기에 고니시군은 소수 병력으로 사기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한다. 이것을 본 신립이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포위전을 구사하고, 형세가 불리하자 다시 퇴각하여 진형을 갖추어 재차 돌격했다고 한다. 다시 포위전을 감행했을 때, 일본군이 중앙과 양측면에서 집중포화를 가하자, 신립의 진형이 무너지면서 역포위를 당하게 되었던 것 같다.

■ 병력과 전력

1. 병력

  프로이스 일본사 - 병력 80,000, 사망자 8,000여명

  유성룡의 징비록 - 병력 8,000여명(충청도의 모든 군사)

                        → 사망자 수 8,000여명을 총병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군관 150여명 대동하고 있었음. 1618년(광해 10), 순변사 우치적(임진왜란 당시 원균 휘하의 장수)이 장계를 올렸는데, ... 신립과 이일이 순변사가 되었을 때 데리고 간 군관이 모두 1백 50여 인을 밑돌지 않았다고 하고, 또 근래의 규례를 살펴보더라도 이시언이 데리고 간 인원 역시 1백 인이나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찌 모두 과장하여 이렇듯 숫자를 늘린 것이겠습니까. 순변사의 임무라는 것이 한 도道를 총괄하면서 매번 번다하게 책응策應해야만 하는 것인 만큼 중군中軍을 삼기도 하고 별장別將을 삼기도 하여 크고 작은 명령을 전하게 하기도 하고 적간摘奸하게 하기도 하는 등 수시로 분부하며 여러 가지로 일을 맡길 것들이 많기 때문에 예전의 규례를 보아도 그처럼 숫자가 많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조선군(기병? 보병?)

  프로이스 일본사 ? 대부분 기병

   → 북방 여진족 대비 조선군이 기병 중심의 전투 운용 방식 고수

   → 이광 5만 근왕병이 모두 기병이었다는 것, 함안군수 유숭인이 이순신의 당항포 해전 당시 진해까지 밀고 들어온 병력이 기병 1,100여명임을 고려하면, 이때의 병력 8,000여명 모두 기병으로 보는 것이 타당(이 당시 현대적인 중대 규모로 볼 때, 보병과 기병 비율이 50대 50임을 감안하는 것이 바람직. 상황에 따라 이 비율은 유동적임)

   → 다만, 전투원과 비전투원(보급병, 기타)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타당, 이 비율은 알 수 없음

3. 조선군(정규병? 비정규병?)

   → 시정의 백도(오합지졸-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1601년 2월 16일-비변사)

  설사 정규병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황해도와 달리 충청도는 변란 지역과는 거리가 멀어 정규병이 이들 지역보다 병력 수와 훈련상태가 우수하다고 할 수 없음 → 따라서, 비정규병이 다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합지졸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4. 지휘 체계

  유성룡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지적했듯이, 군사들이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명령이 제대로 설 리 없으니, 그것이 패인의 가장 큰 원인이다.

  유성룡이 이일 패전(상주 전투)의 가장 큰 원인은 이일이 바로 손님이었기 때문이다(즉, 중앙에서 내려온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를 언급하면서 상하 명령의 부재를 언급하면서도, 뒤에서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사람이다.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 그러나, '군사를 운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정예병력이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7년 전쟁)이 왜 그토록 무참하게 패배했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러한 원인들을 정리해 보면 제일 중요한 차원은 일선 지휘관에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라, 정부의 대전략 차원과 군사전략 차원이다. 지휘관에게 제일 중요한 작전전략과 전술 체계가 패배의 원인이었다고 기록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 마치며....

  탄금대 전투를 요약하면, 신립의 경우 모집병인 동시에 비정예병, 도망병 속출, 시간 창조 결핍 등으로 인해 전략적 선택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지에 남아 적을 대적했다는 것은 보통의 지휘관의 담력을 넘어서는 것이라 생각된다. 반면 고니시의 경우 전략 판단과 전술 판단이 훌륭했다고 보아야 한다. 전체적으로는 신립을 탄금대로 몰아 붙이는 공간 창조를 했으며, 심리적으로는 신립의 조선군대를 1차적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측면을 무너뜨리고, 역포위 전술로 이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신립1546(명종 1)~1592(선조 25)의 마지막 전투는 전투이전에 이야기로 형상화된 전설로써 유명하다.

신립은 고니시 유키나(小西行長)를 맞아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던 중 전사한다. 그 패전의 원인은 전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김여물 등이 반대함에도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데 있지만, 전설은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 신립이 영웅으로서의 삶에 너무나 충실했기 때문에 여인의 원한을 샀다하고, 그의 행적을 민족적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민중의 시각 속에는 조선조 여인의 삶에 대한 억압과 억압으로부터의 부정이 내재해 있다.

전설의 기본 골격은 이러하다.
신립이 젊었을 적, 사냥을 다녀오던 도중 산중에서 길을 잃고 밤을 맞이한다. 그때 마침 어느 집을 발견하나 여인 혼자 사는 집이었다. 이렇게된 사정을 물으니, 자신의 집에 성격이 포악한 머슴이 있었는데 그 머슴은 외람 되게도 여인을 사모하여, 여인의 부모에게 여인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부모는 심히 불쾌했지만 머슴은 막무가내였다. 부모는 여인의 앞날을 걱정하여 머슴이 잠든 틈을 타 그를 죽였다한다.

그런 일이 있고, 머슴은 원귀가 되어 나타나 여인의 가족들을 차례대로 죽이고, 오늘밤은 여인을 죽이기로 한 날이었다. 사정을 헤아린 신립은 원귀를 물리치고 여인을 구했다. 여인은 자신을 구한 신립에게 자신을 거두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신립은 사회의 이치를 내세우며 자신은 이미 혼인한 몸이라 하고 물리쳤다. 후에 여인은 자살하고 임진란 때 신립의 꿈속에 나타나 신립을 탄금대로 유인해 복수했고 신립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한다.
전설의 주요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신립이 정당한 일을 하고도 여인의 원한을 사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과 여인이 행한 반민족적 행위이다.

영웅의 삶 자체가 모든 면에서 일반인과는 달라야하고 영웅을 선망하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김유신이 매일 그러했기에 그날도 그의 여인인 천관녀에게 향하는 말에 목을 친 이야기에서처럼 대업을 이루어야 할 자는 사사로운 인간사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이 영웅에게 부과된 사람들에 바람이다. 이 전설 속에 신립 또한 그런 영웅성에 충실한다. 또한 그와 관련된 여자 이야기 중 변방에서 잡은 절세 미인의 호녀를 참한 이야기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한 인간으로서 남자를 넘어 국운을 짊어진 영웅에 대한 바람이 새로운 형태로 형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으로 그는 국가의 영웅이기에 절대 패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신립은 실제 적에 의해 모욕적 패배를 당했고 죽음에 이르렀다. 민중들은 이 자신들의 영웅의 패배의 어떤 설명과 보상이 필요했을 것이며 여기에 한 여인의 원한을 끌어들여 훼손되어서는 안될 영웅의 가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립이 왜 무모하게 배수진을 치면서 적과 대결을 하였는가는 많은 사람들을 의아스럽게 만든 부분이며 민중은 이에 대한 설명도 여인의 원한을 끌어들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인 또한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을 살았던 조선조의 일반적인 여인형일 뿐이기에 그녀에 대한 비판은 차단될 수 있다. 남자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던 시대, 한 남자에 대한 신의의 맹세는 결코 그르다고 말 할 수 없다. 여인의 가혹한 복수 또한 이러한 억압적 구조에 대한 암시적 항거 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억압이 심화되면 될수록 그 것에 대한 복종은 절대적인 것이며 어떠한 식으로든지 지켜야 될 가치로 자리잡게 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가치이기에 그걸 떠나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고, 자신에게 절대 기준으로 자리잡은 가치를 거부한 신립은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인의 신립에 대한 원한은 자신을 억압했던 사회체재, 남성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항거로써 작용 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자유로운 사고의 틀을 갖춘 현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녀의 행위로부터 아이러니적 항거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자신을 억압하는 가치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자신을 그리고 그 남자를 죽음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신립에게 있어 전설은 영웅의 생애에 얽힌 에피소드이지만 여인에게 있어 전설은 사회제도에 대한 복종의 아이러니적 항거이듯이 우리는 여기에서 여인의 행위에 좀더 관심과 애정을 표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이야기가 다층적인 관점을 제시해주는 사실을 볼 때, 전설은 한 여인의 죽음과 국가의 운명의 상호 대비로 분화되며 이야기는 생생한 극적 장치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신립은 영웅이다. 영웅의 여자.
신립은 권율 장군의 세 번째 사위인데, 권율장군은 신립을 대성할 인물이라 판단하고 사위로 맞아들였다.

신립은 남들보다 뛰어난 인물로 날렵하고, 닭귀신이 신립을 보고 물러날 만큼, 그리고 한 여인을 구명 할 만큼의 재주를 가진 영웅이다. 

 

영웅은 삶 자체가 모든 면에서 일반인들과는 달라야 하고, 영웅을 선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이 더 진해진다.


영웅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 중 하나가 '여성'이다. 이때의 '여성'의 역할은 영웅의 내조에 충실하여
그 업적을 도운다던가, 영웅이 진정한 영웅이 되는 과정에서 장애물의 역할을 하게된다. 흔한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영웅들은 그 미혹에 빠져 실패를 한다던가, 아니면 곧은 절개로 이성을 잃지 않아 대성을 한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신립의 경우에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정당한 행동을 하고도 복수로 죽음(임란시 탄금대 전투)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신립이 잘못했다는 이야기인데, 정당한 일을 하고도 신립은 왜 복수를 받았어야 했을까?

그리고 이 전설의 여인은 어떤 역할이기에 정당한 일을 한 신립에게 복수를 했을까?


신립에게서의 그 여인은 다른 영웅들의 여성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영웅의 영웅성을 시험하는 존재도 아니고, 영웅을 더욱 영웅답도록 뒷받침

하는 보조자도 아닌 그 여인 하나 자체로 상징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신립에게는 다른 영웅들과는 다른 '여성에 대한 사고'를 요구하였다.

 

미혹을 뿌리치는 영웅성에 충실하기보다는 그 여인을 첩으로 두었어야

그 여인의 복수도 피했을 것이고, 자신은 물론이고 나라도 살릴 수 있었다.

이 전설은 단순히 신립의 영웅적인 모습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여성에 대한 사고'를 제시하여, 그 판단으로 오는 결과를 보여 주므로써

전설로 내려 오는  이야기가 어떠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전설1

신립이 소년 시절 경기도 광주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있을 때, 하루는 초립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외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라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신립의 초립을 발톱으로 낚아채어 남쪽으로 날아갔다. 신립은 초립을 찾으려고 보라매를 쫓아 남으로 달려가다 보니 이미 해는 지고 날은 저물어 어두워졌다. 보라매는 초립을 발톱에 끼운 채 문경 새재 어류동굴 큰 기와집 다락으로 날아 들어가므로 날은 저물고 배가 고파서 할 수 없이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기에 안마당에 들어가서 보니 과년한 처녀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를 말하고 초립을 찾아 달라고 했다. 처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하는 말이, 오늘 저녁은 소녀가 죽는 날인데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초립을 찾아 드리겠다고 말하고, 자기를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다. 의협심이 누구보다도 강한 신립은 좋다고 승낙하고 방에 들어가 앉았다. 잠시 후 처녀는 저녁상을 차려 대접한 후에 숟가락 다발을 한아름 안고 신립 앞에 가져다 놓으면서 말했다.

 

"이것이 원래 이 집 식솔들의 수저였습니다. 그런데 약 일년 전부터 한밤중에 머리가 둘, 셋씩 달린 귀신들이 와서 잡아가고 이제 소녀만 홀로 남았습니다. 오늘밤은 소녀가 죽을 날입니다."

신립은 호기심도 있고, 자신의 담력이나 무술도 시험해 볼 생각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처녀를 병풍 뒤에 숨어 있게 하고 방안에서 요귀들이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 밤중이 되자 만 명의 군사와 천 마리의 말이 달려오는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당이 소란스러웠다. 그러더니 괴수인 듯한 놈이 말하기를 빨리 방에 가서 처녀를 잡아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그중 한 놈이 방문을 열고 처녀를 잡으려고 들어오다가 신립을 발견하고 엎드리는 것이었다.

 

"어이구 장군님이 이곳에 왠 일이십니까"

자세히 보니 머리가 둘 달린 놈이었다. 신 장군이 힐책을 하였다.

"너희 놈들은 어떤 요귀인데 바르지 못한 것이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하거늘 웬 소란을 피우는고?"

그러나 머리 둘 달린 요귀가 말했다.

"예전에 이곳에 행궁을 짓고 홍건적을 피하던 공민왕이 금은 보화를 땅 속에 묻어 두었는데, 그것이 세월이 오래 되어 요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터니 용서해 달라고 빌기에, 요귀들을 호령퇴치하고 처녀를 보았다. 처녀는 이미 혼수 상태가 되었기에 물을 먹이고 사지를 주물러서 소생시켰다. 다음날 아침 신 장군이 작별하려고 하니 처녀가 말하였다.

"소녀는 이미 장군에게 맡긴 몸입니다. 나도 장군님을 따라 같이 가겠습니다."

 

신 장군은 그럴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고, 그 집을 떠나서 앞산 고개를 오르는데, 뒤에서 '저기 가는 신 장군님 나를 좀 보소서'하기에 뒤를 돌아보니, 처녀는 그 집 지붕 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이었다.

 

그 뒤 신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랑캐를 쳐부수고, 북명사에 올라 그 용맹과 지락의 명성이 국내에 떨쳤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파죽지세로 영남의 각 읍을 석권하고 북상하니 장안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때에 선조 임금은 신립 장군에게 팔도 도순 변사를 제수했다. 그리고 종사관 김여물을 딸려주면서, 나라의 흥망이 장군의 몸에 달렸으니 적을 막아 나라의 근심을 없애라고 하명하며, 큰칼을 내리고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참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신 장군은 불시에 모병 한 8천 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새재에 이르렀다. 이때 상주에서 패하고 급해서 옷도 못입은 채 도망쳐온 적신장군 이일이 빨리 도망하자고 했다. 신 장군은 대노하여 이일을 꾸짖고, 목을 벨 것이로되 옛날 정리를 생각하여 살려줄 테니 전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고 용서하였다. 장군은 지형을 정찰한 후 진을 치려고 하는데 그날 밤 꿈에 새재 어류동에서 만났던 처녀가 나타나 장군에게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장군은 말 탄 군사로 어찌 산악전을 하려고 합니까? 군졸이 팔천 군사라고 하나, 시장에서 모집한 수련 안된 오합지졸을 가지고, 산악전을 하면 저마다 살 곳을 찾아 도망갈 것입니다. 충주 탄금대에 가서 배수진을 친다면 도망갈 길이 없어 저마다 죽을 각오로 싸울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말을 믿고 종사관 김여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탄금대의 패전의 원인은, 새재 처녀 원귀의 간계였다고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과 수정실록(1592년~1605년까지 '신립'과 탄금대 전투에 대한 모든 내용)

  유성룡의 징비록

  프로이스의 일본사(번역본)

  이형석의 '임진전란사'

  충주시청의 산성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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