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16:22-23)
인자는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이 성령이 임하시기 이전의 제자들에게는 알쏭달쏭한 퀴즈게임과 같을 겁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엇갈립니다. 요12장에서도 주님이 영광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난 다음에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말씀하십니다(요12:32) 그때도 무리들이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하는 것을 들었는데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왜 들린다고 하느냐 도대체 이 인자는 누구냐 하고 따집니다(요12:34) 여러분은 이와 같은 상황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계시고 일하십니다.
마16장부터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사역은 우리 죄를 처리하시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의 옛사람을 처리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으라고 변화가 없는 것은 예수만 믿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예수를 현란한 언변으로 설교를 해도 사랑이신 그리스도가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입니다(고전13:1)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전하므로(고전13:9)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율법의 요구인 사랑의 턱에 걸려 다시 죄인이라고 스스로 자인할 수밖에 없는 우스운 꼴을 연출합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죄 사함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후에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옛 사람을 처리하십니다. 그래서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말씀하십니다(마16:25) 다시 묻습니다. 당신에게 이와 같은 영적인 신진대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안에 계셔서 참 자아가 되어주시는 겁니다. 예수의 죽으심에 합하여 죄인을 죽음에 넘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므로 주와 하나가 되어 완성적인 차원에 나아갑니다. 그 분의 형상을 얻고 그 분의 영광을 얻는 상속자가 됩니다.
죄인은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살므로 육신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죄인의 구원은 타의적이지만 옛 사람을 버리는 것은 자의적입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인한 죄인의 구원과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구원은 수동이지만 자신의 옛 사람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은 능동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갚으신 그 사실만 믿으면 됩니다(요1:29)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벧전3:18) 죄의 빚을 다 갚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다 갚았음을 믿으면 됩니다. 자꾸 갚아야 된다는 것은 강퍅한 마음입니다. 이는 원죄에 대한 채무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육적 존재로 그대로 남아 있으면 하나님의 ‘의’(옳다 인정하심)가 없습니다. 지금 성령 운동한다면서 바깥에 표적과 은사로만 나타나는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예수께서 빚은 갚았으나 스스로 관리능력이 없는 겁니다. 옛 사람이 남아 있어 또 빚을 지고 맙니다. 그래서 의롭게 된 죄인이라는 해괴망측한 말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가 오셔서 죄에서 구원, 그리스도로 이젠 죄의 빚(종)을 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예수로 인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산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롬6:11과 12-13절의 차이)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본성적인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시고 다시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변화가 없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산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 모세 엘리야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죽으실 것과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세 제자는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말을 합니다(마17:1-4) 모세 엘리야 예수님은 스스로 있는 자존적인 존재이지만 아직 세 제자는 환경의 득을 보려고 합니다. 육신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신앙을 통해 환경의 호전을 바라는 복을 구한다면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여기가 좋으니 주님과 함께 여기 같이 삽시다하는 뜻이죠. 초막 셋을 짓고... 초막은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만 필요합니다. 모세 엘리야와 주님께서는 환경의 혜택이 필요치 않는 존재들입니다. 오히려 짐입니다. 지금 큰 건물 지어놓고 그 건물에 붙들려 말년에 평생 쌓은 공로가 쫄딱 망하는 분들 참 많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제자들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를 ‘듣지’ 못했습니다. 눅9:31은 별세 하실 것을 말씀하셨다가 기록합니다. 그들은 다만 변화된 광경을 ‘보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마17:9)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 광경을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도나 환상을 통해 천국을 구경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리스도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들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사셔야 일어납니다. 제자들이 환경의 구원만 받으려 하듯 지금도 도피처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산의 영광스러운 상황이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그 분이 우리 안에 임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분이 제삼일 전의 예수냐 제삼일 후의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당연히 제자들처럼 근심을 하지 말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