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3-15절)
국민의 진정한 자유는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말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 겁니다. 어느 한 편에 묶여 우리는 맞고 쟤네들은 틀렸어 하는 사람들은 사상과 정신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죠. 문제는 인간은 어느 집단에 소속이 되어 안정을 얻으려는 노예근성이 있는데 있습니다. 이를 이용하는 것이 저급한 위정자들의 술책입니다. 교회라는 간판 아래서도 이런 우민정책을 써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면 바다 모래 위에 서서 남은 자들과 싸우려는 용 곧 마귀의 졸개들에 지나지 않겠지요?(계12:17) 사람들은 유니폼을 입고 거기에 소속이 되는 것이 안심이 되므로 스스로 제도와 조직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심리를 이용하는 것이 바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과 그 안에 있는 진리를 따라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자유를 육체의 찬스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구원 받았어 하고는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만 주장할 뿐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육신은 언제나 대가를 받은 후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로 인해 멸망하지는 않지만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영을 좇는 일이 아니면 반드시 휘드백이 있어 후회와 자책과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안에서 얻은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건 자유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자원적인 종노릇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복종되는 자유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유비쿼터스로 머리에게 복종이 되는 종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즉시 개입하시도록 복종되는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영육 간에 온 몸의 지체는 머리와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게 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복종하면 형제인 이웃도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로 하나가 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범위를 갖게 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 모든 율법은 다 이루어집니다.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현장을 자기 일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강도 만난 자는 그 이웃을 사랑하므로 영생을 얻습니다. 그 선한 이웃은 바로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기처럼 생각하시고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사들인 것과 같이 먼저 자신을 팔고 예수그리스도를 사들여 주와 하나가 되는 경건의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는 중에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여기는 성숙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된 다음에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원리를 제시합니다(요15장)
의무와 책임으로 율법의 쫓김을 받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끌림과 등이 떠밀리는 자리에 와 있는 겁니다. 만일 아니면 주의 이름으로 별별 일을 많이 했지만 그날에 불법을 행한 자들아 썩 꺼지라는 일갈이 떨어지겠지요(마7:23)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우리들의 사랑의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내기 위한 나의 집을 부지런히 지은 결과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하십니다. 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난 구원을 받았다고 난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아옹다옹하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생각하는 반대의 현상입니다.
슬프게도 이런 모습이 교회라는 미명으로 흔하게 연출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성공하는 사람도 많고 위대한 사람도 많은데 아무리 봐도 그들의 얼굴과 모습에 흙의 색깔이 짙습니다. 생명나무가 되어 사랑나무로 진화하는 진리의 말씀이 아지랑이처럼 뿌옇습니다. 그로 인해 성령을 모시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사랑의 집을 짓는 건축공사도 발견하기 힘이 듭니다. 바로 아담 안에 있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인정이 메말라 가므로 내가 너를 알게 뭐야 난 몰라 하고 시선을 돌리는 매정한 세상이 됩니다.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자라면 이제 머리이신 사랑의 주, 사랑의 왕을 사랑하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웃들을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여겨 마음속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을 쫓아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