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이것은 찬송입니다. 12절부터 14절 까지는 찬송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믿고 난 다음에 주시는 복을
주님 앞에 노래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찬305장 같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하는 가사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과 이기는 걸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주 예수를
깊이 아는 놀라운 그 은혜...’ 이 찬송은 기분 좋아라고
부르는 것 아닙니다. 주 예수를 깊이 알았다는 겁니다.
주 예수를 깊이 알 때 놀라운 일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12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이걸 행복이라고 합니다.
찬송을 부르니 근심이 떠나가더라. 찬송을 부르니
힘이 나더라.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정한 찬송은
승리한 이후에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주님 앞에 와서 회개를 하고 주님 앞에 열납 받기 위해서
부르는 찬송도 있고, 주님을 알고 나서 할렐루야 하고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아멘이 아니라
아멘하고 나서 할렐루야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니까 내가 어둠을 이기고. 사망을 이겼다는 거죠.
두려움을 이겼다는 것이며. 세상을 이겼다는 겁니다.
그때 할렐루야가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멘이 되어야 만이 할렐루야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예수를 증거하는 말씀이 내 속에 아멘으로 들어올 때
불러지는 찬송이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태초부터 있는 그분을 안다는 것이지요. 성령 안에서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형님이
되시는구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인해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항상 끄떡없이 굳게 서는 반석신앙입니다.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왜 못하게 해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심은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등이나
두드리시고, 엉덩이나 툭툭 치는 그런 사랑인 줄 알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사랑인데
그 독생자 곧 유일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인격화 되고 능력화 되고 생명화 되어서
사랑화 되어가는 독생자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독생자가 우리
속에 임하시니까 영으로 임하신 그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내 심령을 그 영이 다스립니다. 성령이 내 속에서 나를
다스리는 순간부터 내 영에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안정이
오고 담력이 생기더라는 겁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뱀의 사랑에 녹아져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흐리멍텅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겁니다.
교회만 가기만 하면 어떤 복을 받을 것이다. 목사의 말만
들으면 이런 저런 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막연한 생각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독생자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씨입니다(요일3:9) 그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DNA가 우리 속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오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이 오는 것입니다(벧후1:4)
하나님은 이 복을 주십니다. 그것 외에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독생자 때문입니다.
바로 고후4장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이 육신 속에 보배처럼
담겨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지 사실은
질그릇을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착각하면 안 됩니다.
막연하게 세상에서 돌보아 주겠지 그런 식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을 것이 있고, 보호할 것이 있고,
끝까지 지켜 줄 것이 있기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며
우리 육신의 껍데기만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을
우리는 언제나 유념하고 성령의 소욕이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냐 계속해서 그 분과 접촉해서
그 분과 함께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말씀을 계속 주시고
증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수준으로 계속 변화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이 우리에게 씨로 들어옵니다.
씨로 들어와서 결국 자기처럼 만들어 버리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뭐냐 하면 간단한 것입니다.
그저 당신 자신과 하나 되기 원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기꺼이 내 놓으므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차피 하나님의 손바닥입니다.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 곧 이것은
격렬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물질의 욕심을 없애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를
전율하게 하고 그로 인해 나를 미워하게 만들고 자기
욕심대로 안되면 성질을 내는 건 병든 것입니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도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는 것,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자꾸 대체 만족을 하기 때문에
안 움직이고 게을러집니다. 텔레비전이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고 있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입니다.
그리고 이생의 자랑, 이것은 허탄한 자랑이고, 가치 없는
자랑입니다. 만나면 서로 자랑하는 것 이거 가벼운 겁니다.
남자들 군대 자랑, 여자들 미장원 자랑, 백화점 세일 등...
이런 것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긴
자들은 이런 것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욕심이 없다는
것이 장한 일은 아닙니다. 소유욕을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주셨어요. 그러나 그 욕심 때문에 한 쪽으로 기울어져
하나님의 은혜가 안 보이는 것은 병든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일을 두고 텔레비전이나
휴대폰에 빠져 있다면 안목의 정욕에 빠진 거죠.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지나가되’ 이 말은 영생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지금 현재 행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거하느니라’ 영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영생이 안 됩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7절 이하에 육신을 쫓아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사망)을 거두고 성령을 쫓아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건 우리가 이제 영원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을 이룰 때에
그게 우리에게 보석이 됩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요일1:1) 같아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