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요한의 breakfast [26]

요한일서 강해 3장1-10절(3)

작성자瑤翰 김요한|작성시간26.06.20|조회수156 목록 댓글 3

 

 4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를 짓는 자는’ 현재 분사이며 ‘불법을 행하나니’도

현재 분사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것이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불법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불법입니다. 그래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한다고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돌이켜야 용서가 됩니다. 불법은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 빗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법에

의하여 입증되어야 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나는 죄인이다

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식이나 죄책감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법에

의하여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안 되면 불법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회개를 해도 여전히 불법입니다. 항상

성경의 기준에 의하여 자기의 잘, 잘못을 판단하고 

그 길을 계속가든지 돌이키든지 결정해야 됩니다.

 

 5절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내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가 나타나심은 우리 죄를 없애려 하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죄의 요소와 죄의 성분을 없애려고

하십니다. 그건 그 분 안에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시면 남의 말 하는 것이

귀찮아 안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시면

거들먹거리는 것도 도무지 재미가 없어 안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누추한 이야기가 싫어 집니다. 

그러한 자신이 싫고 그런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싫습니다. 

그 전엔 음담패설하고 다른 사람들의 어두운 이야기를

하면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전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흡사 국회의사당과 같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두려워 그런 것이 싫어 집니다. 그런 분위기가 싫어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므로 우리는 의를 얻습니다. 

날마다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우리 안에

오시므로 단번에 의로워집니다. 그래서 그 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십니다(히7:25) 

그 분은 죽음가운데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의를

얻고 나면 본성적으로 하나님 뜻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으면 이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비록 어정거리긴 하지만

갈 바를 모르고 나가가게 됩니다. 자신도 모릅니다.

이것이 계시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증거를 보이시면, 아니 하나님이 내게 어떤 사랑을 

베푸시면 아니면 형편이 좋아지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계시의 말씀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롯도 마찬가집니다.

천사가 롯더러 나가라고 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계시의 말씀을 못 받은 그의 처는 롯을

따라 가긴 하는데 머뭇거리다가 뒤돌아보고 말았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을 받은 자와 아닌 자의 차이인 겁니다.

 

 노아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 기준에서 보면

그 상황에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면 누가 짓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씀이 노아에게는 계시의 말씀이었어요. 

계시의 말씀이었기에 그가 거역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을 안다 배웠다

듣는다 별 소리를 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에게 계시의

말씀이면 그 말씀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 지킵니다.

주께서 너를 사랑한다는 말씀도 거역을 할 수가 없고, 

너는 내게로 오라는 말씀도 거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라는 말도 감사하라는 말도 거역을 할 수가

없어요. 바로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말씀이 들어온 사람은 전혀 말씀의

사람이 안 됩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왜?

말씀이 붙잡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라 하시면 이미 방주가 되어 버린 겁니다. 

노아는 그 길로 반드시 걸을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바치라는

계시의 말씀이 들어왔다면 자기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몸이 그 쪽으로 기웁니다. 

바로 성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이와 같은

계시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책에 녹명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나를 끌어가는 하나님의 힘이 역사합니다. 

아브라함 경우는 가족이 볼 때에는 대책 없이 객지로

떠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계시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재어 보는 겁니다. 

이리 재어보고 저리 재어보는 것, 이건 계시의 말씀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계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헌신의 크기가 대단합니다. 폭이 큽니다.

재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재면 하나님도 재십니다. 

이게 계시의 말씀을 받은 것과 그렇지 않는 차이입니다. 

계시의 말씀을 받으면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이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요. 

왜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냥 믿어진다’는

겁니다. 노아 영감보고 왜 방주를 짓느냐고, 비가 오는

것을 보았느냐고 환상이나 꿈이나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여하튼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가 올 것 같아서 나는 이렇게 한다’

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것이 계시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임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바로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의 말씀의 영향입니다. 어찌하든지 내게는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전진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계시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다 이런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유나 조건이나 원인이나

그런 것이 없어요. 그냥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그들은 바벨론의 상고들입니다.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렇게 하면 이렇게 주신다’ 

사고팔고 장사를 합니다. 사람이 판다는 것은 무엇을

사기 위함이며 무얼 산다는 것은 자기를 판다는 겁니다.

분명히 교환 조건입니다. 말과 글을 보면 속내가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구원을 이루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입니다. 왜 하느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게 좋아서

한다고 대답하면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데 왜

자식을 키우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까? 뭣 하려고

그토록 고생스럽게 키우느냐고 그러면 부모가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고생스럽고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아침에 

일어나면 이놈들을 위해 밥이 지어지고 슈퍼나 시장에

가면 이놈들이 생각나서 우유도 사고 고기도 산다고

대답을 할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모가 그렇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걸려있기 때문에 자식들이 대들고 짜증낼 것 뻔히 알아도

시장가면 자식들이 먼저 생각이 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그 무엇 때문에 한다는 것은 바벨론 상고들입니다. 

사고팔고입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렇게 하면 그걸 주실까요’ 하고

장사 논리에 완전히 찌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업무를 수행하면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복을 주실까요?

교회에서 다니엘 기도를 한다면 이번 다니엘 기도 기간

동안 문제가 해결되어야지 하며 전부가 어떤 문제를 걸고

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21일 동안 기도해 드렸으니 주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조건청구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납니다. 그런 기도는

그만하고 기도가 좋아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 이번에 기도하면 이 일이 풀릴까요?’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통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아 가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겠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 요단 강을 지나가는 건 무한 영광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참 기도이지 기도하면 어떻게 되더라, 기도하니

일이 풀리더라. 이것은 아직 어린 아이의 경우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받았느냐 아니냐?

갈림길입니다. 저는 주님이 좋아서 그 분을 찾습니다. 

그분이 없으면 내가 너무 초라하고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분을 찾습니다. 루터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우리는

거지다 이건 진실이다’ 했듯 저는 일찌감치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어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지체하지 마소서 하고 부르짖습니다.  내가 그분께 구하고

찾고 그 분을 안다고 하면 구하는 어떤 무엇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고 나는 그분이 필요하기에 그분을 찾는데 

그 길에서 주시는 상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찾습니다.

 

 시시 때때로 그 분을 찾습니다. 이게 바로 계시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절할 수 없는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예배나 기도, 말씀을 보는 일, 또 주님을 섬기는 봉사라든가 

이런 것들이 아직 거역이 되면 아직도 문제가 있는 겁니다. 

본성적으로 아직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건 우리가 느끼고 부담은 다

받고 있습니다. 그 압력을 받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장차 하나님의 자녀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어떤 상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좋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라 이 말입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는 어떤 목적을 따라 기도 제목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 치고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더 강해집니다. 더 모질고

앙칼지고 모가 납니다. 이는 계시의 말씀을 못 받은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의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죄의식이 있으면 죄를 더 많이

짓게 됩니다. 어둠속에 들어갑니다. 죄의식이 없는 사람만

의 가운데 거합니다. 이게 바로 불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어떤 기준점

이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잡다한 우울감이나 상한 감정 등

이런 것들과 일일이 싸우지 마세요. 어차피 이것들 하고

싸워서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실수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싸우려면 평생 동안 싸워야 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의, 곧 그 분의 십자가가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내가 항상 기준점 이상에 있으면 죄와 결별이 됩니다.

 

 자신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옷을 입고 다시 흙구덩이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옷이 더럽기에

흙구덩이에 들어가도 그만이지 하고 들어가는 것이지 내가

비단옷을 입었는데 다시 흙구덩이에 왜 들어가겠습니까?. 

왜 우리가 진리를 알고 십자가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는 

항상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기준점 이상의 의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정면 돌파를 하게 됩니다.

 

 빛 가운데 있는 빛이 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긍정적인 쪽으로 흘러가요. 그러나 어둠 가운데 있고

죄의식 가운데 있고 거리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항상

뒷전으로 물러가요. 뒤로 돌아가면 같은 편들이 있습니다. 

저절로 그들과 합류를 하게 됩니다. 안 그러고 싶은데

그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을 바꾸셔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

거하도록 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는 사람은 바로 불법을 행치 않습니다. 이를 두고

죄를 행치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윤리나 도덕적인 죄는 바로 상식 문제입니다. 

도덕적인 죄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입니다. 사람의

욕심 문제입니다. 이 욕심 때문에 시기나 질투와 중상모략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 욕심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안에 오시면 그런 것이 빠집니다. 깨끗해집니다.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 남을 죽이는 것 보았습니까? 

남을 비방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 남을

비판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 심령이 깨끗한 사람을 보십시오.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 보았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오시면 심령이 깨끗하여 집니다. 그래서 심령을

다이어트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류재길 | 작성시간 26.06.20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han5572 | 작성시간 26.06.2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瑤翰 김요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1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나타나시면
    그의 의로 인해 죄를 이기는 게 아니라 없이 하십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