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사 9기생들이 영천 대말좇 바람을 맞으면서 걸어온 발자취
예전에 우리집은 부모님이 황해도 연백에서 월남하여 고교 선생님으로 6남매를
키웠으니 힘든 정도가 이루 말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저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3사 모집 카다록을 보고 누구와도 상의없이 3사를 지원 했는데
배경은 형은 고대 법대를 다녔고 아래로는 국민학교까지 다녔는데 월사금도
내기가 힘들었기에 내가 군대를 가면 우리집 가정 경제가 나아질 것으로 생각을
했다, 나중에 부모님은 제가 군대를 가니 여러가지로 가정 경제가 좋아졌다고 했다
3사를 11명이 지원 했는데 4명만 합격하여 영천에서 군 생활을 하게 되였다,
조선시대에 영천은 전투용 말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며 영천의 기후가 하루에도
몇번씩 변화무쌍 하고 바람이 심하여 생도들은 영천 대말좇 바람을 맞으면서
훈련을 받는다고 회자되여 저도 비속한 말이지만 이단어를 쓰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아도 3사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수 였으며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사를 나왔기에 평생
쌀 걱정을 하지 않았으며 전역후에는 삼성생명에서 26년을 근무하는 동안
IMF와 희망퇴직도 없이 무남하게 가정을 이끌수가 있었다고 생긱힌디
아래사진은 포천 집에서 우연히 졸업 앨범과 군 시절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했으며 충구회 (9) 졸업 앨범에서 인물사진을 제외하고 주요 군사 훈련내용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올린 것이며 사진 배경 설명은 이번에 다시
조금 보완작업을 했습니다
고난의 시련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영천벌의 생활들
1972년 1 월 4일 전국에서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청운의 푸른꿈을 가지고
영천에 도착해서 가입교 기간을 거처 1 월 10 일에 입교식행사를 하고
본격적인 후보생시절이 시작되였다 당시에는 20명이 한내무반에서
사용했으며 겨울이라 뻬치카도 있었으며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했고
후보생을 위한 복지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후보생 신분이였고 2학년때 후보생에서 생도로 명칭이 변경되였다
입고간 사복은 소포로 고향에 붙이고 어울리지않은 군복을 입고 훈련
보다는 기압으로 시작된시절에 구대장들은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였으며,
선배들은 군기를 잡기에 바빳고 기상나팔소리 30분전에 미리 일어나서
내무정돈하고 뛰어나가서 아침 점호하고 애국가 제창하고 2 km 아침
구보후에 고된 하루일과가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과 만났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관학교 훈육관을 하기에는 자격미달의
훈육관들이 있었으며 앞으로는 심사를 해서 선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궁핍할시절에 식사대우는 좋은편이였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세지 부대고기국은 일품이였으며, 아침과 저녁으로 나오는 우유와
사과도 남김없이 먹었고 취침전에 나오는 " 커다란 단포빵 " 은
최고의 인기였었다,
황당한 사건도 있었는데 당시에 용산에서 야간 열차로 이동중에 인솔
수송장교는 몇몇 동기에게 내가 영천에서 너희들 훈육 장교를 하니
잘 봐주겠다고 하면서 전체에게 돈을 걷으라고 하여 실제로 모금을
하여 수송장교에게 전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우리중대는
그런일이 없었지만 타 중대는 훈육관이 돈을 요구하였고 돈을
걷어서 주지 않으면 무자비한 기합을 주던 비인간적인 사태가
발생 하였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사관학교에서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 사건에 지금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당시에 우리는 생도복이 없어서 장교복을 지급 받아서 착용하였으며
모든 생도들이 육군 정복에 보병마크를 착용하고 외출이나 외박,
휴가때와 일반학 강의를 받을때는 장교복을 착용을 하였다
그시절이 벌써 50 여년이 흘렀는데 우연히 충구회 앨범을 보다가
디카로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데 충구회 회원들은 감회가 새로울
것이고, 선, 후배님들은 당시에 생활상을 볼수있는 자료로 이해를
바랍니다 / -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
처음에는 구)막사로 들어가서 소대원40여명이 2 개내무반으로 편성되여
20명씩 한내무반에서 생활했으며 2학년때 신막사에서는 한내무반이 10명씩
2층 목재 침대에서 생활 했는데 평생 처음으로 2층 침대를 사용하니 대단히
신기하고 놀라웠다, TV나 세탁기, 정수기는 생각도 못했으며 워낙 훈련이
고되서 그런지 다른 것에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구대장들은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훈육했겠지만 우리들이 생각
하기에는 트집 을 잡아서 기압을 주는데 그 장소가 3 층 옥상이라는곳이다,
여름에는 펜티바람에 모기 회식을 하는가하면 완전군장에 방독면 까지 쓰고
판초우의를 입혀서 연병장을 선착순 기압을 몇전 시키고는 다음에 옥상으로
올라가서 추가 기압을 받았고 겨울에는 펜티바람에 각자 떠온 바가지에
물을 떠와서 뒤집어 쓰는인데 그 어느 누구도 항의하지 못하고 당했다,
지금 이런기압을 후배님들이 받으면 다 도망갈것이다 ㅋㅋㅎ
당시에 훈육관은 1~3기 선배님과 육사출신이 했는데 속찍히 육사출신은
조금은 달랐다 훈육관들은 본인이 후보생시절에 배운 것을 그대로 했다고
생각하며 이런 모든 것이 그저 일제시대의 유물인 기압을 받았기에
우리에게도 악랄하게 기압을 주었다고 생각을 하기에 씁쓸한 느낌이 든다
눈물의 고경사격장
1 월달에 입교하여 19 중대가 제일먼저1972년 1 월말인가 2 월초에
고경사격장에서 M1 소총교육이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PRI 훈련으로
조교에게 알철모에 머리박기등 모진고문을 받고 사격장 사선에 총알을
가지고 올라가서 실제로 총을 쏘는데 두려움이란 말로 표현할수 없었다
사실 M1 소총은 2차대전때 나온 소총으로 총구가 넓어졌기에 영점
사격에 잘 안맞는 것은 당연한데 실패한 후보생들은 가혹한 기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후 내가 소대장 시절인 1974년 말 부터 전방
사단 부터 신형 M16 소총을 순차적으로 지급하기 시작을 했다
사격중에 갑자기 교관을 중지시키면서 하는말이 " 3 사 창설이래
사격 성적이 가장 안좋다 " 라고 하면서 고경 얼음물 냇가로 집어
넣고 포복을 시키면서 앞으로 취침과 뒤로취침, 알철모 머리박아 등
이루 말로 표현할수없을 정도로 군기를 잡아서 그런지 지금도
고경하면 두려움이 앞서는데 지금에 와서 달리 생각하면 교관은
안전사고를 예방하고자 혹독한 훈련을 시킨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에 조교들이 실제로 말한 내용은 새로 입교한 9기생들이
처음 소화기 훈련을 받는데 잘 잡아놔야 소문이 퍼져 나머지
중대들이 말을 잘 들을 것이라고하면서 선임 중대에게 가혹한
군기 잡기를 했다고 한다, 사실 군대에서는 시범조, 선임중대는
표본이 되기에 고달프고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고경까지는 훈육관 기분이 좋으면 걸어서 갔고 그렇지 않으면
구보와 행군과 기압을 반복했으며 고경사격장에서는 그 영하의
추운날씨에 식판도 없고 반합에다 밥을 받아서 먹었다 석식은
언제나 늦게오기에 차가운 밥과 국을 먹었다
얼음밭에서의 각개 전투 훈련을 받았다
민간인에서 멋도모르고 군대에 들어와서 제일처음 받는훈련이 제식훈련과
각개전투라고 생각이 되는데 처음받아보는 그 혹독함이란 뭐라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는데 얼름밭에서 낮은 포복, 높은 포복을 시키니 제대로 될리가
없는데 조교들은 요령을 부린다고 무자비한 기압을 주엇는데 그시대
김신조 청와대 습격 영향으로 3사가 창설 되여 북한군과 대항하기 위해서
창설된 부대이기에 그런 혹독한 훈련을 시킨 것으로 생각한다,,,,
사동 훈련장은 학교 후문을 지나서 오른쪽에 있는 눈물의 각개전투교장인데
3사 라는것을 상징적으로 표현을 하는 훈련이래서 우리 모두에게 어느훈련
보다도 추억이 많을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훈련장을 다른장소로 옮기고
그곳에는 골프장이 신설되여있다고 한다 그러나 장교 양선과정인 사관학교
훈련장을 폐쇠하고 골프장을 신설한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야외 전술훈련
사동훈련장에서 분, 소대 전투훈련과 독도법을 했는데
야간훈련도 많았다 비가 올때는 반합에 빗물이 들어와서
먹어도 먹어도 국의 양이 줄지않았던 기억도 있으며 야간
독도법시간에 목표지점을 찿지 못하고 민가나 도로로
접어들어서 좌표를 새로보고 RP 지점을 가는길은 험난
하기만 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그 짧은 시간에
현역 사병출신 후보생은 민가에 들어가서 배부르게 밥을
먹었다고 자랑을 하는 것을 들었다,,,
한많은 김일성 생일날에 무장구보대회
김신조 영향인지는 몰라도 72년 4월 어느날 김일성 생일날 전교생을
대상으로 무장구보 대회가 열렸는데 완전군장에 4월의 무더움때문에
사동 야외훈련장인 야산 을 한바퀴 도는 10 KM 구보로 수많은 동기들이
쓰러졌지만 대검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정신력으로 중대 대항 경기에서
이기려고 서로 서로 절차탁마하여 배낭과 소총을 나누어 메고 정신없이
뛰였던 것이 아직도 생각나는데 이날 대회로 죽거나 후송되는 후보생들이
발생하였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런지 다음부터는 없어졌다,,,
당시에는 군사정권 시절이래서 보도 통제가 엄격하였기에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가 되지가 않았는데 지금이라면 아주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여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종 경기장
오종 경기 훈련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래서 장애물을 건너 뛰거나
로프를 올라가서 반대편으로 내려오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
해보면 대단히 어려운데 그것도 처지거나 낙오를 하면 가혹한
기압이 있기에 그저 죽기 살기로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대구로 외출을 떠나기 위하여 열차탑승
외출도 일년에 몇번 나가지 못했는데 대부분 내무반 단위로 행동을
하였는데 대부분 음식점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한잔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외출을 다녀오면 군기가
빠졌다고 가혹한 기압이 있었기에 이럴려면 뭐하러 외출을 보냈냐고
불평 불만이 많았지만 당시로서는 그런일이 매번 반복 되였다는 것이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외출을 떠나는 사진이 아니라 일년에 한번 있는
휴가를 떠나는 시진처럼 보이는데 정복을 입고 교문을 나선다는 자체가
그동안 억눌렸던 욕구를 불출하는 기폭제가 되였다고 생각한다
힘들었던 유격 종합 장애물장
학교 정문 위쪽 연병장 우측에 있었던 유격 종합장애물장으로 지금은 없다
입교하여 얼마 안되서 받았는데 공포의 대상이였고, 훈련장옆에 참호훈련장이
있었는데 1개분대 9명씩(18명) 들어가서 상대 분대를 밀처내는 훈련으로서
체력이 비슷하고 동기생들끼리 하기에 어느 훈련보다도 힘들었었는데 지는
분대는 가혹하게 기압을 받았기에 그저 죽기 살기로 싸운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힘들었던 훈련중에 하나인 전투수영
나는 지금도 3사에서 훈련받을때에 가장 힘든 훈련이 전투수영으로
생각한다, 사진에는 없지만 철모와 소총을 들고 군화와 군복을 착용
하고 총을 젖지 않게 하여서 25m 를 수영해서 가지 못하면 퇴교를
당한다고 하여서 무척이나 고생했다
생각해보십시요, 군화와 철모를 쓰고 어찌 수영을 할수 있는지,,,,
그러나 충구회 (9) 는 그 험난 과정을 통과했다
그것도 종착역에는 조교들이 대나무로 찔러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물을 먹이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대창 공용화기 사격장
우리들이 교육을 받던시절에는 모든것이 열악했다 고경 소화기사격장
까지는 왕복구보로 다녀왔는데 대창 교장 (영천과 군위군 접경지역)은
공용화기 사격과 중대 야영훈련장이 있는데 우리부터는 군용 GMC 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난다 선배님들은 거기까지 무장구보대회 코스라고
하면서 대창은 이가 갈린다고 하는데 내 기억으로 우리는 대창까지는
차를 타고 다녔지 도보로 가본 경우는 없는것 같다
위 사진은 대창공용화기 사격장에서 3,5 인치 로켓포를 사격하는사진
이다, 당시에 교육받을때에 어느 교관이나 앵무새처럼 하는말은 " 소화기나
공용화기와 모든 교보재의 보급기준은 8 기 까지는 00 발 이였으나 예산
삭감으로 인하여 9기부터는 0 발이 할당되였다 " 라고 말하고 시작하였다
8 기선배님은 중위도 1 년만에 달았으나 우리부터는 1년 6 개월만에
달았으니 우리는 엄청 손해본것이 많았다 ㅠㅠㅠ
이 사진은 57 미리 무반동총 사격하기에 앞서서 사격자세 PRI
훈련을 받는것 같다 앨범에 있는 사진을 디/카로 찍었는데 구도가
잘 안나와서 그런지 너무 흐릿하여 죄송합니다
그리고 야외 종합훈련시에 57 미리 무반동총, LMG 30, 3,5 인치를
교대로 메고 행군을 했는데 얼마나 무거운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유격도 장거리 행군도 없어졌다고 하니 군대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전쟁에서 자기 목숨을
지키는데 필수요소인 유격과 행군이 없어졌다고 하니 걱정이 앞선다
중대 야영 훈련
중대야영에 출발하기전에 막사 운동장에서 군장검사를 받는광경으로 보인다,
당시 구대장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서 괴롭혔는데 군장검사시에 그들은 마치
하이에나 같았다 지금보니 등에맨것은 개나리봇짐같이 엉성해 보이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싸는데 왜그리 어렵고 힘들었는지 모르겠었다, 2 학년때는
배낭무게를 줄일려고 온갖방법이 동원되였지만 걸리면 무자비한 벌점과
처벌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ㅠㅠㅠ
중대야영시 에는 공용화기인 LMG 30 기관총과, 57 mm 무반동총, 60 /
81 mm MOT, 3,5 inch rocket포 를 메고 훈련을 받았는데 장비들이
너무도 무거워서고생을 엄청한 기억이 난다, 또한 야영을 할때에는
A 형 텐트를 치고 숙박을 하였는데 여름철 모기가 너무많고 사정거리가
모포 2장이며 열대야와 더불어 모기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훈련을 받았다,,,,
지금도 모든것을 너무 힘들게 받아서 그런지 지금도 생생하다~~~
야외훈련
이사진은 주간에 중대훈련 또는 야외훈련 사진인
것으로 생각한다, 공용화기인 LMG 30과 풀, 나무로
위장하고 기관총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야외훈련을 위하여 행군할때에 LMG, 3,5
인치 로겟포, 60미리 박격포 를 메고 장거리행군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 돌려가면세 메던 생각이 납니다
저걸 메고 산과 들을 뛰어다녔을때의 심정이란,,,,
처음에는 서로 교대를 해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무도 힘들어서
교대가 늦어져서 동기생간에 언성이 높아지는경우도 많았었다,,,,
유격 종합훈련에서 PT 체조
학교 연병장 좌측끝에서 유격 종합훈련에서 PT 체조를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마지막구호는 생략해야 되는데 조교나 교관은 마지막번호가
가까워지면 소리를 지르고 분위기를 변화시켜서 마지막구호가 나오게
해서 처철한기압과 반복을 거듭했다, 위 사진은 8번 온몸 비틀기 훈련
으로 생각이 되는데 PT 체조 모두가 힘들었지만 8번은 더 힘들었다
| 당시 정복을 입고 일반학과 대학과정 교육내용인데 내 생각에 8개월정도 받은 것 같다 무더운날씨에 에어콘은 없었고 오직 선풍기에 의지하여 교수님강의를 받고 있는데 식곤증으로 잠이 쏟아져서 꾸뻑하기가 일수였는데 잠을 자다 발각되면 교육중에도 엎드려 뻗혀 등 기압이 받았던 생각이 난다 당시에 수업이 끝나면 5분 쪽지시험에 상당히 시달렸고 과목을 이수하기위에 밤늦게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자습시간에 했으며 과목은 전쟁사, 심리학, 영어, 수학, 일반사회 ,역사를 받은것으로 생각하며, 일반학 점수 미달로 퇴교를 당한 동기도 많이 있었다,,, 이사진은 주간에 중대훈련 또는 야외훈련 사진인 것으로 생각한다, 공용화기인 LMG 30과 풀, 나무로 위장하고 기관총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야외훈련을 위하여 행군할때에 LMG, 3,5 인치 로겟포, 60미리 박격포 를 메고 장거리행군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 돌려가면세 메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도 지금 돌아보면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로 생각합니다 학교 정문을 지나면 지휘부와 생도대 식당으로 갈라지는 사거리에 학교 교훈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 되여 생도대 건물 뒤에 방치되여 있다고 한다, 하루 3끼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약 400m 거리를 곰 발닥을 만든다고 자갈길을 걸어다녔으며 가는 도중에 노란명찰(8기)이 동작그만 하고 세워서는 자세가 오합지졸이라고 하면서 정신훈화를 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밥맛이 없는데 이런일이 거의 일주일에 몇번씩이나 반복되였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였다 단포강에서의 자신력 테스트 유격훈련으로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33피트 상공에서 손에서 줄을 놓는 순간에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문제는 그후에 단포강에서 나와야 하는데 이때 조교들은 긴 대나무로 생도들을 사정없이 찔러서 물에서 고생하게 만들었으며 나처럼 수영에 서투른자는 죽을고생을 했기에 기억에 많이 남는디,,,,, 철도를 이용하여서 단체로 대구나 불국사로 외출을 가는데 훈육관들은 열차안에서 노래와 춤을 추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관광버스와 같은 흥 을 내기를 요구 했는데 지금생각하면 훈련에 지친 우리들을 위하여 술은 없지만 스트레스를 해소 시킬려고 했던것 같은데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단포강은 훈련도 받고, 빨래터이기도 하며, 저녁야식으로 단포빵도 먹었으며, 구보를 위한 단골코스이기도 하다, 요사이 가보니 영천땜으로 인하여 단포강은 말라 있어서 과거의 추억을 더듬기에는 씀쓸하기만 하다,,,, 생각해보십시요 추운겨울에 휴일이면 단포강에 나가서 일주일치 군복, 동내의 속옷등 빨래를 하고 자갈밭에 빨래를 말리는데 그 고충은 이루 말할수 없다 지금은 생도들 숙소에 세탁기가 마련되 있다고 하는데 부럽기 그지없다,,, 화산유격장까지 9시간을 완전군장으로 행군 했으며 마지막으로 화산 유격장 입구에서 한시간 이상을 꼬브랑길을 돌아서 유격장을 도착하면 휴식이 아니라 공포의 빨간모자 조교들이 한밤중에 PT 체조를 시키는데 죽는줄 알았다, 그리고 레펠 1 (레펠2 는 몸동작이 반대다) 훈련중에 혼자 내려오기도 힘든데부상병을 들처업고 하강하는 모습, 지금생각하면 저런훈련을 어찌 받았는지 모르겠다,,, 지금생각해도 아찔하다 태권도 초단을 따지 못하면 유급이 된다고 하여서 수많은 품세동작과 발차기, 대련을 통하여 초단을 따고 기분이 좋아서 한컷 한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에 7기생은 빨간펜티, 8기생은 노란펜티, 9기생은 초록펜티 였는데 노란펜티에 수많은 얼차려와 " 귀관" 하면서 양손으로 양족 어깨쭉지를 밀치면서 때리는데 정말로 아파고 고달픈 나날이였다, 당시에 모든 기수에서 바로 위 기수들이 가장 많이 기압을 주었다고 한다 물자도 귀한시절이래서 빨래를 해서 야외 건조대에 널어놓으면 어느놈이 양말, 펜티, 런닝을 집어가서 곤혹스러웠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내 물건이 없어지면 나도 남의 빨래를 몰래 가져간적이 있었다 ,,ㅋㅋㅋ 용서바랍니다 ㅎ 당시에는 7기선배님 부터 11기 까지는 정규 2년 과정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간격도 6개월 터울이였으며 그 이후는 1년이다 6기, 7기는 같은날 시험보고 나이 많은분들은 6기, 이후는 7기로 입교했다, 그래서 7기보다는 8기가, 9기보다는 10기가 평균나이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철제운동기구 이름을 모르겠는데 혼자서 양손으로 360도 돌면서 몸의 유연성을 기르는 운동이다, 똑바로 가야하는데 옆으로 가기도 하여 중간에 정신통일을 외치면서 풋삽을 엄청 받은것으로 생각한다 철봉과 평균대와 링체조, 위에 운동기구들은 대연병장 우측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모든 일반학은 대연병장에서 받았는데 모든훈련에서 선착순, 쪼그려뛰기, 풋삽, 머리박아,등 무지막지한 기압을 받았다 당시에는 얼차려란 말도 없었다, 전방에서는 구타와 기압이 일상화 되였고 오죽하면 맞고 자는것이 편하다고 할 정도다, 동기생들중에 임관후에 최초로 특전사에 배치된분들은 장교들간에 구타는 물론이고 화장실 바닥을 혀로 딱는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영조님 말) 그후에 1975년경에 구타를 금지하고 기압만 주는 "얼차려" 가 육군본부 에서 하달 되였지만 형식이였고 암암리에 구타가 있었는데 당시에 유행했던말이 " 그저 군대는 때려야 말을 들어 " 였었다,,, 위내용은 최초 2015년 4월 8일에 작성하였으며 26년 9월 22일 보완 하였습니다 우리가 불렀던 당시의 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