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상혁이 무거운 마음으로 도로를 횡단하려고 포도에 발을 들여놓다가 옆을 지나가는 청년들의
씩씩한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부러운 듯 보는 순간 찦차 한 대가 갑자기 돌진해왔다.
횡단 신호가 채 끝나기 전이었다.
아차! 하고 돌아보는 찰라 찦차가 자기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거운 발걸음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한발 늦었다.
못하고 정면충돌할 판이었다.
그는 악! 비명을 지르며 선 자리에서 몸을 뒤틀었다.
바로 그때 조깅하며 지나가던 청년 중 한명이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유상혁을 낚아채듯 안고 포도위로 뒹굴었다.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모면한 두 사람은 팔과 얼굴에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불한당 같은 찦차는 그 사이 쏜살 같이 달아났다.
유상혁은 광안동 법률구조공단에서 나와 전철을 타기 위해 인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묵묵히 상념에 잠겨 가는 동안 마음이 착잡했다.
마치 쓸개를 씹은 듯 쓰디 쓴 입맛을 다셨다.
결국 부부관계가 파국으로 가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속에 천근만근 무거운 납덩이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에 이르렀다.
발걸음이 가볍지 않아 터벅터벅 걸었다.
때마침 광안리해수욕장 쪽에서 트레이닝복장을 한 청년들이 조깅을 하며 다가왔다.
바닷가에서 단련을 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하나 둘 구호를 외치며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는 그들이 막 그를 지나쳐 가는 순간에
찦차가 들이닥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상혁은 이혼소송 서류를 챙겨 들고 막 외출하려고 했다.
법률구조공단에서 상담을 한 후 이혼을 결심했다.
그날 횡단로에서 위급한 상황에 몰렸던 기억이 되살아나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마터면 때늦게 이혼하려다가 저승행 급행열차를 탈 뻔했던 것이다.
회사 생활하느라고 바삐 돌아가다가 정년을 한지 5년만이었다.
이제 노후를 좀 여유 있게 살 수 있기를 기대했다.
처음에는 세계여행도 다녀보고, 회사생활 40년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써보려고도 했다.
그동안 못해 본 일들을 해 보는 것이 노후생활의 보람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꿈이 다른데도 아닌 집 안에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것을 볼 때도 자기 불찰 때문에 그렇거니 하고 참으며
소망하는 꿈만은 이루어 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안에서부터 좀 먹기 시작한 꿈을 간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결단을 내렸다.
황혼이혼을 하기로 작정했다.
합의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아내가 재산을 송두리째 주면 응하겠다고 생떼를 쓰는 바람에
죽기보다 싫은 이혼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혼, 그것은 말만 들어도 인간의 가슴 설레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파탄시키는 끔찍한 말이었다.
아무리 세태가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만은 그런 끔찍한 짓거리만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물며 황혼이혼이라는 것은 죽을 날이 머지않은 노인네들의 노망난 짓이라고 여겼다.
나이 60은 고사하고 70, 심지어 80에 황혼이혼을 한다는 뉴스를 듣노라면 경위야 어찌 되었든지
노망임에는 틀림없다고 치부했다.
그 노망난 짓을 자신이 스스로 하려고 선택했다는 것은 말이 선택이지 이건 선택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울며 겨자 먹기였다.
겨자를 한번 먹어 보라! 톡톡 쏘는 그 겨자를 억지로 입으로 쑤셔 넣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먹어야 한다는 그 상황,
그것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한번 생각해 보라! 먹기 싫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억지에 눌려
말 못하는 참담한 심정은 말할 것도 없고 오관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느라 오장육부가 바짝 곤두서다 시피
한 가운데 톡 쏘는 것을 혓바닥과 코의 고통을 거쳐 식도로 내려 보내며 오만 상을 찡그려야 하는
감각적 고문에 이르러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유상혁은 바로 이런 고통을 안고 황혼이혼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집을 나서는 그의 어깨는 천근만근 짐을 짊어진 듯 무거워 보였고,
터덜터덜 떼어놓는 발걸음마다 존재감의 상실을 길바닥에 찍어놓는 것 같았다.
유상혁, 그가 이렇듯 생의 후반기에 낭패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않은데서 복병을 만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함께 살아 갈 동반자로 여겼던 아내가 언젠가부터 동반자의 반열을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일은 꼬이게 되었다.
점잖게 표현해서 동반자의 반열에서 이탈이지 그녀는 아내가 아니라 남처럼 구는 때가 더 많았다.
그는 이혼서류를 손에 꽉 쥔 채 지하철 노인석에 풀썩 주저앉았다.
발차 안내방송이 나오자 지그시 눈을 감고 여기까지 몰리게 된 자신을 두고 찬찬히 하나하나씩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참 살가운 여인이었다.
50대초까지만 해도 출근할 때 으레 현관까지 따라 나와 넥타이를 바로 잡아 준다든지,
옷에 먼지를 털어주거나, “집에 빨리 와요” 하며 그를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어떤 때는 다 큰 애들이 옆에서 보고 있는데도 목에 팔을 걸며 “당신, 멋있어” 하는 바람에 쑥스러워했다.
마치 일부러 그런 엄마를 애들이 보고 가정을 가지면 자기처럼 하라고 모델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대학 친구들과 계모임을 한답시고 매달 15일이면 정기적으로 집을 나갔다.
나가면서 밥이며 반찬을 빠짐없이 챙겨두고, 다시 말로써 잘 챙겨 드시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모임에 가서도 전화를 걸어 국을 어떻게 데워 먹으라고 타이르곤 했다.
국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그를 배려해서였다.
그러던 그녀가 50대 중반에 이르자 변신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잠간씩 화를 내고 말았다.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하는가 하면 문제가 생겨 어조가 높아지면 꼬박꼬박 대꾸를 하고 하다가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도 살다가 보면 그렇거니 하고 넘어 갔다.
그런데 차츰 차츰 그녀가 혹시 치매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는 언행을 하는 것을 보았다.
50대 후반에 벌써 치매가 오면 어떻게 하나-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화가 날 일도 아닌데 화를 낼 때 보면 정색을 하고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살갑던 그녀가 그렇게 변신을 하게 된 모습은 살갑던 모습을 거꾸로 상상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까지 발전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이었다.
아내는 대졸 회사원으로서 활동적인 생활을 했다.
직장에서 남자 동료들을 뺨칠 정도로 활동하던 그녀가 결혼으로 퇴직하여
가정에 매달린 생활을 하게 됐을 때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이런 그녀가 유상혁이 정년으로 회사를 물러나자 여러 가지로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치부하면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어디 밖으로 나가게 되어도 내다 볼 생각은커녕 일부러 딴청을 부리는지 보이지 않았다.
계모임에 갈 때도 반찬을 챙겨 두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심지어 애들이 보는 앞에서도 자기주장을 하다못해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까지 하게 되었다.
남편을 깔보기 일쑤였다.
부부 사이에 그런 억지스러움을 뼈 속 깊이 느끼며 산다는 것은 이미 남남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파탄의 징조가 아니었던가.
이런 생각에 미치자 유상혁은 새삼스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이런 자신을 누가 주시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머리를 스쳤다.
그 바람에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뜻 밖에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만치 늘어 서 있는 승객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서는 여인이 바로 아내였다.
대연역에서였다.
-그녀가 왜 여기서 전철을 타는가. 계모임이 여기서 있었나-
유상혁은 미몽에 사로잡혀 있다가 깨어난 것처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침 일찍계모임에 간답시고 서둘러 나간 아내가 대연역에서 전철을 타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해답이 될 현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이 있었다. 바로 남자였다.
유상혁은 옆에 앉은 노인의 뒤로 얼굴을 숨기며 그녀 쪽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유달리 정답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옆에 선 사나이는 바짝 기대다 싶이 몸을 아내에게 밀착한 채 무언가 정다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은 이따금 슬쩍슬쩍 웃기도 하면서 마주보고 히히덕거렸다.
그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입에 침이 말랐다.
-도대체 저 여자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저 사내 자식은 누구인가?
아무래도 둘의 관계가 심상찮아 보였다.
벌건 대낮에 자신이 남편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이 되어 갔다.
사나이는 5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15일만 되면 계모임에 간다더니 결국 저 사내를 만나러 간 것이구나.
지레짐작을 하니 당장 달려가서 요절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둘이 하는 수작을 좀 더 두고 보자는 생각이 앞섰다.
확실하게 꼬리를 잡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서면역에 내리자 둘은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곧장 노포동행 노선으로 향했다.
이미 자주 다녀 본 것처럼 말이다.
이혼서류를 가정법원에 제출하려던 예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이쯤 되면 이혼서류고 뭐고 제쳐두고 두 연놈을 현장에서 잡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둘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들이 눈치를 챌세라 가만가만 다른 승객의 뒤에 붙어 서서 둘의 동정을 살폈다.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둘은 여전히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이 꼴을 숨어서 보고 있는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저 사내가 있는 자리에 자기가 있으면서 아내와 정겨운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데
엉뚱한 놈이 자기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내는 정년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정년이 무슨 계기가 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정년이 문제가 아니라 저 놈 하고 관계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유상혁은 그들이 범어사역에 내릴 때까지 아내가 다른 사내와 히히덕거리는 꼴을 참고 보아야 하는
곤욕을 치르면서 용케 버티고 있었다.
나이가 50대만 되었어도 그는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그들의 불륜 현장 꼬리를 잡아야 하는 날인 만큼 어떤 수모도 참을 수 있었다.
범어사역에서 내린 그들은 보신탕집이 늘어선 산 언덕 유원지 쪽으로 향했다.
한 보신탕집에 들어 간 둘은 밀실로 들어 가버렸다.
그는 둘이 언제 나와 어디로 갈지 몰라 점심을 굶은 채 언덕 숲 속에서 보신탕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실에 들어 간 둘은 앉기도 전에 부등켜 안고 진한 키스를 맛보았다.
그러자 밑으로부터 뜨거워지면서 성욕이 꿈틀대었다.
그들은 한 동안 나자빠진 채 일어날 줄 몰랐다.
몸에서 열이 빠지고 나자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무엇이 즐거운지 그녀는 빙긋 미소를 띠며 혼자 중얼거렸다.
-눈치 챘겠지. 아까 보니까 잘 걸려들고 있던데...
침을 꼴깍 삼키며 언덕 아래로 노려보는 유상혁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방안에서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있나.
아마 껴안으며 키스도 하고 별짓을 다 하겠지.
실망과 허탈, 그 후에 밀려오는 분노와 살의에 부르르 떨었다.-
저 연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부그부글 끓어오르는 적개심에 떨다가 지쳐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승용차의 클랙슨소리가 나서 잠을 깼다.
그들을 놓친 것이 아닌가, 벌떡 일어났다.
허겁지겁 그들이 있던 보신탕집에 들어갔다.
친구를 가장하여 그들의 행방을 물었다.
20분 전에 식사를 하고 나갔다고 했다.
느닷없는 그들의 출현에 카메라도 준비되지 않은데다가 현장을 놓쳤으니
아내의 불륜확인에 반타작 밖에 하지 못하고 말았다.~~다음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