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판에 3,000원입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한 여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한판에 2,500원에 주세요. 아니면 말고요.”
잠시 머뭇거리던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럼 그 값에 가져가세요.
오늘 계란 한 알도 못 팔았는데, 이제 좀 팔리겠네요.”
여인은 싸게 잘 샀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란을 들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번쩍이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 친구와 함께 근사한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에 도착한 그녀는 친구에게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주문하라고 했고, 식탁 위에는 금세 값비싼 음식들이 가득 놓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음식은
많이 남았습니다.
계산대에서 식당 주인이
“4만 6천 원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5만 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잔돈은 됐어요.”
그 모습만 보면 참 후하고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넉넉한 식당에서는
쉽게 베풀면서도,
하루 종일 길가에 앉아
계란을 파는 노인에게는
왜 그토록 인색해지는 걸까요?
왜 우리는 가난한 사람에게
물건을 살 때는 마치 힘이라도 가진 듯 값을 깎으려 하면서,
이미 충분히 가진 사람들에게는 쉽게 후해지는 걸까요.
예전에 아버지께서는 재래시장이나 노점상에서
물건을 사실때면 값을 거의
깎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 오시거나, 값을 조금 더 얹어 드릴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는 그 모습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왜 굳이 더 주세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빙그레 웃으며 말씀 하셨습니다.
“얘야, 고결함이라는 건
보자기에 싼 자선같은 거란다.”
그 말이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 깊이 남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우쭐하지 않는 것,
어려운 사람의 삶을
함부로 깎아내리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품위 있는 배려인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세상 물가가 너무 올라 누구나 살기가 빠듯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더 베푸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재래시장이나 노점의 농수산물만큼은
너무 모질게 값을 깎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몇 백원은 누군가에게
하루의 희망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만 아끼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집 안 깊숙한 곳에는
아끼느라 꺼내 쓰지 못한
귀한 그릇들이 있습니다.
몇 번 입지도 못한 좋은 옷들도 있습니다.
“나중에 귀한 손님 오면 써야지.”
“더 좋은 날 입어야지.”
그렇게 미루고 또 미루며 살아 갑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정작 오늘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가 와도
결국 또 미루게 됩니다.
오늘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도 행복을 유예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석인성시(惜吝成屎)라는 말이 있습니다.
惜(아낄 석), 吝(아낄 린), 成(이룰 성), 屎(똥 시)
뜻은 “아끼고 또 아끼다가 결국 똥이 된다”는 뜻입니다.
너무 아껴서 결국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유품정리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좋은 옷과 가장 비싼 그릇을
한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결국 좋은 것은 고이 모셔두기만 하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물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도 그렇고, 말도 그렇습니다.
좋은 말은 아끼고,
사랑한다는 표현은 미루고, 고맙다는 인사는 쑥스러워
숨긴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더는 전할 수 없는 시간이 오면 그제야 후회합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아끼며만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그릇은 오늘 꺼내 쓰고,
좋은 옷은 오늘 입고,
좋은 말은 오늘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때까지 품고만 있다가
끝내지 말고, 살아 있는 오늘 서로에게 건네며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아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곁에 머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