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은 한번 봐도, 글 잘 쓰는 사람은 다시 본다.
위의 제목은 요즘 세상에서는 예사 억지 말이 아니다.
아무리 글 쓸 핑게가 없어 억지로 갖다 붙여도 웬만한 비교라야지----
그래, 당신 같으면 살살 녹이는 미인 안보고 꼬장꼬장 글잘 쓰는 사람을 다시 보겠는가?
여기서 “글을 잘 쓴다” 하는 것은 문장력과 글씨 까지 포함한 의미가 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요새에는 생소해도 2~30년 전만해도 간혹 인용하던 말이다.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인물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던 신체(體貌체모), 말씨(言辯언변), 글씨(筆跡필적) 판단(文理문리)의 네 가지를 이르는 말에서 연유되었다.
조선조에서도 이 기준을 도입하여 관리 선발에 많이 참고하였다고 한다.
요즘 정부의 인사개편에 낙점(落點)된 후보자들이 청문회를 통하여 검증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후보자들이나 질문하는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 선발(選拔)된 인사(人事)들인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한결같이 구상유취(口尙乳臭-입에서 젖내난다)한 모습만 보여 아무 실효성 없이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국민에게 스트레스만 주는 “청문회”를 폐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신언서판(身言書判)중에서 첫 번째 신(身)에 관심이 먼저 간다.
대인(對人)에서 맨 처음에 마주하는 것이 외모이기 때문이다
우선 외모가 바르고 이목구비(耳目口鼻)를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면 일단은 유리하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처음 대하는 얼굴, 회사의 신입사원, 남녀 간 교제, 연예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신(身)중에서 단연 얼굴이다.
신(身)에 대한 유리한 대표 점을 내세우기 위해서 바르고 다듬고 성형을 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외모를 남 앞에 보이기 위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다.
한편 겉치레에다 판단의 무게를 많이 두는 사회풍조 이기도 하다.
겉으로 의젓하고 잘생긴 외모에 옷잘입고 좋은 차타고 돈잘 쓰고 다니면 우선 호감은 산다.
때로는 이런 차림의 사람들 중에 사기범들도 있지만---
필자는 호감 없는 외모에 특별한 일 제외하고는 일상의 의복이 청바지에 허술한 상의를 걸친 정도이니 “양반”소리 듣기는 애초부터 틀린 사람이다.
이 허술한 차림 때문에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약 35년전 전남 광주에서 회사 지점의 책임자로 있을 때다.
판매회사의 지점이므로 창고와 상품을 진열하는 큰 전시장을 사무실겸 사용하고 있었다.
매월 3회 본사에 송금을 해야 하므로 항상 돈에 쪼들려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일요일에도 직원들은 쉬어도 나는 혼자서 출근을 하여 전시장을 지켰다.
어느해 눈비가 오는 크리스마스 날인데 그날도 나 혼자 출근을 했다.
전화가 따르릉 왔다.
-여기 충장로 × × 회관인데 사장님 있어-
-예, 저어--
-응 사장 보다도 지금 주방에 펌프가 고장 났는데 빨리 기계 한 대 실고와-
-저, 지금 혼자 있고 밖에 눈비가 많이 와서 조금 비가 개이면 배달--
-무슨소리야 급해, 너 어물쩡거리면 너희 사장에게 이야기 하면 혼날줄아라-
그때는 차도 없고 자전거로 배달할 때다.
자전거 뒤에다 무거운 기계를 실고 비를 맞으며 배달을 했다.
-자아씩, 이렇게 오면 될 것을 괜히--
-얼마야?-
-예 36.000원입니다(그때로는 고액이다)-
-여기 돈 받고, 영수증 가져 왔어?-
-급하게 오는 길에, 또 휴일이라 금고문이 잠겨서-
-알았서 우선 자네가 임시 영수증이라도 써 놓고 가, 돈 받은 표시는 있어야 되니까.
-예-
물이 줄줄 흐르는 손으로 주인이 주는 종이에 영수증을 꺼적꺼적 썼다.
주인이 영수증을 받고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내 아래위를 흘터 보더니
-됐어-
하고는 돌아 나오는 내 귀에
-자아씩, 심부름꾼 치고 글씨하나는 제대로 쓰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뒷날 전화가 왔다.
-지점장님 좀 바꾸어 달래요-
-사장이요, 어제 당신회사 직원한테 기계를 한 대 샀는데 확인했소-
-예 확인했습니다. 저희물건을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식 영수증 보내주세요-
-예-
-------
-아니 사장님이 어제 배달한 그 직원이라니 이럴 수가-------
한번은 전시장이 한가하여 “중국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읽으면서 필요한 것을 메모를 하고 있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점잔은 남자 손님한분이 오셔서 한 바퀴 상품을 구경하고 의자에 앉는다.
탁자위에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보고
-이 책 누가 읽는 겁니까?-
-예 제가 그냥 심심풀이로-
-아니 장사하는 사람이 당시(唐詩)를 다 읽다니-
아마 내 차림새에 비하여 어울리지 않다는 표정이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가 오고갔고 그 신사는 해남 연동에 있는 녹우당(綠雨堂)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선생의 16대손인 尹××님으로 인품을 갖춘 인텔리였다.
당시(唐詩)를 계기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녹우당(綠雨堂)에 특별히 초대를 받아 고산(孤山)의 귀한 유물을 직접 접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앞의 두 이야기는 지나간 시대의 그리운 향수(鄕愁)라 할 수 있다.
요즘 세상 특히 사이버에 무분별한 악풀이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낭만적인 에피소드(episode)다.
예향(藝鄕)이라 불리는 호남(湖南)의 특별한 경우만이 아니고 그 시대상에는 인문 예술을 사람의 인품과 연관시키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미인과 비교야 할까마는 생활 속에서 녹여있는 인문학의 이상(理想) 동경(憧憬)의 정서(情緖)가 있었다.
이제는 글이나 글씨 잘쓴다고 미인을 지나치고 시묵(詩墨)이 주목을 받는 천진난만(天眞爛漫)의 소박하고 서정적인 시대는 아니다.
지금은 자극적이고 섹시한 외형의 중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한치라도 속살을 더 내보이고 더 큰눈과 개미허리를 추구하고 있다.
요새는 학력자랑 가문자랑 자식자랑 경력자랑 하면 팔불출이다.
그만큼 사회의 모든 분야가 보편화 되고 배경보다는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내세우는 아상(我相)의 시대가 된 것이다.
거미줄 같은 정보망으로 사회전체의 구성원이 높은 상식을 갖고 있다.
모임에 가면 방송 신문에 나오는 내용을 전달하는 수준이 대부분이지만 알고 있는 정보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던지 결혼을 목적으로 교제하는 일이나 선거나 추천 혹은 지명(指名)으로 인물을 선택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 졌다는 의미도 된다.
반대로 복잡한 시대일수록 외모에 치중하는 디지털 보다는 오래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내면의 순수한 진실을 찾아내는 아날로그의 새로운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지혜롭게 요구되는 때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