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엔 봄비가 내리더니만, 오후에는 갠 날씨에 따뜻한 봄다운 봄 날씨다.
그래서 느지막한 오후, 큰 개울물이 흐르는 집 부근 탄천(炭川)변을
늘 그랬듯이 주머니에 두 손 넣고 어슬렁 어슬렁 거닐었다.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2주 전 이곳을 산책할 때와 마찬가지로 서산에 걸린 일몰은 불그스레한 빛이 감돌고,
천천히 흐르는 물위에 비친 노을과 흘러가는 뭉게구름,
먼산에서 어스레 내려오는 땅거미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또 보는 것 같았지만,
천변 양 옆 사방에 길게 뻗어 군락을 이룬, 온갖 봄 꽃들은,
왜 그렇게 성질이 급한지 흘러가는 4월의 시간 등을 타고 떠나가며
눈 시리게 아름답던 자태와 유혹의 손길을 세월의 품속에 서서히 감추어 버렸고,
삼라만상은 온통 연녹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올 봄에는 예년에 비해 희한한 일이 봄 꽃 세계에 벌어졌다.
산수유와 벗 꽃, 진달래와 목련을 비롯한 봄 꽃들이 동시에 피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 꽃들을 뭉뚱그려 봄 꽃이라 부르지만 피는 순서가 있다.
일주일에서 10일, 한 달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피던,
매화와 동백, 산수유와 진달래, 철쭉과 목련, 같은 벗 꽃도 진해에서 먼저 피고
서서히 북상하면서 한참 뒤에 서울 윤중로에 피었다.
그런데 올해는 거반 일주일 동안 전국에서 거의 동시에 꽃이 피고 꽃 비가 내렸다.
남쪽으로 꽃구경 가려던 사람들이 굳이 가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학자들은 이게 모두 지구온난화 탓이라고 한다.
전국에 이슬비가 내리고 기온이 상승하면서 꽃들이 시샘하듯 피어버린 것이다
길가의 봄기운을 타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벗 꽃은 이제는 자취를 감추고
거의 절반 이상은 돋아나는 파란 잎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노란 개나리도 잎을 띄우느라 파란색으로 반 이상 어울러 있다.
걷는 신발 밑에는 뭇 사내의 탄성을 자아냈던 현란한 목련꽃잎이
간혹 나둥그러져 있고, 봄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하필 나의 옷깃에
내려 앉던 벗 꽃잎은 눈을 씻고 둘러봐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 멀리 5월을 노래하는 라일락이 벌써 숫처녀의 젖가슴모양
부풀러 오르고 있다.
벤치에 앉아 봄의 정기를 가슴에 담으면서 물끄러미 개울을 바라보니,
오리 몇 놈이 흐르는 강물의 얕은 곳에서 고기를 잡아 먹느라 정신이 없다.
발 앞의 풀밭 속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갈인 남보라 빛의 제비꽃들이
군데군데 멋을 부리고,
S라인의 가는 허리를 하늘하늘 흔드는 노란 민들레가 나의 눈을 유혹하고,
순진한 시골처녀 같은 느낌을 주는 흰 냉이 꽃이 젖가슴을 풀고 심호흡을 하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꽃분홍으로 단장을 했지만 시들어가는 진달래와 철쭉꽃,
영산홍도 드문드문 보이는데, 시력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꽃 색깔만 보고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푸르름이 한창인 잎 사이로 흰 눈이 내린 것 같은 것이 보이기에
변덕스런 날씨에 무슨 조화냐 싶어 가까이 가 보니,
설유화가 한껏 멋을 내며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 저 만치에는 쑥들이 옹기종기 모여 시골장터의 아낙네들이 왁자지걸 떠드는
모습인데, 왠 아줌마 한 분이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쑥을 캐서 담고 있다.
그렇게 많이 지나가는 아가씨들은 쑥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데,
저 아줌마는 곁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뜯고 있다.
저녁 가족들의 식탁에 맛있는 쑥 국을 끓여 올리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찬 모양이다.
그런데, 풀밭 한쪽에는 평소 잘 보이지 않던 크로바가 큰 거실평수만큼
자리를 하고 제법 짙은 파란색으로 웅성대고 있어서,
혹시나 행운의 네 잎 크로바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3~4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젖히며 보았으나 찾지 못하여 쩝쩝 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치 댓 마리가 좀 전에 내가 앉았던 벤치에 모여 앉아 까~악거리고 있다.
아마 나에게 사랑과 행운의 희소식을 미리 알려 주려고 전령으로 왔나 보다.
기분 좋은 웃음을 저 하늘로 싱긋이 날려 보낸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니,
따사로운 봄기운이 햇빛 있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대지의 기운이란 느낌이 강하게 옷깃 안으로 스며든다.
아마 만물이 하품과 기지개를 내 품는 입김과
땅속 뿌리들이 물을 길러 올리는 영차 소리치는 함성,
그리고 갈라진 땅 사이로 풀 씨들이 움트려 돋아나려고 용씀과
흙 속의 무수한 씨들이 먼저 땅 위로 고개 내밀려 다투는 몸싸움에서
생기는 자연의 생명 에너지가 대지의 열(熱)과 어울려 파문을 일으키며
하늘로 분출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내 손에는 닿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삶의 허덕임에서 몇 걸음 떨어진 뒤 안 길에서 바라보는 생명력으로 퉁소가 되어
나의 감성을 울리는 창조의 또 하나의 신비며 섭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