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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간이여!--- 가는 가을, 오는 겨울이여!

작성자恩波 안균세|작성시간23.11.30|조회수216 목록 댓글 0

낙엽에 찬 바람이 내린다. 시간이 내린다. 아니 다른 시간이 도착했다.

떠나는 시간을 또 다른 시간이 배웅하기 위해 도착했다.

둘은 그 흔한 포옹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배웅의 이름으로 이별한다.

2023년의 떠나는 11월과 열리는 12월이 마주치는 길목에서 벌어지는,

떠나는 가을과 오는 겨울의 이별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하나의 시간이 떠나고 또 하나의 시간이 도착하는 것을 목격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는 게 아니고 시간이 떠나고, 도착하는 걸 늘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풍에 겨울눈이 내리는 두 주연배우의 ‘시간’이란 제목의 연극을

멀찌감치 떨어진 객석에서 바라보는 관중인지도 모른다.

 

열차 출발시간에 늦어서 택시 타고 죽어라 뛰어, 역 플랫폼에 들어섰지만

열차는 꽁무니만 보이며 여지없이 떠날 때…… 열차운행 시각표는 ‘시간’이라는

주연배우의 공연 스케줄 같다는 생각이 인생여정에서 들곤 했다. 

삶에서 시간은 그렇게 떠나고, 도착하고, 

우리는 그 시간의 공연 티켓을 끊어 탑승해선 시간에 맞춰 달리려 애 쓴다.

 

가만히 보면,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달리는 대로 나는 달리고, 

그러다가 얼마 후면 시간도 잠시 쉬려 낯선 이름 간이역에 잠시 멈추곤 한다. 

간이역 철로 변에 화려한 단풍과 흩날리는 낙엽에 마음을 뺏겨 몇 발짝 옮길라치면

그새 ‘시간’이라는 주인공을 태운 열차는 또 다른 시간의 역을 향해 달리겠다고

기적을 울리며 목청을 높이곤 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껏 내가 주인공이고

시간은 그때그때 필요한 하루짜리 엑스트라 배우라는 생각을 참 오랫동안 했다. 

언제나 대기하고 있다가 부르면 오는,역(役)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배우라고 생각했다.

 

어느 해 새해 첫 날 아침, 일출 보러 동해의 정동진 해변에 서서 희망차게 떠오르는

새해 태양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간절히 다짐하며 기원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은 우습기도 하나 그때 바라보는 내 마음이 그랬다.

태양은 희망차게 떠오르는 게 아니고, 시간이 되면 늘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

태양은 나의 희망을 위해 떠오른 것이 아닌, 시간이 하자는 대로

매일매일 떠오르는 것임을 좀 더 시간이 흘러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슬픈 날도, 내가 더 이상 희망찰 게 없어도 태양은 그냥 뜬다’.

태양은 그냥 시간이 하자는 대로 뜬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의 삶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생의 퀴즈였단 말인가.

 

산봉우리 단풍에 찬 바람과 겨울눈이 내려도,

가을과 겨울 두 배우의 연기가 아무리 애잔해도

무대 위로 쫓아 오르지 못하고 담담하게 마음 속으로만 울어야 하는 것,

시간 바쁜 열차 출발로 간이역 꽃을 마음에만 품고 올 수밖에 없는 것,

오늘의 태양은 나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뜨는 것,

그래서 내일 태양도 자연스레 뜨고 나도 자연스레 시간을 바라보며 사는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시간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임을 알았다.

그게 우리 삶을 위해 얼마나 현명한 지혜와 기준인지도 알았다.

 

수년 전, 대관령 양떼목장의 그해 마지막 단풍을 보러 갔다가

하얗게 내린 겨울눈을 보고 오는 것은 그래도 행운이며 흐뭇한 일이었다. 

무덤덤하게, 무뚝뚝하게, 무표정으로 자기 갈 길만 가는 시간이

잠시 아름다운 표정을 지은 상황을 마침 목격한 것이다. 

단풍에 겨울눈이 조용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과 귀와 가슴에는 “짹깍짹깍” 시간이 내렸다.

 

다른 시간이 역에서 내리고 또 내린다. 그 곁에 서 있는 우리는 가을에서 내린다.

그리고 겨울 역을 향해 출발한다고 기적을 울리며 역무원의 목청을 길게 빼는

“출발”소리에 우리는 열차에 다시 올라탄다. 저 뒤로 가을이 보인다.

그 흔한 포옹 한 번 제대로 못한 가을시간이 더 멀리 자꾸 멀어져 간다.

아니, 내가 가을로부터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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