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떠나 보내는 11월의 끝자락 길목에,
오늘따라 날씨도 차가운데 화창하지 못해 오늘날 우리나라가 처한 운명과 상황을
보는 것같이 답답하고 우울하여 오후시간에 무작정 차를 몰아 한강 강변북로
남양주시 소재의 한강 변에 위치한 정원이 있는 꽤 큰 커피점을 찾았다.
커피 잔을 들고 한강 변인 마당에 설치한 테이블에 앉아 물끄러미
흘러가는 구름조각과 한강을 바라보니 만감이 솟구친다.
오늘, 겨울을 향한 길목인, 이 늦가을은 어느 ‘가을의 길’로 흘러가는지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자연에게 물어 보련다.
높은 하늘에서 바람에 떠밀려가는 "구름"과
파란색이라기 보다 검푸르게 흘러가는 "강물"”과
나뭇가지에서 흩날리며 땅바닥에 뒹구는 "낙엽"이다.
지난주까지 산야를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물들려 놓는 "단풍"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함께 만나 어울려 아름다운 정경을 이루는 곳이
한강 변에 설치된 이곳의 야외 정원이다.
그런데 오늘은 한강 변의 계절의 순환법칙에 따른 자연환경이 보이지 않고
어둠 컴컴하여 앞이 불안한 이 땅의 상황과 첨예한 대립으로 펼쳐지는 국내외
정세가 보이고, 이를 통하여 한강유역의 역사가 파노라마 같이 시야에 펼쳐진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도도히 흐르는 한강과 미사리 건너 저 멀리 남한산성이 보인다.
좌측으로는 팔당댐이 보이고 우측에는 아차산과 아파트 군집 사이로
몇년 전에 완공된 제2롯데몰인 123층 건물이 아스라이 우뚝 솟아 보인다.
느린 듯 하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이 땅의 중심인 한강유역의 역사를 기억
하고 있을 것이다. 5.16혁명 때 한강대교를 무사히 넘어 성공하였을 때 찍은
박정희대통령 좌우에 있던 차지철과 박종규의 흑백 사진이 떠오른다.
20세기 중반. 한강과 관련 민족적 비극 중 하나인 6.25한국 전쟁은 발발 후
3일 뒤인 새벽2시30분 한강이북 주민이 미처 피난 못한 상태에서 한강대교의
조기 폭파로 종로경찰서 경찰77명을 포함한500~800으로 추산되는 군경과
최소500명 이상의 민간인과 50여대의 차량이 추락하는 비극이 발생 되었고
1636년12월부터1637년1월 사이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후금 측 에서 황금과
백금 1만 냥과 전마3000필 정병3만과 군신의 예를 맺자는 것을 거부하자
후금은 용골대와 마부대를 선봉으로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을 수비하고
있는 것을 대적하지 않고 질풍같이 한양으로 내달려 10일만에 한양에 육박하여
강화도로 피란하려던 인조는 다급한 김에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난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항복한 후, 1895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대패할 때까지 청의 영향권에 있었다.
병자호란을 생각하면. 지금도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편 실감 하게 한다.
당시 친청파와 친명파로 갈린 중신 틈 에서 왕의 판단착오로 수많은 민초들이
목숨을 잃거나 어려움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남한강 상류 쪽인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배수진 전법으로 왜군과 일전을 벌이다가 패배 한곳이기도 하다.
후세에 군사 전략가는 “왜 험난한 문경세재에서 매복 후 기습작전을 펼치지
않았나”. 하고 지난 역사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아차산 남쪽 한강건너 풍납토성 유적주변은 일찍이 자리잡은 백제의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과 인접한 아차산은 3국시대의 한강유역 쟁탈전의 중요한 요새였다.
처음에는 한성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을 저지 하려고 아차 산에 북쪽을 바라보고,
방어벽인 보루 4개를 쌓았으나 고구려가 아차 산을 장악 하였을 때는 당연히
강 건너 백제를 견지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방어벽 방향이 바뀌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최남단의 국경선은 아차산과 함께 중원인 충주 남한강까지
진출하여 지금도 충주에는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 유적으로
고구려비가 있다. 지금은 전쟁의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핵무장 하려는 북한과 미국과 일본의 세력권에 있는 우리나라는
G2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끼어있는 상태로 이런 때
일수록 우리의 지도자는 뛰어난 외교가 필요한 때다.
지금도 북한과 대치중인 한강 하구와 임진강. 한탄강도 마찬가지로 산이나
강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주요한 국경선이 되었다.
한때 이순신 장군이 근무 하였던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도 현재 러시아 땅이
되었고 북한은 6.25 전쟁 원조의 대가로 장백폭포를 비롯한 백두산유역의
반을 중국에 넘겨주었다.
한일 합방 당시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대로 간도인 토문강까지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 하였고, 당시의 지도에도 조선 땅으로 되어 있었으나, 일본의 한일
합방은 국권을 잃은 당사국인 조선을 참여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청국과 일본은
자국에 이익 되는 방향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으로 확정 하였다.
언젠가는 한강 하구로도 예전같이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고 임진강. 한탄강이
한때는 분단선의 일부였다고 관광객이 휴전선을 견학 올 날을 꿈꾸어 본다.
분단된 지 70여 년이 넘다 보니 남. 북간 정신과 문화에. 이질감이 많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말없이 흐르는 한강은 우리의 미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