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전투는 송암 김면 장군의 전투지가 아니다"는 어느 고령 엉터리 사학자에 대한 반발을 위하여 자료
"무계전투는 송암 김면 장군의 전투지가 아니다"는
어느 고령 엉터리 사학자에 대한 반발을 위하여 자료 모음
(작년 의재공 무계에서 추모 행사를 하면서 전 이태근 군수께 고령 사학자를 한 분 소개해 달라:고 한적이 있는데..
위와 같은 답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에 이러한 주장을 우리 문중에서도 주장하는 자가 있어 여기 아는대로 자료를 찾아 올려 두려 한다
1) 1995년 고령김씨 족보 1권 36면에도
[무계(茂溪)에서 승첩하니 합천군수로 제수되고]라 기록되어 있고
지례, 우척현, 무계, 정진을 전적지로 기록하고 있다.
2) 선봉장 의재공 김홍한 장군이 전사한 곳이 2차 무계전투지 이다
(선봉장 김홍한은 김면군의 선봉장이지 정인홍과는 관계가 없다.)
3) 조선왕조실록에도 선조가 송암을 합천군수로 제수할 때 교서에 "정진을 들이치니 달아나는 적이 혼을 잃었고,
무계(茂溪)에서 칼을 휘두르니 적의 시체가 강물에 가득하더라" 했다
(우척현 전적비문에도 한 글자 빠트리지 않고 기록에 올려졌다)
4) 본인의 저서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50면 [학술발표2] (04.10.31) 대구지역의 임진란사 연구에서 김강식 교수가 '대구지역 의병활동'에 대한 발표에서도 5째 줄
"6월 18일 제2차 무계전투에서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적선 2척을 처 포획하였다"고 하고 소상한 내용까지 발표하였다.
편집 마감 전의 발표로 이를 기록하면서 이태근 전군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제2학술발표는 그날의 김강식교수의 발표문을 채집한 내용으로 이 책이 나오면 그 엉터리 같은 향토사학자 교육 좀 시키세요. 어째 고령에 산다는 사학자가 고령인 송암의 전투지를 합천인 내암의 전투지라 한단 말입니까?" 하면서 흥분 한적이 있고 출간 후 책자 100권을 이태근 군께 보냈다.
족보에는 무계(茂溪)가 3번째 전투지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이런 엉터리 사학자를 바로 알리기 위해서도 무계(茂溪)에 전적비를
먼저 세우려고 계획해서 날을 잡았고 9월 9일을 우척현 10월 8일은 무계(茂溪)에 전적비 세울 날을 정했었다.
(9월 9일 雙9節, 송암과 8인의 친족의사의 의미 부여/ 10월 8일은 8인의 친족의사)
장소를 찾고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준비를 하고 서둘렀다.
그러던 어느날 이태근 전군수의 전화를 받고 이 행사(茂溪)를 접어야 할 일이 생겼다.
우리 문중에서도 부정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이태근 군수가 찝찝하게 생각하니 진행할 수가 없다.
며칠 전 知人이 보내 온 합천 해인사 어느 지점에 설치된 현판에 김면 장군의 전적지에 무계(茂溪)가 기록되어 있다
하~ 어딘가에 내가 올려 둔 사진도 있지만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머리가 솟구친다
문중에서 반대 뜻이 없었더라면 무계에 며칠 전(10월 8일) 또 하나의 전적비가 세워졌을 것이다.
아래에 날아 온 해인사 광고문을 올려 본다.
왜군을 물리친 김면장군의 의병활동
거병한 이래로 몇 달동안이나 갑옷을 벗지 않은 김면 장군은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낮에는 왜군을 유인한 다음 포위하여 격파하고 밤에는 왜군의 태만한 틈을 타서 직접 기습했다.
큰 싸음을 10여 차례나 했고 왜군을 30여 차례 물리쳤다.
유명한 의병활동으로는 무계전투, 우척현전투, 지례전투, 거창사랑암 전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