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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비문화연구원 학술세미나 제2부 특별기획 -2)

작성자南齋|작성시간17.10.30|조회수5 목록 댓글 0

한국선비문화연구원 학술세미나  제2부 특별기획  -2)


2017년 한국선비문화연구원 학술세미나

임진왜란 의병활동과 남명학파

2017. 10. 20.


학술세미나 제2부 특별기획






2

 

특별기획-1)

 

0 [난중일기]에 기록된 남명학파

   박갑로 영남이순신연구소

 


박갑로 영남이순신연구소 소장



'영남 이순신연구소' 박갑로 소장은

 

난중일기에 기록된 남명학파 인물, 약포 정탁, 월정 윤근수, 망우당 곽재우, 만오 이담, 동계 조형도, 매와 노순, 노일, 대암 박성, 뇌곡 안극가, 안각, 초당 안철, 죽유 오운, 해월헌 황여일, 원당 권문임, 옥봉 정대순들에  대해서  난중일기 첫 기록 순으로 발표했다.

 








특별기획-2)

0 남명학파 후손 義兵家 이야기 

  송암김면선생후원회 김재호

 


 

南齋 김재호   송암김면선생후원회



안녕하십니까?

 

저는 임진왜란 의병도대장 松菴 金沔 선생 13代 後孫 南齋 김재호입니다.

   ‘남명 선생 제자  3대 의병장 중 역사속에 묻혀있는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선생의 현창사업 진행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松菴 金沔 선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령에서 倡義하시어 居昌에서 의병활동을 하셨습니다.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하시면서 萬余石 재산을 군비에 충당하셨고, 함안 죽현, 의령 마진과 정암진, 고령 개산포와 茂溪, 성주성, 김천 금산과 지례, 그리고 거창 우척현과 사랑암 많은 지역의 陸路와 낙동강 水路를 오르내리시며 크고 작은 30여차례 왜적과 전투에서 싸워 큰 공을 세우셨는데도 역사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1978년 저자 김도윤 선생의 義兵都大將 松菴先生實錄머릿말에 노산 이은상 선생은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면이라며 극찬을 하였습니다.

 

각종 壬亂史 기록에 의하면 의병도대장 김면, 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입니다.

3대 의병장의 현창사업 현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좌장 忘憂堂 곽선생은 경남 의령과 대구 망우당공원 등 엄청난 성역화가 되어 있으며, 우장 萊菴 정선생도 2001년에 60억원이상 예산으로 합천임란창의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의병장 중에서도 전공이 크신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 선생은 전국 어디에도 戰績碑 조차 선 곳이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정만진 사학자는 이래서야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 준 우리 선조들의 倡義정신과 선비정신을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기리고 있단 말인가?” 하고 개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좌장 우장 이름은 게재되어 있으나 의병도대장 김면 선생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01210월부터 201312월까지 교과부와 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역사교과서 출판사를 수시로 여러차례 다녔으며 사학자 200명 이상 명단을 뽑아 자료를 보내어 하소연 하였습니다. 접촉한 7개 교과서에 모두 등재하는 성과를 올려 2014년 중학생들이 송암 김면 선생의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게 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김만호 교수께서 발표한 의병장들의 전국 분포 지도에 김면이란 이름들이 올라왔었는데 과거에 없던 이름을 제가 올린 것입니다.

 

송암선생의 많은 文籍들은 당시 시기심 많은 判官松菴精舍에서 모두 탈취 燒却하여 하나도 없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송암 김면 선생의  유품은 단 하나 남아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돌아가시기 3개월 전 남명 선생 문중에 보낸 문안 편지 한 장이 현재 이곳 남명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복사해 주신 月嵐 조종명 이사님 덕분으로 山淸을 알게되어 남명선비문화 축제에 멀리서도 계속 참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진년 7주갑(420)되는 2012년 국학진흥원 카렌다 7월호에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자료로 [송암선생 간찰]이 실렸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카렌다에는 임진년 臘月(12) 19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포수와 화약을 많이 보내달라는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 내용이었으며 수취인 未詳이라 적혀 있었습니다만 그해 12월에 국학진흥원에서 발간힌 陶山諸賢遺墨에는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게 보낸 편지로 밝혀졌습니다.

 

남명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편지와 카렌다 글씨를 비교해 보니 필체와 手決이 꼭 같았습니다. 그 편지를 우리 문중 청장년회장 김원현이 2set 板刻해서 남명기념관과 한국국학진흥원에, 제가 판각한 것은 거창 박물관에 기증해서 현재 모두 전시되고 있습니다.

 

해전 제가 2여년간 송암선생의 전쟁터를 踏査하면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겨 세계 각국의 도서관에도 보낸다는 생각으로 序文日語, 中國語, 英語, 독일어, 서반아어 5개 국어로 번역하고 일류 디자인에게 맡겨 편집비만 별도로 500만원 지급하고 2500권의 책을 만들어 배부했습니다.

 

송암 선생의 우국충정과 선비정신을 우리시대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이태근 전 고령군수께서 추진위원장이 되어 역사 속에 묻힌 의병도대장 김면 선생의 현창 사업으로 山岳戰 戰勝 聖地인 거창 우척현 전적지에 201599[김면장군 전적비]를 세웠습니다이곳은 425년전 김면 선생이 의병 2000여명을 인솔하여 호남 곡창지역으로 침투하려는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こばやかわ たかかげ)가 이끄는 왜적1500명을  물리친 곳입니다 , 

 

김면선생 전적비를 세우고 나니 智南 조옥환 이사장님께서 저의 손을 잡고 좋아하시면서 남명선생 제자 3대 의병장 중 송암선생이 묻혀있었는데 이제사 빛을 보게 되었다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국가예산과 지방예산 5억원으로 김면장군 공원에서 봉우산 정상 烽燧臺까지 송암 김면 선생의 얼이 서려있는 忠義路를 개설하고, 송암선생의 스토리텔링보드 포토죤, 송암어인 쉼터 등의 공사가 내년 연말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2022년도에 거창 김천간 직선화 도로공사가 완공되면 우척현 정상에 [김면장군 기마상]을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며,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거창에 의병장 문위, 윤경남, 유중룡, 변혼, 정용, 장응린, 박이장, 정유명, 성팽년, 김경근 등의 이름있는 의병장과 수 많은 無名 義兵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는 居昌義兵전적비를 세울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420년이 지나 없으진 전쟁터 지명이 居昌 新倉’ ‘함안 竹峴’ ‘의령 馬津이었습니다. 新倉은 김면 선생이 김천 금산에서 돌아가시고, 거창 신창에서 發喪한 곳으로 지금의 거창군 웅양면입니다. ‘함안 竹峴’ ‘의령 馬津을 찾지 못했는데, 작년 남명선비문화축제에 오는 길에 두 곳을 찾는 행운도 가졌습니다.

몇 년간 수소문 한 결과 함안 竹峴대나무밭 고개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어 대나무 ‘’고개 이다는 直感으로 지번을 찾아서 밝혔으며, ‘의령 馬津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국회도서관에서 국방부가 발행한 임진왜란 당시 전쟁터 지도에서 현재 창녕보 부근인 합천군 초계면 말징나루 즉 馬津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조옥환 이사장님과 최구식 원장님, 조종명 이사님 그리고 많은 남명선비문화연구원 임직원 여러분들과 송암김면선생후원회 임원들의 협조 덕분에 이루어 낸 성과입니다.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70일 후면 저의 나이 산수(傘壽) 80입니다. 제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매년 남명선비문화축제 행사는 천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참석하겠습니다

 

 

국회에서 愛國詩 낭송 대상을 받아 거창문화원 등 여러 곳에서 낭송한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를 여러분께 바치겠습니다.

 

     




 

*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낭송: 南齋 김재호

   

 

지금으로부터 425년전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병을 총 지휘한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다니,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아래 의병좌장을 맡은 사람은 홍의장군 곽재우였고, 의병우장은 1612년 광해군 4년부터 1623년 광해군 15년까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바 있는 정인홍이었다. 그런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다면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 준 우리 선조들의 창의정신과 선비정신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무엇을 기리고 있단 말인가 의병장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의병도대장 김면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이 현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사학자 정만진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때는 임진壬辰 1592413일 포악 무도한 왜구들이 부산을 침탈할 제, 남명 · 퇴계 양문에서 수학하신 송암松菴 김면金沔선생께서 분연히 일어나 창의倡義하시고, 만여석萬余石 재산을 군비에 충당하셨다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 선봉장 김홍한장군 8인의 친족의사. 의병장으로 현풍 곽준, 함양 조종도, 고령 박정번, 선무원종일등공신 김홍원 장군.

 

거창출신 의병장 참모장 서기 문위, 윤경남, 유중룡. 선봉장 변혼, 돌격장 정용, 군관 장응린, 박이장. 기병유사에 정유명, 성팽년, 김경근. 그리고 변희황, 신수, 오희남, 오명상, 전팔고 전팔급 형제. 

나라가 위태롭고 국왕이 파천播遷하니 군유급이신불사君有急而臣不死.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오재기독성인서야烏在其讀聖人書也라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무계茂溪에서 승첩. 합천군수로 제수되시니 교서에

양병정진즉둔적치백揚兵鼎津則遁賊褫魄하고

정진을 들이치니 달아나는 적이 혼을 잃었고,

접인무계즉유시혼강接刃茂溪則流屍混江이라

무계에서 칼을 휘두러니 적의 시체가 강을 덮었다

 

함안咸安 죽현竹峴, 의령宜寧 마진馬津, 고령高靈 개산포開山浦거쳐 성주성星州城을 탈환하고,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과 사랑암沙郞岩전투에서 적을 쳐부순 후 돌격으로 김천金泉 지례知禮 적을 섬멸하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관·의병義兵 통솔하여 금산金山 적을 토벌. 호남 곡창지역으로 침투하려는 왜구들의 야욕을 분쇄하였고, 도망가는 선산善山 적을 치려던 중 과로過勞로 병을 얻어 진중陣中에서 순국하셨다

 

~~통재嗚呼痛哉

국왕이애통하여예관을보내치제致祭하시고.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선무원종일등공신에녹훈錄勳.정헌대부이조판서로 가증加贈되셨다.

 

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

오직 나라있는 줄만 알았지 내몸 있는 줄 몰랐다는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 충의지심忠義之心 거룩하신 선비정신은 영원히 우리 겨레의 사표師表가 되리라

 

   을미乙未 납월臘月 29    남재南齋 근서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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