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rail(단궤도 單軌道) 열차에 합승한 사람들
요 1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02년 노무현 대통령선거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군이 동두천에서 군사훈련 중에 당시 중학생이던 효순이와 미선이 두 여학생이 미군의 장갑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추모 촛불집회가 전국에서 밤마다 거리마다 열리고 반미감정이 치솟아 대통령선거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신문 방송에서 온 나라가 떠들고 항의 사절단을 보내야 된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으로 수십 명의 학생이 사살되는 미국 학원에서 역대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범인을 잡고 보니 하필이면 7세 때 이민 간 한국교포 학생으로 밝혀지고…. 온 나라에 다시 난리가 났습니다, “교포사회가 미국인으로부터 상당한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젠 미국 여행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빨리빨리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참회 사절단을 파견해라”…. 신문 방송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반응이 정말로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야단을 치는 한국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범인이 7세 때 미국 건너와서 미국 교육을 받아 대학생이 되었다면 그 책임은 교육을 한 미국에 있는 것인데 너희가 왜 그렇게 야단이냐는 것입니다. ???
우리는 전체주의와 민족주의의 태도로서 하나임을 주장한 셈이고 미국은 출신성분과 관계없이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서 하나임을 나타낸 것으로 지금 생각해도 여러 가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서양에서 인식의 차이는 여러 부문에서 발견됩니다. 동양의 한방병원과 서양의 종합병원은 운영방식이 서로 다르지요. 동양은 인체를 전체적으로 상호 연관된 하나로 보아서 한 사람이 종합병원의 역할을 하지만 서양의학은 인체를 세분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서 종합병원의 기능을 합니다.
동양 특히 한국은 “우리” 속에 “나”가 숨어 있어서 “나”가 유별나면 안 되지만 서양은 “나”가 모여서 “우리”를 만들기에 그 우리 속에서 “나”가 돋보입니다. 그래서 동양은 우리라는 집단 안에서 하나의 이념으로 뭉쳐져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집단에서 다른 주장을 하면 배신자로 몰리게 되니 우리하고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옆집에 명품 냉장고가 있으면 그와 같은 것을 사야 직성이 풀리고 집을 지어도 거의 같은 색깔 같은 구조로 지으며 농촌주택은 아예 그 설계도가 정해져 있고, 그래서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에서 전체주의 일당 독재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 가능한 것도 우연이 아니어서 우리하고 다른 너는 배신자가 되는 전체주의적이거나 단일민족적 성향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떤 방식으로 하나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이 세상에서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가장 큰 문제로서 이러한 “하나”라는 문제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가 오늘 우리의 주제입니다.
성경에 독생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이 말을 우리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그런데 독생자로 번역된 원어인 “모노게네스”(헬)는 단 하나의 종류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모노레일은 복선 열차가 아닌 단선 열차이지요. 궤도(軌道)가 하나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이 아니고 한 종류의 개념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메시아)로 예수가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자신(예수)을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요17: 21-22)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처럼 성도들도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도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인지? 어떤 형식으로 하나가 되는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 주제를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실 “하나”라는 주제는 성경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였습니다. 하나였으니까 동산을 함께 거닐며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서로 다른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두려워서 숨어 있다가 종래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창3:1-24) 이렇게 성경은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완곡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부 관계로 설명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신랑이 되고 인간이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말씀(씨)이 없기에 말씀을 가진 예수님을 만나서 그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 혼인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혼인하고 나면 신랑이 가정을 이끌어 가십니다. 일심동체가 되어 내 집 문패에 내 이름이 삭제되고 신랑 예수의 이름이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남자와 여자가 합쳐서 사람이 된 것이지요, 이때 (씨를 가진)“자카르”(히) 남자와 (씨를 받아들이는)“네케바”(히) 여자가 합쳐져서 사람으로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는 돌감람나무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11:17-18)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라는 한 뿌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접붙여져서 하나가 되는 것 즉 돌감람나무의 뿌리가 잘리어 나가고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참 감람나무의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려면 돌감람나무의 뿌리는 잘려서 돌감람나무의 기능은 죽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달걀이 닭이 되려면 달걀로서 기능은 죽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써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합니다. 달걀로서 그 죽음을 죽어야 새 생명인 병아리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달걀로서 기능이 죽는 이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기 위한 좋은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는 좋은 죽음을 성경에서는 “다나토스”(헬)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21:18 - 19)
이 말씀은 베드로의 물리적인 육체가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ex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는 모습)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가진 육신적인 성향과 정열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병아리로 새 생명을 얻기 위하여 달걀로서 죽는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은 그 죽음과 같은 단어로 같은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부활이 예정된 죽음이지만 그 죽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는 심히 괴로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생존 근거가 되었던 모든 자존심과 정의감 그리고 명예를 지키려는 자기 노력 거기에 더하여 선악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총체적으로 자기 부정을 해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정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구약의 엘리사와 그의 하인 게하시 그리고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왕하 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습니다. 그 당시 강대국인 아람 나라의 제2인자로서 어마무시한 권력을 가진 자였는데 그런 그가 문둥병에 걸렸으니 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자신의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이 더 큰 상처를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갑옷 속에 감추어진 문둥병의 증상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문둥병의 흉물스러운 상처를 숨기는 갑옷을 입은 체 그 위에 안수하여 주면 문둥병이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자기를 찾아온 나아만에게 선지자 엘리사는 요단강에 가서 발가벗고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나와서 말한 것도 아니고 사환인 게하시를 대문 밖으로 내보내 한마디 전하여 주게 하고 대문을 닫아 버립니다.
당연히 나아만 장군은 분노하였습니다. 아람국의 군대 장관인 자기를 감히 문밖에 새워둔 체...... 사환을 내보내 요단강에서 발가벗고 한번도 아닌 일곱 번을 목욕하라고???? ....말도 안 되게 자기를 무시한 그 행위에 노발대발하였으나........ 결국은 부하의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를 수행한 부하 장졸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갑옷으로 감추어진 몸 구석구석에 고름이 엉겨 붙은 문둔병자의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나아만 장군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다? 그는 “나는 이제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으로 옷을 하나씩 다벗고 요단 강물에 맨몸을 잠근 것입니다. (성경은 나의 이야기로 읽혀져야 합니다)... 그렇게 발가 벗어진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어놓은 나아만에게 새로운 생명이 덧입혀진 것입니다.
내가 그런 입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충분히 이해될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달걀로서 죽고 병아리로 새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이 답례로 가져온 많은 선물을 거절하고 받지 않자 그것을 지켜보던 게하시가 떠나가는 나아만 장군을 쫓아가서 엘리사의 이름을 팔고 은 두 달란트와 갑옷 두 벌을 받아 집에 감추어 둡니다. 그 일로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리게 됩니다.(한 달란트- 대략 은 30kg 그 당시 노동자 20년치 품삯 정도의 큰 금액)
우리가 가진 공정한 거래와 정의로운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부정한 거래관계가 아닌 이상 은혜를 받았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고받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게하시가 지금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게하시는 스승인 엘리사의 처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하시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부정하게 치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게하시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의 생각은 나아만 장군의 선물을 답례로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한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 준 것은 무슨 부정한 술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답례를 받아들이는 것도 절대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스승 엘리사가 그 답례품을 받지 않는 것이 불공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게하시는 문둥병이 걸립니다.
성경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은 두 달란트를 “보상받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진 공평과 정의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정의의 기준대로 한다면 초대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스테반 집사의 살인에 가담한 바울은 교회의 일꾼으로 절대로 자격이 없습니다. 친일파 이완용이 절대로 건국공신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과감하게 청산되어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신의 위치로 옮겨져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기준으로 하나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10 :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기준을 하나님에게 허가받아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것은 폐기 처분되고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귀한 위치로 우리를 대접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될 수 있는 길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기준 안으로 들러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은 완전할 수 없어 필경은 분열하여 반목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가 운전하시는 모노레일의 열차를 타면 그때 하나가 되어집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데 우리가 말씀을 받고 골수가 쪼개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은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이 부하 장졸들 앞에서 벌거벗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벌거벗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우리는 겉치레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그래서 성도는 이 땅의 목숨(프쉬케 (헬).....자기의 생명으로(his life).....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생명력 (조에 아이오니오스)(헬)(eternal life) 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거기에 임하신다고 하십니다.
(John 12:25.) The man who loves his life will lose it, while the man who hates his life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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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늘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woongd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