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면 감천.......명심보감과 기독교.....
불의한 제판관의 비유 눅 18;1-8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이지요.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께서 ”아들이 믿는 예수를 믿으시지요“ 라고 권하면 유교와 불교와 무속을 두루 섭렵하신(?) 어머니는 ”야야 예수 믿는 거나 명심보감을 열심히 읽고 노력하는 거나 다 같은 거 아이가“ 하셨습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밝게 해주는 보물과 같은 짦은 글귀를 모은 책이지요. 대표적으로 선한 일은 아무리 작아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무리 작아도 행하지 말라 같은 경구들이 있습니다. 착한 일들을 지성으로 행하면 감천하여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심보감은 기독교와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기독교인들도 선한 일을 지성으로 행하면 하나님이 감동하신다고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명심보감과 성경은 무엇이 어떻게 다릅니까?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노력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고 훌륭한 사람...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명심보감의 삶을 살아 도덕적으로 바르게 성심을 다하여 열심히 기도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것이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성경에도 열심을 낸다는 의미와 뜻이 상통하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확증하는 것 같은 성경 구절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눅 18:1-8 (과부와 재판장 비유 개역 개정)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과부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지성을 다하여 재판관에게 매어 달린 것입니다. 견디다 못한 재판관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 줍니다. 그러니 이 과부와 같이 열심을 내고 성품을 다하여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불의한 제판관도 들어주는데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은 더 빨리 들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섭섭지 않게 정성을 다하여 헌금하고 소원 성취를 위해서 열심에 열심을 더하여야 된다고 강조합니다,.....그리고 모두가 마음으로 동의하고 그렇게 열심을 내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을 자책합니다.
여기서 이런 오해를 불러오는 결정적인 단어가 7절에 접속사인 ”하물며”입니다, 이 단어의 원어는 “데”(헬)로서 그 뜻이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있던 내용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다르게 번역된 용례를 소개합니다. 여러 구절의 뜻을 일일이 알고자 함이 아니고 “하물며”가 아니고“그러나”로 번역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dev(데)
그러나, 그리고, 지금.............신약성경에서 약 400회 사용되었다
마 2: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 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느니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 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이와 같이 성경의 다른 문장에서는 “그러나”로 번역되었는데 유독 이 문장에서만 “하물며”로 번역한 것은...우리나라에서 번역 될 당시에는 유교적이고 명심보감적인 지성이면 감천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렇게 번역하였을 것이라고 유추해 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하물며”와 “그러나”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하물며”는 앞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강조하는 것이고 “그러나”는 앞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내용을 말할 때 쓰이는 것이니 앞에 나오는 재판관과 뒤에 나오는 하나님은 반대의 입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과 하나님이 반대의 관점이라면 7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가 문제로 남습니다. (7. 하물며(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기서 밤낮 부르짖는다는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기도원에서 큰소리로 철야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막 15:34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여기에서 예수님의 소리 지르심이라는 뜻과 본문의 부르짖음이 같은 뜻으로(보아오 헬) 로서 그 문자적 의미가 예수님의 고뇌의 외침에 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이 외침은 시 22:1의 말씀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버리심이라는 의미의 비참함을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이 부르짖음은 이 세상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것에 대한 비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택하신 백성의 부르짖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짖음은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나 밤 낯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그 비통함을 얼마나 깊이 실감하고 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면서 살아야 마땅합니다. 단순히 이 땅에서 멋있는 생존을 이루기 위해서 갈급 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받은 인생이 얼마나 비통한 존재인가에 대하여 절실한 깨달음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게 되면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살게 마련이고 그런 간절한 삶에 대하여 하나님은 속히 은총을 베푸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이 섬뜩합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십니다. 말세에 믿음을 가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세라고 함은 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세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이 말세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그 수많은 교회와 신도들 중에 믿음을 가진 자가 거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영광을 얻는 생존을 가르치고 구하고 있습니다. 품위 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하여 적선(積善)하고 입신양명을 위한 노력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기 위하여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은 생존을 위한 인생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인생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롬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생존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명심보감으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생존을 위하여 아무리 작은 선이라도 행하라 그리고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버리라... 의지를 발동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도인이 되는 길이고 명예를 얻는 길이고 더 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경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말합니다. 너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빌3:20) 너희는 이 땅에 소망을 둔자가 아니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진 자이다. 너희 존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소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자기를 위한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없어졌으니 본성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착한 일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너희는 포도나무인데 포도나무가 엉뚱한 다른 열매를 맺지 않기 위하여 온 갗 노력을 다하여 겨우 포도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포도나무에는 저절로 포도가 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포도 열매 맺었다고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는 그런 본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나타난 결과가 같은 것 아닌가 하겠지만 그 방향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방향은 결국 자기에게로 귀결되는 것이고 다른 한 방향은 하나님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명심보감에는 결국 자기 명예가 걸린 것이고 자기 인품과 가문의 영광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는 없어지고 믿음의 결국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명예가 없어지는 이 허무함과 자기의 지식과 떳떳함이 전혀 소용이 없는 이 난처함을 그리고 자기의 자랑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이 비통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그러한 난처함과 비통함을 마음에 지니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가지는 영생의 소원을 하나님은 즉시 들어 주신다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성경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말씀을 결론으로 합니다,......
..........“그러나 말세에(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는가?” ...
. .......woongd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