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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회소식

좁은문............ ..왜 하필 좁은 문입니까? ..............안효영 목사,,......,,,,성경바로알기(5)

작성자woongdo|작성시간22.11.27|조회수90 목록 댓글 0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눅13 : 22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소설 좁은 문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책은 주인공 제롬과 외사촌 누나인 알리사의 사랑이야기를 제롬의 독백과 알리사의 편지, 일기 등으로 엮어 나갑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알리사는 어머니의 불륜을 보면서 남녀 간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 지나친 금욕주의로 말미암아 제롬을 정말로 사랑하였지만 결혼을 거부하고 끝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결말을 맺습니다.

 

 알리사는 이 땅에서 보편적인 사랑이나 행복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기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따르는 삶에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알리사가 남긴 일기를 통해 제롬은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보다 큰 기독교적인 완성(어디까지나 알리사가 스스로 결단한 것으로 개인이 감당하기는 힘든 좁은문을 비유).....더 좋은 것을 위하여  인간적인 사랑을 포기했음을 깨닫습니다.(소설의 초반부에 목사님의 좁은문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있는 제롬과 알리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유명세를 탄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은 다양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저자가 기독교 신비주의 신앙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여주인공 ‘알리사’의 삶을 통해 기독교가 실패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도 있습니다. 저자인 앙드레 지드가 비록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이었지만 그는 기독교의 실패를 이야기한 비 기독교인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 작품이 기독교의 신비주의를 비판한 것이냐...... 혹은 저자가 신앙인이었느냐를 가늠해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책 제목인 좁은 문은 성경에서 인용된 것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어떤 문인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왜 하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였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 우리의 숙제입니다.

 

 좁은 문에 대하여 오늘 날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르면서 소유를 즐기는 행복과 쾌락을 누리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르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로 가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표면적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어 교회에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내가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 인격적인 소통을 가지는 그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좁은 문의 뜻을 훨씬 더 심도 있게 알아야 합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안다가 아니고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성경에 대하여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그 당시 유대인들과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인 것이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이나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려 져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여행하시다가 어떤 유대인으로 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구원 받는 자가 적습니까....구원에 관하여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나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탁월한 유대인이니까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그 숫자의 많고 적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눅13 :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왜냐하면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은 문입니까?

 

 넓은 문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옳은 문이어서 인간이 좋아하는 문이지만 좁은 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힘쓰고 노력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행위들을 해야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데 보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안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헌신 봉사나 행위에 열심을 내고 그것이 자기 자부심이 되고 믿음의 실적이 되기도 하는 그런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밤늦게 일하여 아무리 피곤해도 다니엘 연속 새벽 기도는 반드시 참석하여 발도장이라도 찍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열심히 좁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옳아 보이고 좁은 길을 가는 신실한 사람으로 보여서 모두가 좋아합니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사람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확장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이루는 것을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리고 수련과 열심을 통하여 자기 가치를 스스로 높여 자기 의를 이루는 것은 인간으로서 큰 덕목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거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선호하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러한 지극정성으로 쌓은 자기 명예와 덕목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쌓은 자기 의와 공로를 하나님의 의보다 더 높고 귀한 것으로 생각하여 적어도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넉넉하게 받을 수 있다고 자아 도취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중세 카톨릭의 구도자들도 고행으로 통하는 좁은문을 강조했습니다. 육신의 모든 욕구를 죄악시 여기며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으로 들어가 고행을 자초했습니다. 천주교 뿐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금욕과 고난의 길이 좁은 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좁은 문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 육신적인 고행과 고난은 좁은 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생명의 문은 좁은 문이고 협착한 문이라고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기에 좁고 협착한 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롬1:17)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 24-25)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자는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 의와 공로가 쌓인 심령이 부요한 자들이기에 십자가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19:23-24)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단순히 물질적인 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지만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었고 신약의 아리마대 요셉도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많고 적음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부자는 재물이 많은 부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선한 행위를 함으로서 자기 의와 공로를 쌓은 업적이 많아 심령이 부요한 부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부자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마19:20) 이 청년은 율법을 지킴으로 쌓은 자기 의와 공로를 다 버리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재물을 다 팔고 오라는 말씀으로.....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뜻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떠났습니다.

 

  따라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하신 것은 인간이 쌓은 자기 공로와 의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자기 공로와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을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본문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고 자신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하는 말씀이고 오늘날로는 교회에 열심을 내고 있는 저와 우리 모두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something이 되는 길과 nothing이 되는 두 갈림길이 있습니다.

....... 자신이 something이 되어 보고자 불같은 열심과 노력으로 업적과 공로를 쌓아 타의 모범이 되고 자부심을 누리는 길을 도모할 것인가....아니면 반대로 자기 자랑과 자기 의와 자기 업적을 하나씩 덜어내어 던져 버리고 자기는 nothing이 되고 오직 주님의 긍휼과 은혜만이 드러나는 길을 모색할 것인가....넓은 문과 좁은 문.... 어느 길이 쉽고 어느 길이 어려울 것 같습니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woongdo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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