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카인의 후예(後裔)”
창 4: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카인의 후예”는 황순원(1915년-2000년)의 소설로 같은 이름으로 영화로 상영되기도 하였습니다. 소설의 주제를 강하게 암시하는 “카인의 후예”라는 제목에서 카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의 첫째 아들로서 그는 아우인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인물입니다. 모든 인간은 카인의 후손이라는 뜻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해방 직후 쏘련이 진주한 평안도 순안 땅 양짓골에 몰아닥친 공산주의 방식의 거센 토지개혁 물결 속에서 어제까지 동내 어른으로 존경받든 지주(地主)양반이 하루아침에 인민위원장이 된 자기 집 머슴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오랫동안 지녀 온 풍속과 관행이 갑작스럽게 부서져 버리고 친밀하던 모든 인간관계가 순식간에 틀어져 적대 관계로 바뀌어 폭력과 살육이 자행되었다.
이렇게 양짓골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념의 도입으로 인해 형제와 다름없는 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질투와 증오로 연쇄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이러한 범죄는 이북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우리 민족 안에서 빚어진 증오와 살인이었다.
이런 비극과 범죄는 카인과 아벨, 아담과 이브에게로 소급되어 인류의 원죄와 연결됩니다. 소설 “카인의 후예”는 그렇듯 해방 직후 평안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인류의 원죄까지 연결시키고, 또 거꾸로 인류의 원죄라는 거대한 주제를 평안도 시골 마을의 조그만 사건으로 상징화시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으신 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글의 주제입니다.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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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는 가인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목축을 하는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더니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았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제물을 거절당한 카인이 분하여 동생 아벨을 쳐서 죽입니다.
왜 하나님은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제물의 내용 때문으로 아벨은 속죄의 상징으로 피 있는 짐승을 드렸으나 카인은 그러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의견은 정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아벨은 정성을 다하여 양의 첫 새끼를 드렸고 카인은 자기가 지은 농산물 중에서 대충 드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정당성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자기가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그 생산물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둘 중에서 딱히 누가 더 정성을 드렸느냐를 판단할 만한 근거로 삼기로는 너무나 미흡한 기록뿐입니다. 또 어떤 이는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이니 피조물이 판단 할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사건의 상징성이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의도가 궁금해지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믿음이 있었고 카인은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제물을 받았느냐는 제물을 중심으로 말하지만 성경은 제물을 드린 사람이 먼저이고 제물은 그 다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아벨을 의로운 자라고 하고 재물만 받은 것이 아니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아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를 추적해 보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렷다고 하고 곧 이어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이 어떻게 성장하여 가는지 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우여 곡절이 많았지만 죽은 자와 방불한 10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약속대로 겨우 이삭이라는 아들 하나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거반 20세까지 애써 키워 놓으니 이제 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후손이 달랑 그 아들 하나뿐인데 그 하나있는 이삭을 번제(동물을 불에 태위 드리는 제사의식)로 드리라니 기가 막히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을 하자면..... 그 전에 아브람이 여러 번 하나님께 질문도하고 따져보기도 하였듯이 이 장면에서도 아브라함은 이 기막힌 하나님의 말씀에 한번이라도 따져 보는 것이 순리입니다. 하나님 ....하나뿐인 아들을 그렇게 번제로 희생시키고 나면 모래알 같은 후손은 그만 두고 단 하나의 후손이라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기라도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브라함은 바보같이 두 말없이 순종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 까요
사실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때부터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인 모래알 같은 후손을 얻기 위하여 무진 노력을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목숨은 보존해야하기에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두 번 씩이나 거짓말 하고 하인 중에 후계자를 만들려고 고집도 부려보고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을 낳기까지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100세에 아들을 낳아 키워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근 20년 가까이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게 키운 이삭 하나로 인하여 모래알 같은 후손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 힘과 노력으로는 거대한 후손들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가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런 자기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것이지 자기라는 존재는 증기(蒸氣) 같이 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안 것이지요...아브람 자신이나 아들 이삭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것이구나......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가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생각과 노력과 독립심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과 그 생각이 같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독립성이 소멸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그것이 믿음이라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아벨을 카인보다 낳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아벨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면 “나”라는 존재는 아침 안개와 같아 소리 없이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자기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하는 믿음을 담아 제사를 드린 것이고 ...카인은 그런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카인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그 결과물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즐겁게 열납하여 주시고 칭찬하여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다음 본문을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가인이 안색이 변할 만큼 분노한 것은 자기가 최선을 다한 것이 무시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진심을 다하였는데 ...나의 최선을 받지 않는다고요...왜 나의 노력과 나의 최선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카인은 정말로 진심을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충 대충 제물을 드렸다면 그렇게 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상대방을 위하여 정말로 최선을 다한 그 자존심이 무시당하였을 때 가장 큰 배신감과 분노를 나타내게 됩니다. 그의 분노는 아벨을 죽이고 나서도 사그러들지 않습니다.....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아벨과 카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두 가지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카인처럼 자기 힘과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힘과 능력을 주셨으니......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여 근사한 일을 하였는지 보아 주십시오.....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의 일조를 이렇게 정확하게 내고 있습니다.....자신만만한 그런 태도에 대하여 지금 하나님은 그들과 그 제물을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눅18:11-12)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간 세리는 성전의 저 뒤 끝에서 감히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울먹일 뿐입니다.(눅18:13-14) 아벨은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헛된 죄인에 불과합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하나님은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제물을 받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되지 못하는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벨의 믿음입니다. 그가 그런 믿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또 다른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도서는 헛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자체가 순식간에 없어지는 안개같고 바람처럼 날아 가버리는 그런 존재라는 뜻입니다......카인의 손에 죽은 동생 이름이 아벨인데...그게 헛되다할 때 쓰여진 단어와 같은 어원입니다...같은 어원인데 한쪽은 원음에 가까운 아밸로 읽고 한쪽은 의미에 가까운 헛되다 로 번역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되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나는..훅 불어 순식간에 없어지는 바람 같은 텅 빈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는 뜻입니다.....그래서 아벨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인생은 텅 빈 것으로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하는 믿음으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게 아벨의 신앙이었고 인생관이고 믿음이었습니다.
...카인은 소유하다. 점령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독립한 존재로서 자기가 중심이었습니다.....카인의 주장은 내가 노력하고 내가 진심과 정성을 다하여 드린 것을 하나님 당신도 옳다고 동의 해주고 받아주셔야 하는데 왜 받아 주시지 않습니까? 하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은 악한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비록 진심과 정성을 다하였지만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대척점에 두고 선악을 판단하는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카인에게 죄가 너의 앞에 엎드려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소설 카인의 후예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자들의 결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그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경쟁합니다. 이렇게 인간사회에는 자기들의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하여 편을 따라 위계질서를 만들고....개개인의 가치는 그 위계질서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합니다. 그러니 그 위계질서의 유익과 유지를 위해서 처음에는 한 사람 그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 시작하고 형태를 달리해서 권력투쟁과 편견과 증오 그리고 전쟁과 살육이 계속된다는 것을 소설 카인의 후예가 고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성경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하여 이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과 그 독립심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인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성경의 첫 머리에서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요하시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당신이 마음에 드는 데로 선택하라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 함께 계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처럼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긍지로 삼고 있는 독립성을 소멸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독립성이 소멸되는 만큼 그 자리에 예수의 생명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독립성이 소멸되어 예수와 하나가 되어나가면 ....그렇게 변하여 가면......예수의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너의 독립성이 소멸되어)너희도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느니라.”(요17:23)......“우리(성부.성자.성령)와 같이 하나가 되는 그 울타리” 안에서 예수의 생명력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