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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회소식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안효영목사 ...............성경바로알기(13)

작성자woongdo|작성시간23.06.28|조회수108 목록 댓글 0

      책의 제목이 혼돈스럽습니다

                                                                              눅10 : 25-37 사마리아 사람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는 프랑스 심리학자 로랑 베그의 책으로 이 책의 제목은 우리의 상식과 윤리 체계를 뒤엎는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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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만의 역사로 형성된 인간의 자아는 우리가 가진 도덕적 가치관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러한 자아의 가장 중대한 역할은 자기 자신이 이 사회에서 적어도 평균 이상의 도덕 수준은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자기의 가치를 높게 보아 주는 정보에는 유독 관심을 두지만 자기의 결점이 지적당하거나 개인적 한계를 강조하는 정보는 슬쩍 넘어가려 하고 남과 비교해서 무언가 부족한 면이 있어 보인다 싶으면 그러한 비교를 재정의(再正義)하고 새로운 비교기준을 만든다.

 

 그래서 단체 작업에서 자기 공헌도를 과대평가하게 되는데. 21조의 작업을 평가받을 때 자기 조가 상위권에 들어가면 그 공()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하위권에 들어가면 자기 짝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평균에 머물면 그래도 자기가 있어서 그 정도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여러 번의 실험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보다 조금 열등한 사람들과 비교함으로 희열을 느끼고 유명인이나 큰 성공을 거둔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몰락할 때 비슷한 희열을 느낀다. 독일어에는 이런 현상을 지칭하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중심성이 강하여 자신은 남들보다 편견이 적고 다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객관적인 실험통계를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성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의 도덕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정받게 되는데 "내 행동이 도덕적임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남들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구별"해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럴 때 인간의 기본적인 인지능력의 한계 탓에 자신의 상황은 쉽게 이해하지만 남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동은 "상황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남의 비도덕적 행동은 "그 사람의 인성 탓"으로 돌린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기준에서 말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도덕성을 남들보다 우위에 두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상대방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여기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폭력이 모두 정당하다고 여기게 되며 설령 그 비난과 폭력이 도덕적으로 어긋난 것일지라도 자신에게는 관대하므로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분명 처음에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행동했을지라도 이러한 "남들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결국 나쁜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사람이 도덕적인가? 라는 단원에서 인간은 채워질 수 없는 인정욕구의 욕망을 가지는데……. 사회집단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때문에 사회가 만든 질서와 체제에서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비도덕적인 일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긍정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소외를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로랑 베그가 주장하는 가혹한 역설에 따르면 자신을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도록 지시받은 사람일수록 타인들에게 냉정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보이며 이들은 기부나 자원봉사에 훨씬 소극적이었고 이 '도덕의 화신'들이 기부한 액수는 다른 사람들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는 다양한 참가자들의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p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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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인간의 끊임없는 도덕적 딜레마에서 인간의 본성과 도덕 그리고 인간 자체를 둘러싼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수많은 사례를 소개하면서 선과 악의 뒤편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책의 원제가 선과 악의 심리학입니다

 

책을 열면 램불란트의 선한 사마리아인을 그린 삽화를 만납니다. 그 삽화를 설명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한 비유는 남을 돕는다는 행동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저자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성경은 인간의 도덕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29. (율법사가)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중략.....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10; 25-37)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도덕적 행위의 모범답안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아량과 도덕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비유는 기막힌 반전의 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오히려 율법사에게 질문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묘하게 율법사와 강도 만난 자를 같은 처지에 두셨습니다. 율법사의 이웃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동일하게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사 너는 지금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처지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거반 죽은 자와 같아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 2:1)

 

 이 비유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성경의 대 주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비유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도덕적인 수준이 평균을 넘는다고 생각하기에 당연히 어떻게 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에게는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거반 죽은 자와 같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하나님의 은혜(자비)를 받을 수 있고 그렇게 은혜를 받아야 비로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개나 돼지처럼 취급당하는 극심하게 왕따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이 박해를 받은 것같이 예수님도 유대인으로부터 귀신들렸다고 왕따 당하며 박해와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비유에 쓰인 자비라는 단어는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하신 것으로 추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두 가지 message를 주십니다.

먼저 인간은 진정한 도덕적인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다음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자비로 많이 회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자신을 앞세워 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 하나님 밖에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망 없는 시도를 하여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만들기 위하여 인간은 사랑과 도덕과 윤리와 평화를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실제 인간의 역사는 가난, 야망, 전쟁, 매춘, 마약, 계급, 노예, 살인 등으로 참혹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휘발유와 전기 같은 energy를 넣어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의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아가 만들어 내는 잘못된 연료를 넣고 달려왔고 또 달리려 하고 있습니다. (C.S. 루이스)

 

자아 중심성의 도덕적인 인간이 가진 자존심이라는……. 여리고()은 성경에서는 무너졌는데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그 자존심이라는 성()은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왜 그 성()이 무너져야 하는지 그 사실 자체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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