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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회소식

술 취한 기독교가 세상에게 술 깨라고 말하다.........안효영목사.......성경바로알기 (15)

작성자woongdo|작성시간23.09.14|조회수77 목록 댓글 0

 지금  술 취해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행 2:1-13, 벧전 4:7

 

 술 취하지 말라....독주를 마시지 말라! 이같이 성경은 술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기독인들이 단순히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니 정결한 삶을 위해서 술을 멀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술 취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등 사도들이 처음으로 성령 충만하여 오순절에 나왔을 때 모든 사람이 당황하여 말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많은 사람이 그들은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며 말했다..(2:1-13)

 

 세상과 기독교는 정반대의 개념을 가졌음이 분명합니다. 세상은 베드로에게 너희는 술에 취했어라고 말하고  베드로는 세상을 향해 그러므로 너희(세상)는 술 깨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키엘케골이 기독교를 변증한 내용을 중심으로 무엇이 술 취하고 술 깨는 것인지와 부수적으로 따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어떤 뜻이 있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 오늘 우리의 주제입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여기에서 "정신 차리고" 와 "근신하라"는 헬라어 원어 솦흐레내오넵호의 뜻이 술에 취하지 않은, 술 깨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세속주의를 술 취했다고 하고 세속주의는 기독교가 술 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속주의는 기독교에 합리적으로 되라! 정신 차려라! 술 깨라고 조롱하고 기독교는 다시 세속주의에게 말합니다. 합리적으로 되라 정신 차리고 술 깨라……여기서 세속주의라 함은 세속주의화 된 기독교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정반대의 관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한쪽이 선이라고 하고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악이라 하고 이기심이라고 하며 한쪽에서 술 취했다고 하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술 깨어 있다고 합니다……그러니 술 깬 세상(?)에 대하여 술 깨라고 충고를 한 사람은 분명히 술 취한 사도들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술 깼다는 것은 분별과 상식, 현명함 등이며 이에 반하여 술 취해있다는 것은 열정과 모험으로 세상에서 근사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모든 확률을 포기하고 모험을 즐기는 광기입니다.

 

  바울은 당시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이 죽인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 온 유대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저 바울은 혹세무민하는 염병을 옮기는 자이니 죽어 마땅하다 해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26:1-28)

 

 생사가 달린 재판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바울이 더 강하게 주장하니 그를 불쌍히 여긴 재판장이 바울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리칩니다.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지금 세상은 바울에게 네가 미쳤구나.너는 지금 술에 잔뜩 취했어 그러니 술 깨야 한다고 충고하고 바울은 정반대로 세상을 향하여 당신들은 지금 술 취해있으니 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우리 인생의 소원을 빌면서 그것이 반듯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술에 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적인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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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자기 소원이 반듯이 성취될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인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술에 취한 사람입니다기독교 안에서 분별과 상식 현명함을 추구하는 것은 취기입니다. 그것들이 술 취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인간이 보기에 그럴듯한 것만 신봉하니까 그래서 술 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술 깨는 것입니까?

자기 지식 안에서 정신 차리고 자기 자신이 되기.... 그리고 무한히 무조건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서 무(nothing)로서……. 그분 앞에서 정신 차리기입니다……. 조금 어려운 문장이 되어 버렸지만, 이것을 술 깬 것이라고 합니다

 

 복잡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 내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어떻게 하는 것이 정신 차리기인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지하게 살아가는 것이나 혹은 자기 자신을 오해하여 자신의 능력 같은 것에서 맹목적인 자신감으로 모험하는 것은 정신 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술에 취해있는 것입니다.

 

 또한, 친밀하고 익숙함으로 살아가는 것 즉 능력과 재능, 자격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정신 차린 것이지만 기독교 관점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럴듯한 곳에 이르게는 하지만 거기에는 생명(발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럴듯한 곳에 이르는 그러한 길은 점점 더 술에 취하게 하는 길입니다.

 

 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만큼 크고 화려한 그럴듯한 교회 건물을 건축하여 놓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는가를 보십시오감격하면서 예배를 드리며 능력과 재능으로 또 가능성으로 세상을 이겼다는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러한 모든 일은 집단으로 술에 잔뜩 취한 것입니다.

 

 또 한 개인의 신앙에서……. 받은 은사의 경험을 자부심으로 삼고 경쟁에서 이겨 그럴듯한 높은 곳에 이르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법에 따라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서 패배자가 되는 자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17:1-11)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는 세상에서 이기고 승리한 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숭배이고 독주를 마셔 술에 심하게 취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맞서 투쟁하기는 커녕  육신을 드려서 죽기까지 하는 것…….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무(nothing)의 상태.... 이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이 드러내 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 성품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기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곳을 차지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은 선과 악을 공평하게 혼합합니다. 이러한 가능성에 바탕을 둔 노력과 익숙함이 깊을수록 그것은 참 자기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이기심에 더 가까워지는 이것을 세상은 술 껬다고 하고 기독교는 술 취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른바 성화(고상한 인격자) 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성경은 지지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멀어져서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술에 취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무조건 사로잡히는 것을 세상은 술 취했다 하고 기독교는 하나님께 무조건 사로잡히는 것 만이 술 깨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은 난관에 봉착합니다왜냐하면, 현실에서 완전히 무조건적이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조건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술 취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것이 무조건적입니다……. 자기가 술 취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술에서 깰 수 없기 때문이지요....먼저 술 취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한 다음에야 술 깰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무조건적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술에서 깼다는 것은 자신이 분명히 술 취해있구나 하는 자각(自覺). 즉 자신의 상태를 앎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자기 자신과 아주 가까워질 수 있고 이렇게 자신을 알고 자신이 이해가 되면 그 이해가 바탕이 되어 술 깨는 자신의 새로운 행위가 창출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키엘케골은 대단히 중요한 우리가 아주 분명하게 해야 할 또 다른 차원의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는 것은 힘이고 기쁨이지요. 어떤 지식인도 어떤 교양인도 무엇이 옳은지에 대하여 무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에 부응하여 행동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옳은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그것을 행하는 것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통탄할 오해입니다. 그것은 교활한 조작이며 술에서 아직 깨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약2:17)

 

 그래서 우리는 다음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극심한 무지로부터 명확한 이해까지도 무한히 멀지만 가장 명확한 이해에서부터 그에 부응하는 행함까지가 무한히 더 멀다. 전자가 정도의 차이라면 후자는 본질적 차이다”.

 

...지식을 지향하고 있는 자기의 태도는 자기 삶의 내용과 열정 그리고 이기심을 다루지 못하여 자신을 변하지 않는 그대로 두지만. 자기의 행위는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행하여야 할 다른 차원의 노력입니다. 믿음이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큰 기쁨이지만 그러나 그 기쁨은 자기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알게 된 그것을 행할 때 비로소 자신이 변화되어 술에서 깨게 됩니다.

 

 가능성에서 기독교는 아주 쉽습니다…….할 수 있다는 것을 단지 설명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몹시 어렵습니다. 단지 어떤 유능함만으로 기독교를 전하는 설교를 하거나 들을 때……. 그것뿐임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에서 그는 명예를 얻고 존경받고 사랑받고 거의 우상화 됩니다.

 

 가난에 대한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 것으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감동하는 그 순간부터 설교자는 부자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그들은 함께 술 취하여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그 지식에 취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삶의 본질(실제의 자기 모습)과 동떨어진 자기 지식에 만족합니다.  이 잘못된 자기와의 관계를 고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지식에 비싼 값을 매겨서 점점 더 자기 지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내면화되지 못한 외면화된 그 지식으로 사람들은 자기 배역을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심지어 설교자가 되어도 자신이 배우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된 것을 자랑합니다. 술에 만취한 것입니다. 그렇게 술 깨지 않고 훌륭한 배우가 되어 영향을 끼치게 되면 함께 술 취한 무리가 되고 맙니다. 인생을 연극으로 살면 공허함만 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망령된 것이라고 하고....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5:11)고 경고합니다.

 

 오늘 키엘캐골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술 깨게 되는 첫 조건은 정말 술 취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단독자가 되어 하나님을  만남으로. 술에서 깬 자만이 자기가 이해한 지식. 그것을 삶에서 표현하여 행할 수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 ..........우리 주님의 깊으신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woongdo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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