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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회소식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안효영 목사.............성경바로알기(18)

작성자woongdo|작성시간24.01.28|조회수110 목록 댓글 0

 우리나라에서 자식 사랑은 대단합니다.

대학까지 학업은 물론이고 결혼 그리고 집 장만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손주들 돌봐주는 일까지 합니다

그러나 미영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는 우리와 매우 다릅니다. 그 나라에서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독립을 거의 강요하다시피 합니다. 서구문화의 습관이 그렇습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대부분 학생이 상급학교 진학 여부와 관계없이 자율권을 얻는 대신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는 방향으로 내몰립니다.

 

 이렇게 독립을 먼저 훈련시키려는 서양 부모와 나이에 상관없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응원하는 동양 부모. 어느 쪽이 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독립을 일찍이 요구하는 서구사회는 자식들의 노후 부모 공양의 의무감이 희박하고 동양에서는 노후의 부모를 공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각 문화의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이치로나 성경의 이치로나 사랑과 독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독립에 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 ......(22:37-39)

 

 우리는 사랑이란 것은 내가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이 독립해야 가능한 일이란 것을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 인간의 성장 과정은 독립하는 과정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3-4세 쯤 되면서 부터 모든 일을 내가 할 거야하고 고집 피우는 것은 나는 독립하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납니다. 사춘기라는 것은 지금까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든 사고방식을 심리적으로 독립하여 나가는 과정입니다. 독립하려니 지금까지 자기가 제일 의존해 왔던 부모한테서 떨어져 나와야 독립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에게 이유 없는 반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부모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이 성공하지 못하면 한평생 부모 의존성으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이유 없는 반항의 기질로 평생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하게 됩니다.

 

 결혼한 30대 남성이 출근할 때마다 어떤 색의 넥타이를 맬 것인가를 매일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봐야 비로소 결정하는 남자.이렇게 정신적으로 개인이 독립하지 못하면 가정을 꾸려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혼이 많은 이유가 개인이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서로가 너무 의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자 있어도 얼마든지 기쁘고 유쾌하게 살 수 있는데. 다른 한 사람하고 같이 살면 더 기쁘고 더 풍요로울 것 같아서 결혼하는 것이지. 나 혼자 사는 것이 외롭고 힘들어서 나의 힘이 되어줄 어떤 한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다면 그 결혼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점이 있는데요. 이 독립이란 것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독립과 독립이 균형점을 찾지 못하여 충돌하기 시작하면 개인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독립의 이중적이고 심층적인 깊은 뜻을 모르면 우리는 스스로 갈등과 분쟁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독립성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스스로 독립하기 위하여 땀 흘려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명예를 얻고 거대한 문화와 문명을 일구어냅니다. 그렇게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다른 동물에는 없는 인간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립이 본성이 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2:37-39)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유대인들은 1년에 한 번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신명을 다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떻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바벨탑같은 어마어마한 교회건물을 건축하는 인간의 노력은 그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 없이 우리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고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 편에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 14; 21, 23.)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말 한대로 따라서 하면 아버지 하나님도 너희를 사랑할 것이요 우리가 너 안에 들어가서 거처를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명료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가 어떻게 말씀하였는지를 보고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이 하신 대로 따라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할 수있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의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찾아봅니다. (6:38)(5;3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자기 꿈과 독립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반대로 자기 독립을 포기하시고 전 생애를 아버지께 의존하여 그 뜻을 따른 것이라고 하십니다. 낵타이 하나도 자기 스스로 고른 것 없고 다 어머니가 골라주신 것이란 것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참으로 무기력하고 마마보이 같은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소원과 꿈을 버리라고 하면 난리가 납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내 꿈을 실현하며 살아야지 무슨 소리냐 하지요. 인간은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금 말씀은 정 반대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 우리가 독립적으로 예수를 위해서 위대한 공헌을 하는 그런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자기가 독립된 주체이지만 자기의 그 독립성을 소멸시켜나가는 것입니다. 독립성을 소멸시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자기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 nothing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더 큰 희생을 하여드리고 얼마나 더 많은 봉사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그렇게 큰일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 내 마음속에 자랑할 만한 것이 한 톨도 없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nothing이 되게 하여 주십시요하고 기도해보신 적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십니다...그 말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 맞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요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 봅니다

....굉장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something이 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nothing이 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감탄하는 우아한 백합꽃 같은 인생으로 사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길가에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에 때로는 밟히기도 하는 흔한 들풀 같은 인생으로 사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아 놓고 그 일로 얼마나 뿌듯하게 생각하는가가 아니고 진실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네가 얼마나 내 앞에 항복하였는가. 어느 부분만큼 항복하고 있는가. 항복한 그 부분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식으로 말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입니다. 죽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바울은 죽지 못하는 자기 자존심을 껴안고 얼마나 울면서 기도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물어보십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너는 죽어지지 않는 자존심을 붙들고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저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자존심과 독립심 그리고 자아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모든 자기 자랑을 죽여나가는 바울의 방향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4:21)

 

그 예수님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6:38)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신 예수님은 아버지를 위해서 살아간 것입니까,,, 아버지로 사신 것입니까,...자기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수 없다고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된 것입니까....아버지로 사신 것이 맞지요....그래서 자기가 죽어 없어진 예수님은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이 우리보고 자기가 살아간 대로 사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본받으려는 우리는 예수를 위해 사는 것입니까? 예수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질문이 좀 당황스럽습니까?

 

우리는 가족을 위해서 살아가십니까. 가족으로 살아가십니까. 아내를 위해서 살아갑니까, 아내로 살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기 아닌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라고 하심은 사람에 대하여 독립하여야 하지만 그 독립을 넘어서서 이웃앞에 자기 자랑이 없는 사람이 될때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래되어서도 만족이 없고 내재적인 갈등이 남아 있는 것은 예수를 위해서 살려고 하였지, 예수로 살아가 보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우리 가정과 이웃에게도 가족을 위해서 살려고 하였지 가족으로 살아 보지 않았기에 갈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예수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예수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을 위해 살지 말고 가족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려면 자기가 길가의 들풀같이 때로는 남의 발에 밟히기도 하는 nothing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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