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이야기입니다. 입으로는 예수의 말을 전하고 자기 삶은 공자 말을 듣고 사는 목사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유교 전통에 열심인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제사를 꼭 한밤중인 새벽 1시에 지냈습니다. 긴긴 겨울밤에 온 식구가 얼마나 힘든지 몰랐습니다. 음력으로 그날 그 시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그 날짜와 시간까지 지키는 것을 끝까지 고집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유교적인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인데요…. 유교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특히 사후에 효도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효도하고 장유유서의 질서를 잘 지켜 형제와 화목하는 예(禮)를 잘 지켜나가면 후손이 복 받고 나아가 이상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유교적인 세계관입니다.
이처럼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世界觀, Worldview)으로서 자기 인생을 그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을 종교적으로 혹은 과학으로 바라보든지 모두 세계관의 일종이라고 설명합니다. 별생각 없이 주위에서 주워들은 소리도 세계관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야”…. 행복하게 살면 돼....라든가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면 돈을 잘 벌어야 해”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버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 것 그것도 세계관이지요...그러므로 각자가 가진 세계관을 따라서 인간은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은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개인의 세계관은 환경과 사람들의 관습에 의하여 자기도 모르게 습득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러한 세계관을 습득하려는 의도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으나 자기가 태어난 사회집단의 전통과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입니다...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자기의 세계관에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부모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 시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각인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론적으로 학습된 교리나 철학이 세계관이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이럴 경우는 학습된 내용이 내면화 되어 모국어같이 무의식적인 체질이 되었을 때를 자기 세계관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내면화되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머물면 환경과 처지에 따라 행동의 일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무대에서 연기하는 연극배우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이 세계관을 근거로 모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믿음이지요....그래서 우리는 늘 믿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세계관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초신자일 때 펄시콜레 박사의 내가 본 천국이란 책을 읽고 이분은 대단한 믿음을 가지신 분이시구나 하고 생각했고 국내에서는 신유의 은사를 베푸시는 이름난 분들이나 큰 교회의 담임목사 같은 분들은 정말 믿음의 역군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믿음을 흠모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천국을 다녀오신 분들도 많고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런 분들의 믿음이 전혀 그렇지 않고 정반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노후 삶을 보기도 하고 성경말씀에 새롭게 보여지는 내용들도 있고 새롭게 깨달아진 말씀들도 있어서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당시의 일들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은 현대 사람들이 체험한 그런 정도의 기적이 아니라 훨씬 고차원적인 기적 이야기로 가득하지요....최소 3년동안 예수님과 같이 날마다 기적을 체험했을 것입니다....베드로는 물위를 직접 걸어본 사람입니다. 그들은 귀신 쫓는 일에 선수들이기도 했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때 그 일을 옆에서 거들은 장본인들입니다. 이렇게 이적과 기사를 현장에서 보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 기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미리 알려 주기까지 했는데도 예수님이 잡혀가자 베드로는 그 예수를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하고 그 후에 그들은 다 흩어지고 옛날 고기잡이하던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믿었습니까.....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으면서 부터입니다.
그 후에 이들의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제자들의 세상을 보는 태도...세계관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신상의 불이익을 받을까 봐 제사장 앞에 쩔쩔 매든 그들이 너무나 당당하여진 것입니다. 유대교 세계관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뀐 것이지요......유대교 세계관이 무엇입니까 ....유대민족이 다윗왕 시대에 누렸던 시온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지요....제자들이 누구가 예수님의 우편에 않을 것인가를 가지고 다툰것이나.....배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로 온 로마군인의 귀를 칼로 자른 일 등은..... 다 예수님을 보호하여 다윗 왕 시대의 영광을 재건하자는 노력의 일환이고 그것이 시오니즘 유대교 세계관입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단체인 열심당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유대의 민족문제를 넘어서 온 인류를 향한.... 죄 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뀐 것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여기까지 동의가 되어야 합니다....제자들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데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믿음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따르고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 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고백도 하고 귀신도 쫏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참 했습니다...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습니다.....왜 예수를 그리스도로믿지 못하였습니까...
제자들은 시오니즘의 유대교 세계관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알기 전에 자기가 신봉한 세계관이 바뀌기 전의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한다면 나중에 세계관이 바뀌어진 믿음이 진짜 믿음 즉 행함이 수반되는 참 믿음이라고 성경이 설명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유대교 세계관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문화에서 비 의지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생득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유교적인 전통과 관습에 묶여 있어서 그것이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에서부터 설명합니다.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 거기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일들을 많이 체험합니다....그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건 모험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것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지 않습니다....그 보다 한참 후에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갈대아 우르에서 가졌던 자기 세계관을 버리고 나서 창세기 15장에 가서야 비로소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세계관은 어떠한지를 돌아보겠습니다…. 서양과 동양을 비교합니다...동양은 수직 사회이고 서양은 수평사회라고 합니다....음악을 예로 들어 봅니다.
전통음악인 국악 특히 판소리는 화음이란 게 없고 당대의 고수인 명창과 같은 소리를 내는 수직적인 구조입니다......그런데 서양음악에는 화음이란 것이 있어서 테너 베이스 소프라노 엘토들이 수평적으로 옆의 사람들과 얼마나 하모니를 잘 맞추어가느냐가 관건입니다....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요.
이처럼 가족구조에서도 서양은 수평구조입니다....부부가 중심축입니다.....자녀들은 성년(20세전후)이 되면 독립하여 나가는 것이 원칙입니다....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개념이 없고 대신에 노후에 자식들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개념도 없습니다. 자기들 대에서 끝나는 것이지요....세대가 단절성입니다. 그래서 기부문화가 성행합니다.
그러나 우리 유교문화의 가족구조는 수직구조로 특히 부자 중심축입니다.....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가는 것이지요...그래서 남아선호사상이 있습니다...딸을 낳은 가정은 아들 낳을 때까지 낳습니다.....재산도 다 아들에게 상속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교의 가부장제에서 가부장은 그 집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지요...그리고 그 가부장의 권한을 아들에게 대물림하는 것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옥과 전답을 대물림하고 회사도 대물림하고 더 나가서 교회도 독단으로 운영하다가 대물림합니다....자기 것이니까요...거기에 더하여 나라도 대물림하는 것이지요....그렇게 독단적으로 운용하고 대물림하는 것이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우리도 대체로 허용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발하지 않는 이유는 나도 내 자식들에게 그렇개 하고 싶은 유교적인 세계관이 체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교적이고 진화론적인 세계관은 우리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유전인자처럼 되어서 그런 세계관이 옳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계관은 우리 마음의 무의식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의 사회활동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것은 마지 베드로가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 입으로 분명히 고백했으면서도 베드로는 자기가 가진 유대교의 세계관을 벗지 못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문제로 돌아와서 유교적인 세계관으로 자기가 주인으로 군림하든 교회를 대물림하는 목사님들을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해야 합니까 죽은 믿음이라고 해야합니까?...그들은 예수의 말을 들은 것입니까? 공자의 말을 들은 것입니까?…. 죽은 믿음은 구원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강단에서 말씀을 얼마나 잘 전하였는가? 기적과 이사를 얼마나 행하였느냐가 아닙니다. 목사를 비롯한 그리스도인은 연극무대에서 연극 잘하는 배우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세계관이 되어 자기 삶으로 살고 있을 때 그 믿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독교 세계관은 창세기 1;1절 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아멘하시지요....그래서 우리는 천지만물이 진화된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을 믿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면 나의 죽음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을 것이지만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기에 수한(壽限)을 내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 가지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의 첫 계명에 너는 너가 너의 주인이 아니고 나 여호와가 너의 주인이고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인이신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가며 사는 것이 생명이고 진리이고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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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관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세계관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