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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의식의 흐름에 띄어진 소리의 항해 --<윌리엄 포크너의 장편 '소리와 분노'>--

작성자源坪齋 김유조|작성시간24.10.28|조회수7 목록 댓글 0

의식의 흐름에 띄어진 소리의 항해 --<윌리엄 포크너의 장편 '소리와 분노'>--

 

의식의 흐름에 띄어진 소리의 항해

---윌리엄 포크너의 장편 『소리와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The Sound and the Fury

처음 우리말로 번역되었을 때는 『음향과 분노』라고 하였다.

이후 주제와 형식, 문체와 문법에서까지 난해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작품은 차츰 국내외의 연구와 해석에 힘입어

우리말로도 ‘소음과 분노’, ‘고함과 분노’ 둥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은 대체로 『소리와 분노라』는 제목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이 작품은 모두 4장으로 되어있어서 소리 혹은 음향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4악장의 교향곡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첫째

장을 펼치면서부터 이내 파악하기 어렵고 익숙하지 않은 음률

아니 언어를 접하면서는 ‘바르토크’ 음악을 연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꽤 난해한 『소리와 분노』는 현대의 고전

으로 엄존하고 있으며 참고로 작가의 고국인 미국에서는 고교

및 대학필수독서 목록에도 올라있다. 아울러 일반적인 글

읽기에 더하여 퍼즐 풀기 식 독서에 탐닉하는 필자의 개인적

취향도 이 작품을 여기에서 거론하는 한 이유가 되고 있음도

밝힌다.

포크너가 『소리와 분노』를 쓴 것은 1929년이었고 출간 즉시

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그의 작품에 일관되고 있는 난해성

으로 말미암아 말썽 많은 반응을 받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이 난해한 것만큼 난해하지는 않다’는 포크너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이 작품에서도 또한 유효하다.

우리나라에 이 작품이 최초로 번역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

하지 않지만 아마도 1949년 노벨상을 받은 직후라기보다는

대략 작가가 센세이셔널하게도 1962년 낙마 후유증으로

사망한 전후가 아닌가 싶다.

그 바로 전 해에는 노벨상을 1954년도에 받은 헤밍웨이가

자살을 하여 파장을 일으켰고 더불어 우리나라에 문학전집

붐이 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때 나온 포크너의

The Sound and the Fury는 한동안 ‘음향과 분노’로 통칭

되었고 ‘음향’이라는 어휘의 의미에 대해서는 청소년기의

나를 포함하여 다른 여러 독자들에게도 의아함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리라 짐작해본다. 이후 앞서 말한 대로

번역본의 제목은 『소리와 분노』, 『소음과 분노』 등으로 보다

설명적이 되었고 후일 밝혀진 바로는 일본어 번역본이

『음향과 분노』였으며 초기 우리나라 번역본은 이의 중역본

이었다.

포크너가 이 제목을 택한 것은 『맥배드』 5막5장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맥배드가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그것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다.”라고 말하는 데에서 비롯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음향’이라는 고상한 의미보다는

그냥 일반적 ‘소리’라는 뜻이 작가의 의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제목의 번역부터 문제가 많은 이 책을 굳이 여기에서 소개

하고 싶은 것은 한국 소설문학사가 현대에 이르러 몇 가지 큰

곡선을 그리며 부침하다가 마침내 또 하나의 정체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즈음에 지난 세기 초에 모더니즘의 기치아래

새로운 변경을 과감하게 개척해낸 포크너의 대 장정을 비상구

삼아 소환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금세기 우리

소설의 변경을 다시 한 번 멀리 내다보고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 보는 것도 어렵지만 뜻 깊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포크너가 난해한 인간의 존재양식을 아무리 난해하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썼다고 할지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체의 구성과 줄거리를 파악하고 음미한다면 주제의 파악과

함께 작품이해가 그렇게 어려울 것만은 아닐 성 바르다.

전체 4장으로 되어있는 작품의 줄거리는 콤슨 가족의 몰락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1910년부터 1928년까지의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오가며 전개된다. 소설은 일종의 회고록 형식

으로 나타나며, 네 명의 서로 다른 인물이 각자의 시각과

생각을 통해 되짚어간다.

1장(1928년 4월 7일)은 지적 장애를 가진 벤지가 화자다.

서른세 살이지만 세 살 아동의 지능을 지녔다. 1898년부터

1928년까지 있었던 일들이 물리적인 시간 흐름과 관계없이

벤지의 의식 속 기억의 언어로 뒤죽박죽 전개된다. 벤지는

어렸을 때부터 나무 냄새가 나는 누나 캐디를 잘 따랐지만,

나무 냄새가 사라진 캐디는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벤지를

일찍이 떠나간다. 1장에서 벤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거세당한

일, 콤슨 가의 몰락이 실루엣처럼 묘사되고 있다.

2장의 화자는 콤슨 가의 장남 퀜틴이다. 벤지 몫의 목초지를

팔아 하버드에 진학한 퀜틴은 문란한 생활을 하는 여동생 캐디

에게 실망을 하고, 캐디와 함께 자살을 시도하고, 캐디와 근친

상간을 했다고 주장하다 끝내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는다.

3장의 화자는 콤슨 가의 셋째 제이슨이다. 캐디가 낳은 딸

퀜틴(캐디는 오빠 퀜틴의 이름을 자기의 딸에게 붙여 주었다)

을 괴롭히고 캐디의 돈도 갈취하는 인간이다.

4장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하인 딜시는 찬송가가 울려

퍼질 때 콤슨 가의 몰락을 슬퍼하고 십자가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퀜틴이 제이슨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엄마에게서 제이슨이 갈취한 돈을 들고 애인과 함께 도망

치는 일, 러스터가 마차에 벤지를 태우고 가다가 낭패를 보는

이야기들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진다.

이야기의 끝에 대단원은 없다. 전통적 소설을 기대한 독자

라면 천신만고로 읽어낸 이야기의 끝에서 실망을 맛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꼭 전통적

이어야만 하는가. 모든 생애는 모두 대단원을 포함하는가.

1920년대 미국의 남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내재한 경제적, 종교적, 도덕적 갈등, 제3세계 민족에

대한 얕은 민족적 우월감 등과 그 반대로의 열패감 같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소설 장르로 언어화할 때 참으로 많은 타산

지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신문지상을 더럽히는 저

가족 간의 경제적 불화, 저급한 정치인들의 행태, 오물을 뿌리

는 민족 간의 갈등과 추태를 어떤 형식으로 퍼 담을 수 있을

것인가. 한 세기 전에 나온 『소리와 분노』의 실험과 혁신의

소설세계를 탈출구 삼아 21세기 우리문학은 또 다른 변경을

개척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무감에서도 『소리와 분노』를

이번 기획에 과감히 추천해 올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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