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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향기

광야소리<주님의 기도>

작성자맹물|작성시간26.06.18|조회수20 목록 댓글 1

<주님의 기도>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못골성당 견진 강의 미사

 

<주님의 기도>
(INTRO)
못골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부산교구 가정사목국장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입니다. 견진성사를 준비하시는 분들과, 그들을 이끌어주고 계시는 대부 대모님들을 특별히 이 미사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행위가 나의 기도이기를 희망하며, 잠시 침묵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기도 앞에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론)

오늘 복음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주십니다. 좀 더 도전적으로는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기도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장해줍니까? 도대체 기도를 통하여 내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라는 일종의 ‘빎의 행위’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네 할머니들을 떠올리면 장독대 위에 정화수 올려놓고 비시던 분으로 한정되는 묘한 연상작용을 일으킵니다.

한마디로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는 것이지요. 어떤 한계와 절망과 염원 때문에 빌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 왜소하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인간상에 대하여 21세기의 지성인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할지라도 내일의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고 나의 기도와 무관하게 내일 저녁의 낙조가 꽤 근사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건 하지 않건 세상 돌아가는데에 큰 차이가 없다면, 왜 기도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좀 더 본질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본질과 맞닿은 구석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아무리 자기가 많은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결국 하나의 침대에서 잠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많은 것을 기억하고 저장할 수는 있으나 결국 사는 것은 단 하루씩 뿐입니다. 하루만 사는 것이지요. 어제를 사는 사람도 없고 내일을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딱 하루 오늘만 살 수 있을 뿐이고, 그 오늘이라는 하루는 수많은 단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평생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할지라도 힘겨운 것은 오늘 하루 어떤 순간 때문에 힘이 들었고, 아주 많은 사람들 속에서 발생되는 복잡다단한 관계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결국 따지고 보면 한 사람 때문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고, 하나의 단면적 인식 때문에 판단하고 단죄하고 번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매순간 단면만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으로 인간은 또한 무수하게 다른 얼굴과 기억과 상황들이 뒤엉켜 지금의 내가 만들어져가고 있음을 깨닫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자리는 여기입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한정적인 상황.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힘겨움들이. 이 단면 하나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흘러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도 나를 흐르고 있고, 이별도 나를 흐르고 있으며, 생명도 나를 흐르고 있고, 죽음도 나를 흐르고 있음을... 기도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본질은 <비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여는 기술>이라할 수 있습니다. 빌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면의 나를 열기 위하여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 일 생기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한 단면만을 분주하게 살면 되고 내가 알고 내가 아는 그게 전부인 듯 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나의 단면, 내가 처한 상황 너머로 내 시선을 옮겨 줍니다.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일부’이고, ‘절대’라고 생각했던 것이 ‘상대’이며, ‘홀로’라고 생각했던 것이 ‘함께’임을, 그렇게 나를 서서히 열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참된 기도를 통해서만 나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기도를 통해서만 결국 산다는 일이 무엇이고 또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숙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된 기도란 이것입니다. 의무나 도구나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나를 더 큰 생명을 향해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더 유려한 마음을 갖는 일이고 기도는 더 깊은 시선을 연마하는 일이며 기도는 더 큰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라고 이름 지어진 이 짧은 기도의 한 토막은 바로 기도를 통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로 확장시키는 일이었고 자신을 열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이루어져야 할 것은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었고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필요한 것에 앞서 이미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과 나누어주신 것을 먼저 보게 하였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꾸만 나의 것, 나의 뜻과 내 욕망의 단면에만 빠져 잘못된 기도를 하고 좁디좁은 마음으로 살지 않게 해달라는, 바로 그것이 유일한 유혹이자 악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소원을 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열어젖히기 위해서입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이별과 상처를 겪어 그것이 마치 나의 전부인냥, 하나의 단면에 질식해버리는 나를 기도를 통해 중지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고통도 어떤 이별과 어떤 상처도 결코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울지만, 아픔과 상처와 이별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내 끝내 기도를 통해 지금은 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큰 세상이 나를 흐르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생명이 나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사랑이 나를 마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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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맹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8 ●마태오 복음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6,8)라는 선언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러니 이는 불안이나 부족함을 달래고 채우려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6,9)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아버지로서 친밀함을 동시에 붙드는 고백이자 외침입니다. 이러한 친밀함은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저희”라는 복수형 표현 안에서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그다음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6,9)는 하느님 스스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시는 종말론적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에제 36,23 참조), 백성이 현재의 삶에서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세를 포함합니다(이사 29,23 참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는 구약의 야훼 통치 사상을 재해석한 종말론적 청원으로,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6,10)는 순종의 윤리로, 앞선 두 청원을 더욱 간절히 요청하는 백성의 호소가 됩니다.
    이어지는 청원들은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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