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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990 또 하나의 도전

작성자신동|작성시간26.06.13|조회수56 목록 댓글 1

2026.  6.  13.  06;00

   새벽 산책에서 돌아와 만년필을

꺼냈다.

 

180여 번이나 반복해 이름과 주소를

쓰고 '태산이 높다 하되~하늘아래 뫼이

로다'라는 양사언의 시조를 쓰고 또

써본다.

 

A-4 용지 두 장에 빼곡하게 쓰고 나니

손이 빡빡해지고 피곤해져 더 이상

쓰지를 못하겠다.

 

글은 컴퓨터에 생각나는 대로 쓰고

교정을 하면 되지만 글씨를 쓴다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있었을까.

 

예전엔 참 쉬웠다.

팔과 손이 마비되기 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써도 참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전일본(全日本) '서예

대전'에서 장원을 해 진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명필 아버지,

 

문학에 조예가 깊어 최근에도 수필집과

시집을 여러 권 출간하였고, 붓글씨를

잘 쓰는 형님들의 DNA를 물려받았는지

나도 한때는 리틀 '한석봉'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첫 번째 마비와 고통의 시작은 1982년

여름이었다.

 

송파지점에 근무할 당시 부행장 특명

으로 경북 구미 소재 대진침대 그룹사

'국제 에너지'에 출장을 다녀와서 본점

에 올릴 '기자재 운전자금대출' 승인

서류를 작성하다가 오른팔에 마비가

왔다.

 

갑자기 글씨를 쓰는 것도 어눌해지고,

결재칸에 정확하게 도장이 찍히지 않고,

걸음걸이도 약간 이상해져 나혼자만의

고민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요즘엔 상급병원으로 불리지만,

당시 메이저급인 서울대병원, 한양대

병원, 경희대병원, 아산병원, 순천향

병원에서 뚜렷한 병 진단명이 나오지

않았기에 오로지 산(山)에만 매달렸고

산(山)이 신앙이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웬만한 태풍이

와도 검단산에 오르며 가까운 친구나

동료 직원이 마비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2005년 철산지점장으로 부임 후 마비

증세가 더 심해졌고, 주치의는 뇌종양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는 선고를

내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붓글씨는 포기했어도

펜글씨나 만년필 글씨는 괜찮게 유지

되었다.

 

3개월 이내 전신마비, 6개월 이내 사망,

수술을 받는 도중  table death 70%

확률이라는 실질적인 사망선고를 이겨

냈어도 엉망이 된 오른팔과 손은 회복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은퇴 후 어느새 18년,

글씨를 쓸 일이 점점 없어지고 어쩌다

서류작성을 할 경우가 생기면 곤혹(困

惑)스럽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이름 석자를 쓴다

해도 술 취해 쓴 글처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니 기분이 참담하다.

 

사실 나는 컴퓨터 자판을 외우지 않았다.

독수리 타법이지만 자판을 두드릴 때는 

그 누구보다 속도가 빠르다.

 

비록 마비된 팔과 손이지만 이대로 살아

가기는 싫어졌고,

글씨를 쓰기에 도전을 하고 싶다는 욕망

이 새로 생겼다.

 

때마침 당구장에서 거의 매일 만나는

절친에게서 고급 '파커 만년필'과 잉크

를 선물로 받았다.

 

2008년 5월 16일,

사량도 지리산 산행 후 '느림의 미학'

으로 글쓰기에 도전한 지 약 18년 만에

990회를 썼고,

 

방문객은 약 20만 명이요, 1차 목표인

1,000회 고지가 눈앞에 다가왔다.

 

나는 살면서 삶에 대해 미련을 가진

적은 별로 없었다.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이번엔 글씨 쓰기에 도전을 하고 싶어

진 거다.

 

지금은 비록 꼬부랑글씨지만 10,000번

연습을 하고 필요하다면 될 때까지 십만

~백만 번이라도 쓴다면 마비가 어느 

정도 풀리지 않을까.

 

핑계는 핑계일 뿐,

은퇴 후에도 글씨를 잘 쓰는 게 간절했

다면 컴퓨터보다는 육필(肉筆)로 써야

했다.

 

지나간 세월 아쉬워할 필요도 없고

거창한 목표도 필요 없다.

인디언들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제부터 나는 임서기(林棲期)와 방랑

(放浪期)를 끝내고 학습기(學習期)

로 다시 돌아온 늙은 학생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내가 글씨를 쓴다는 건 새로운 도전이다.

 

essay를 1000여 편 가까이 썼으니

글씨도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쓰고 또

쓴다면 10년 후에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지 않을까.

 

            2026.  6.  13.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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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상원 | 작성시간 26.06.13 글씨란 악필이라도 상대방에게 의사가 전달되면 소임을 다 하는게 글씨입니다. 넘 잘쓰려고 애쓰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목표를 이루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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