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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993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작성자신동|작성시간26.06.20|조회수34 목록 댓글 0

2026.  6.  20.  05;30

  밤새도록 내리던 비는 지금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세찬비가 두드리는 창가에 서서 다시

잠이나 청할까 나갈까 망설이다가 

속을 향한다.

 

빗소리 참 요란하다.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은 숲 속엔

오롯이 빗소리가 지배한다.

 

우산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소리는 

북 치는 소리요,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세차게 쏟아지는 어느 폭포수의 소리

처럼 내 귓전을 장악해 나간다.

 

6월의 숲 속은 유난히 생기가 짙다.

한껏 짙어진 녹음은 하늘을 가릴 만큼

무성해졌고,

 

그 안에서 늦잠의 유혹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내쉬는 사이에

내 몸과 마음은 응어리를 남기지 않고

서서히 풀어진다.

 

오늘도 목표는 없다.

비 오는 숲 속을 느리게 걸으며 무엇이

내 눈에 보일까,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야 할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걷는다면 무념무상

(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저 담장 의자에 머무르던 지박령(地

靈)은 어디에 가서 비를 피할까.

 

가끔 내 눈치를 보며 나타나던 너구리

는 굴속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까.

아니면 배가 고파 숲 속에서 헤맬까. 

 

상념(想念)은 끝없이 이어지고,

숲 속의 풍경은 끊임없이 나에게 다가

왔다가 등뒤로 사라진다.

 

바위와 나무가 빼곡한 숲의 틈으로

파고드는 빗방울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바람소리는 배경음악처럼 이어진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고,

산길에서 만난 '도깨비 가지'가 비를

흠뻑 맞아가며 몸을 부르르 떤다.

 

             <   도깨비 가지   >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잔잔하게 들리는 빗소리보다는 오늘

같이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더  좋다.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거대한 전나무 둥치에서 자라는

작은 생명을 바라본다.

 

자유롭다.

몸도 자유롭고 내 머릿속의 상념도

자유롭다.

 

바짓가랑이를 타고 내려온 빗물로

우화 속 양말이 점점 젖어간다.

 

우산을 쓴 부부가 내 앞으로 걸어온다.

그들의 붉은 우산과 노란 우산은 녹색의

숲 속에서 수채화를 완성시켜 나간다.

 

산길을 오르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빗방울이 내 팔뚝에 닿는 감각이 또렷

지고 생각도 단순해진다.

 

산모퉁이를 돌자 앞서가는 사람이

보인다.

 

나는 여기서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빨리 걸어야 하는 부담도 없고,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잡아야 할 이유도

조급함도 없기에 천천히 따라간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건강해진다.

그저 오늘의 내 컨디션에 맞춰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걸음을 걸으며 마음의

속도를 늦추기만 하면 된다.

 

나는 오늘 비 내리는 숲 속을 걸으며

작은 명상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내가 산행을, 숲 속을 사랑하는 가장 

이유는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나 자신으로 돌아와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07;00

글 쓰는 것도 이젠 중독인 모양이다.

오늘도 느림의 미학으로 무엇이든 써야

직성(直星)이 풀리겠다.

 

'느림'은 결코 게으름이나 어리석음이

아니다.

또한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이승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 천천히

생각하고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내려와 물감을 마음속에 풀어

나만의 수채화(水畵)를 그려가며

생각나는 대로 느낀 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2026.  6.  20.   비 오는 날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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