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유대인 세계 경제사의 주역으로 우뚝 서다
1. 스페인제국의 영광과 몰락
1) 이사벨 여왕, 스페인을 통일하다
1492년, 스페인으로서는 뜻 깊은 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어 통일을 이룩하고 또 ‘신대륙 발견’을 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이사벨 여왕이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슬람 무어족 수십만 명이 스페인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로마제국 이후 유럽의 최초 제국이 된 스페인의 이러한 영광 뒤에는 막강한 경제력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유대인을 추방시킴으로써 세계 경제사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한다.
2) 흑사병의 창궐과 유대인 학살
14세기부터 중세유럽은 백년전쟁에 시달리고 흑사병으로 전 대륙이 휩쓸리는 암흑의 시대였다. 1347년부터 4년간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죽었으며, 이후 8년에 한 번꼴로 발생해 유럽 전체 인구의 4분의 3을 휩쓸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희생은 적었다. 청결을 강조하는 유대교 율법과 전통의 덕분임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의 원인이 유대인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은 물론 돈 되는 사업은 모조리 거머쥔 유대인들에 대한 악감정은 평소에도 일반 시민들의 눈엣가시였다.
흑사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348년 아라곤 왕국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폭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뒤 스페인 전역에서 흑사병으로 인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 이후 결국 유대교는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개종을 하거나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1492년 스페인 왕국은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정부가 전쟁으로 이반된 민심을 추스르고 바닥난 국고를 재정비하는데 이단 종교를 믿는 유대인의 재산몰수와 추방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스페인 전 국민의 6.5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이들이 14~15세기 스페인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추방을 선포한 칙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재산을 처분해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화폐와 금, 은은 가지고 나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평소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사는 유대인들은 현찰과 보석·골동품 및 부동산을 3분의 1씩 분산하여 관리하여 왔는데, 안정적 재산관리방식인 ‘포트폴리오(portfolio)’는 여기서 유래했다. 당시 유대인에게 토지 소유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담보대출 시 저당물은 대부분 보석류였다. 이는 후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간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 보석시장으로 자리 잡게 하여준다.
3) 제국주의 팽창정책과 국가 파산
유대인들이 떠난 뒤 내수 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의 감소는 스페인 경제를 피폐케 했다. 게다가 유대인 추방은 경제 분야에서 수많은 고급 인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1492년 스페인 통일을 이룩한 같은 해 10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 이후 카를로스 1세 때 영토상으로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들의 다섯 자식을 포르투갈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영국 등으로 보내 결혼시킴으로써 유럽 왕실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이사벨에 이어 페르난도가 죽자 외손자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1516년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다.
카를로스 1세는 외할아버지 페르난도로부터 스페인 본토 아르곤 왕국과 남부 이탈리아령을, 외할머니 이사벨로부터는 카스티야 왕국과 신대륙 식민지를, 할아버지로 부터는 오스트리아를, 할머니로부터는 지금의 네덜란드인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았다. 그의 통치하의 스페인제국은 스페인 본국, 신대륙 식민지, 독일의 합스부르크 령,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을 통괄하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이후에도 스페인의 팽창정책은 계속되어 스페인제국의 무적함대는 해상권을 장악하고 멀리 필리핀, 마카오까지도 정복하여 네 개 대륙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제국이 출현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외형적 팽창과는 달리 내실은 곪아가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수입의 70퍼센트를 전쟁 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전쟁 비용 이외에도 제국이 워낙 커서 국가 재정에 필요한 돈이 엄청났다. 그러니 당연히 대규모 재정적자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를로스에 이어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는 등극 다음해인 1557년 파산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현대적 의미의 첫 국가 파산인 것이다.
이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하기 31년 전의 일이었다. 제국의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먼저 깨진 것이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뽐내던 스페인제국이 종교 이데올로기에 갇혀 유대인을 추방함으로써 경제 기반이 무너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1668년에 분리해 나갔다. 1648년에는 네덜란드가 80년 전쟁 끝에 독립했다. 1659년에는 프랑스 남서부와 북부 일부를, 그리고 1678년에는 동부를 프랑스에 내주었다. 1714년에는 시칠리아와 나폴리, 사르디냐와 네덜란드 남부지방을 오스트리아에게 할양했다. 그 뒤 스페인은 강대국의 대열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2. 중상주의와 유대인
1) 브뤼헤 시대
16~18세기, 3백년간은 유럽의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 시대였다. 중상주의 사상은 한 나라가 부강하려면 무역을 통해 국부, 곧 당시의 화폐인 금, 은을 늘려야 한다는 사상이다.
1096년 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내 반 유대 정서가 고조되면서 유대인 박해와 살해가 잇달았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바다 건너 플랑드르의 브뤼헤(현 벨기에 브뤼셀에서 90Km 거리) 항구로 탈주했다. 이들 유대인들은 영국의 양모를 가져다 이를 대륙에 내다 팔았다. 이후 3차 십자군 전쟁 때인 1290년에 영국에서 대부업에 종사하던 유대인 1만 6천 명을 한꺼번에 추방하였다. 반 유대 정서를 달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국왕과 귀족들이 그간 유대인에게 진 빚을 무효화시키고 그들의 재산마저 몰수하려는 이유가 컸다.
지금은 벨기에 땅이지만 당시 플랑드르와 보르드 지방은 영국 국왕의 영지였다. 브뤼헤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기존 브뤼헤의 유대인들과 손잡고 당시 최고의 상품인 모직물의 고급화에 주력했다. 그 뒤 1306년에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도 브뤼헤에 합세하여 포도주, 아마포와 양모 등 프랑스 상품의 중심 수출입 항구가 되어 경제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제 브뤼헤는 명실 공히 전 유럽 최고의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다. 유대인들이 떠나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구가 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2) 앤트워프 시대, 다이아몬드와 설탕산업
그 후 번영을 구가하던 브뤼헤는 퇴적작용으로 인해 항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유대인들은 인근의 또 다른 항구도시인 앤트워프(안트베르펜)로 옮겼다. 그들의 경제 활동은 다시 시작되어 1500년께 이르러 앤트워프는 국제 무역시장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다루었던 주요 교역품은 이베리아 반도와 브뤼헤 시절 다루었던 교역상품에 인도산 향신료와 금은보석과 다이아몬드가 더해졌다.
1492년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할 때 숨겨 가지고 온 보석으로 시작한 보석 장사는 앤트워프를 국제 보석거래의 중심지로 변화시켰다.
앤트워프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유대인들의 교역상품은 커피와 차, 코코아, 담배, 설탕이 더하여 더욱 다양해졌다. 그 무렵 설탕은 매우 고가로 귀족들만 애용하는 권위의 상징 제품이었다. 1372년 베네치아를 경유해 들어온 설탕 1Kg의 가격은 수소 두 마리 값이었고 14세기 말에는 수소 열 마리 값까지 폭등하기도 했다. 그 뒤 15세기 내내 보통 소 한두 마리 가격은 유지했다. 유대인들은 설탕의 독과점 유통 체제를 완성한다. 유대인들이 직접 브라질과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함으로써 사탕수수 재배에서부터 운반-정제-판매의 핵심을 장악하는 독과점 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앤트워프가 15세기 무렵을 전후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을 빼놓고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2. 네덜란드 시대와 유대인
1) 종교개혁과 유대인
16세기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1521년 파문당함) 유럽의 종교개혁은 유대인들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종교개혁이 교황 중심의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을 무너뜨렸으며 유대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격리는 끝났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처음에 유대인을 옹호했다. 그가 가톨릭을 공격했던 내용 중 하나는 가톨릭이 유대인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취급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유대인들의 개종을 손짓했으나 거부당한 이후 유대인들을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저서 <악마론>의 서문에서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측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단언하였다.
1537년부터는 독일 거리 곳곳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이 신에게 봉사하는 길이라고 설교하면서 당시 낮은 사회적 지위인 상인을 지지했다. 그 무렵 ‘상인(merchant)’은 유대인과 같은 뜻으로 쓰일 때로서, 해상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유대인을 ‘merchant’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뱅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으며 상업이 융성했던 네덜란드에 칼뱅파가 널리 퍼지게 된다. 칼뱅은 5퍼센트 이자율 한도 내에서 돈을 빌려 주어도 좋다고 했다. 네덜란드 신교도와 영국 청교도들이 이자 상한선을 정해 놓고 허용하였으며, 이것이 근대에 접어들어 두 나라가 금융 산업을 기반으로 상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2) 앤트워프 유대인들의 암스테르담 이주
16세기 후반 앤트워프는 스페인 침공으로 도시를 지키기 위해 용병을 썼는데 이 용병들이 약탈을 일삼고 무법천지를 만들어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갔다.
1579년 네덜란드는 건국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고 유럽 전역에서 종교난민들을 흡수하였다. 유대인들 또한 네덜란드로 몰려들었으며 영국에서 국교인 성공회에 대항한 칼뱅주의자들도 심한 박해 때문에 네덜란드로 피신해 왔다. 1585년에 앤트워프가 스페인에 다시 정복되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유대인들도 대부분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왔다.
이러한 유대인의 이주는 당시 플랑드르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원인이 되고 반면 암스테르담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여 유럽 각국의 부유한 상인과 예술가들 또한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유대인들은 16세기 말에 암스테르담 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3) 네덜란드 세계 제패
14세기부터 해류의 변화로 청어가 네덜란드 연안 북해로까지 밀려드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부는 청어에서 시작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청어를 염장하는 소금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했다. 천일염이 암염보다 값도 싸고 질도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결정이 더 작고 염도가 높은 소금을 만들기 위해 대서양 연안 천일염을 다시 끓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시켜 순도 높고 고운 결정을 역사상 처음으로 만들었다.
청어 잡이가 호황을 누리면서 네덜란드에 비로소 제대로 된 산업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먼저 조선업이 발달하고 부수적으로 목재업이 호황을 누렸다. 네덜란드 유대인들의 조선 방법은 대포 같은 무장을 최소화하고 배를 경량화 하여 대신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화물 운송비를 3분의 1까지 낮춤으로써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해상운송 물량이 폭증하자 조선소의 설비와 자재, 계측장비 등을 표준화했다. 표준화는 유대인의 장기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북방무역의 70퍼센트를 장악했다.
4)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설립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기발한 개념을 다시 꺼냈다.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당시 81명의 선주가 투자자본의 절반 이상을 조달했으며 이 가운데 과반 이상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일컫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1648년, 30년 간 스페인과의 전쟁을 마치고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적극 지원해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으며 영국의 동인도회사보다 여덟 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주식이 거래가 잘 되자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새로운 주식을 발행해 대규모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본격적인 주식거래를 위해 ‘상설’ 증권거래소가 1608년 암스테르담에 설립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증권거래소는 네덜란드보다 더 일찍 시작하였으나 제대로 그 기능을 다 하지 못하다가 크롬웰의 항해조례 이후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건너가서야 활성화 되었다.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이듬해인 1609년에 암스테르담 은행이 탄생했다.
경제가 발달하고 교역이 급증하자 거래되는 돈의 유통량도 많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각종 유럽의 주화들이 1천 종 이상으로 무게도 함량도 제각각이었고 특히 위조화폐와 저질 주화의 범람이 큰 문제였다.
이렇다 보니 네덜란드 정부는 상인들을 보호할 필요를 느끼고 표준 통화를 만들어 교환가치를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국책은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유대인이 주도하는 민간 기업으로 은행을 설립한 것이다.
암스테르담 은행에서는 계좌를 가진 상인으로부터 금, 은을 받고 이를 근거로 계좌의 주인이 다른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이른바 은행화폐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오늘날 수표와 비슷한 개념이다.
17세기 내내 네덜란드가 상업과 무역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었던 가장 큰 핵심적 이유는 바로 세계 최초의 지폐를 대량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일종의 최초의 세계 기축통화였다.
주식회사·증권거래소·은행을 축으로 한 금융 산업의 발달은 좀 더 전문화된 금융의 발전을 가져왔다. 보험국과 여신은행도 그중 하나다.
오늘의 선물거래도 이루어져 선물시장도 생기고 증권 거래인도 등장했다.
무기명 유가증권의 대중화도 이루어 졌다.
5) 30년 전쟁, 유대인의 지위를 바꾸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30년 전쟁은 처음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종교전쟁의 이름을 빌린 민족대립 양상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유럽에서 패권을 확립해 가던 스페인과 독일 지역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이를 제지하려는 세력 사이의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해 유럽 열강들 모두가 참가한 최초의 국제전이 되었다.
처음 1차 독립전쟁이 1568년에 시작되어 2차 전쟁이 1648년에 끝이 났으니 1, 2차 합쳐 ‘80년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 체결된 것이 “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의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이루어 졌다.
이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진 80년 전쟁과 독일과의 30년 전쟁을 마감한 최초의 다자간 조약이다. 1648년 네덜란드는 완전독립이 쟁취되었다. 이러한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이후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에 선행한 시민혁명의 승리로 특히 미국 독립과 연방제도의 모델이 되었다.
30년 전쟁은 유대인에게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올라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유럽과 동방을 돌며 무기를 사모아 부족한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비범한 능력을 보였으며, 나중에 그들은 직접 무기 제조공장을 세웠다. 이것이 유대인의 주특기 중 하나인 근대 군수산업의 효시가 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30년 전쟁 동안 유대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서 다른 주민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게 되고 그 뒤 유럽 각국의 왕과 제후들이 유대인들에게 재정을 맡기는 게 일종의 관습처럼 되어 이들을 궁정대신이라 불렀는데 유럽 각국에서 약 150년 동안 성행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독일 제후의 수석장관으로 활동하면서 그들에게 정치 경제적인 권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신들도 주권자로서의 혜택을 누렸다. 이것이 19~20세기 초 독일을 유럽 최강의 나라로 만든 기초였다.
30년 전쟁 뒤 신성로마제국의 2백 개나 되는 주요 공국과 영주들 대부분이 궁정유대인을 거느렸다.
황제 중에서 가장 가톨릭에 가까운 프랑스의 샤를 5세까지도 궁정유대인을 두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역대 재무부장관이 대부분 유대인인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