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륙의 축으로 돈 역사의 수레바퀴
세계지도에서 각 대륙의 모양과 방향을 비교해 보면 아주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남북아메리카는 남북의 길이가 동서보다 길며 아프리카도 그렇다. 그러나 유라시아의 축은 남북이 아니라 동서 방향이다.
그렇다면 각 대륙 축의 방향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인류역사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축의 방향은 농작물과 가축은 물론이고 어쩌면 문자와 바퀴 등 발명품들의 전파 속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기본적인 지리적 특성은 지난 500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인, 유라시아인 등이 각각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던 크나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앞에서 식량생산의 기원이 총기, 병원균, 쇠의 탄생에서 나타난 지리적 차이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식량생산이 가장 신속하게 전파된 경우는 동서 축 방향이다. 이와 반대로 식량생산이 가장 느리게 전파되었던 것은 남북 축 방향이다.
농작물이 이리저리 옮겨지고 퍼지는 전파의 가능성이 쉬운 편인가 어려운 편인가를 가름하는 난이도가 지리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을 ‘선제적(先制的) 가축화·작물화, preemptive domestication’라고 일컫는다.
농작물의 조상이었던 야생식물들은 대부분이 지역에 따라 유전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각 지역의 조상 식물이 각기 다른 돌연변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고대 신세계의 주요 농작물의 유전자를 분석해 보면 많은 농작물에서 두 가지 이상의 야생 변이와 두 가지 이상의 작물화 변이가 발견된다. 이는 그 농작물이 적어도 두 지역 이상에서 독립적으로 작물화 되었으며 일부 변종들은 어느 한 지역의 특정 돌연변이를 물려받았고 그 밖의 변종들은 또 다른 지역의 돌연변이를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원리를 근거로 식물학자들은 농작물의 ‘선제적 작물화’를 연구한다.
같은 위도 상에 동서로 늘어서 있는 지역들은 낮의 길이도 똑같고 계절의 변화도 똑같다. 그리고 일치하는 정도는 좀 덜하지만 질병, 기온과 강우량 추이, 생식지와 생물군계(生物群系) 등도 서로 비슷한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위도가 비슷한 이탈리아 남부, 이란 북부, 한국, 일본 등은 동서 방향으로 거리가 6400Km 떨어져 있지만 기후는 남쪽으로 1600Km 떨어진 지역보다도 더 비슷하다.
유라시아에서는 동서 확산이 쉬웠던데 비해 아프리카는 남북 축을 따라 확산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살펴보자.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창시 작물은 대부분 신속하게 이집트에 도착하고 다시 에티오피아의 서늘한 고지대까지 전파는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어서 남아프리카까지의 3200Km에 이르는 열대지역은 이 농작물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가축 또한 마찬가지로 기후나 질병, 특히 체체파리가 옮기는 트리파노소마성 질병들 때문에 가축의 전파는 중단되거나 늦춰졌다. 말은 적도 이북인 서아프리카까지만 전파되었고 소, 양, 염소 등은 세렝게티 평원의 북쪽 변두리에서 2000년 동안이나 발이 묶여 전파되지 못했다.
이들 소, 양, 염소가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AD 1년~200년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가축화되고 약 8000년이 흐른 후였다.
각 대륙에 따라 달랐던 축의 방향은 식량생산의 확산뿐만 아니라 기타 기술이나 발명품의 확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BC 3000년경 서남아시아 또는 그 부근에서 발명된 바퀴는 동서로 신속하게 전파되어 불과 수세기 동안 유라시아의 많은 지역으로 퍼졌다. 반면 선사시대에 멕시코에서 독자적으로 발명되었던 바퀴는 안데스까지 남하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BC 1500년 이전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서부 지역에서 (오늘의 레바논 지역에 살고 있었던 페니키아인들에 의함) 발명한 알파벳 문자 원리도 약 1000년 동안 서쪽으로는 카르타고까지, 동쪽으로는 인도 아대륙까지 전파되었지만 선사시대 중앙아메리카에서 꽃을 피웠던 문자 체계들은 그로부터 적어도 2000년 동안은 안데스 일대에 도달하지 못했다.
바퀴와 문자는 농작물처럼 위도나 낮의 길이 따위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간접적인 관계는 있다. 특히 식량생산의 체계와 결과가 매개물 역할을 했다. 최초의 바퀴는 농산물을 운반하는 소달구지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초기의 문자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복잡해진 식량생산 사회에서 여러 가지 목적, 즉 왕권에 대한 선전, 물품 명세서, 관료들의 문서 기록 등으로 이용했다.
지금까지 식량생산과 가축화가 몇몇 중심지에서 시작되어 불균등한 속도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과정을 더듬어 보았다. 결론적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각 대륙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5. 가축의 치명적 대가, 세균이 준 사악한 선물
농경사회는 수렵채집사회보다 훨씬 더 높은 인구 밀도(대략 10배에서 100배)와 정주형 생활을 함으로서 비위생적인 환경과 오물 속에서 생활하기 쉽다. 이러한 농경의 발생은 세균에게는 큰 행운이었으며 도시의 발생은 더 큰 행운이었다. 또 세계 교역로의 발달은 전염병의 길이 되기도 했다.
인류의 근대사에서 주요 사망 원인이었던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 같은 여러 질병들이 동물의 질병에서 진화된 전염병들이다. 우리가 소나 돼지 같은 사회적 동물을 가축화시켰을 때 이 동물들은 이미 그러한 유행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그 미생물이 우리에게 옮겨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역사에서 병원균의 가장 무시무시한 사례는 1492년 콜럼버스 항해와 함께 시작되었던 유럽인들의 남북아메리카 정복이었다. 스페인의 잔혹한 정복자들에게 희생된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스페인의 잔혹한 세균에 의해 희생된 원주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
무기류, 기술, 정치 조직 등에서 유럽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비 유럽인들에 비해 크나큰 이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같은 이점만으로는 애당초 유럽의 소수 이주민들이 어떻게 남북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그토록 많은 원주민들을 교체할 수 있었는지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유럽이 다른 여러 대륙에 이 사악한 선물(유라시아 인들이 오랫동안 가축과 밀접하게 살았기 때문에 진화된 각종 병원균)을 주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6. 식량생산 창시와 문자 고안과의 밀접한 연관
문자 체계는 하나의 기호로 나타내는 화소(speech unit)의 크기에 따라 세 가지 기본적인 방식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방식은 각각 하나의 기본적인 소리, 한 음절 전체, 또는 아예 낱말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다(소리글자). 이 중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식은 알파벳으로 이는 기호(글자, letter) 하나가 그 언어의 기본적인 소리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 이상적이다.
두 번째 방식은 이른바 어표(語標)라는 것을 이용하는데 이는 기호 하나가 낱말 하나를 나타낸다. 중국의 한자가 바로 그것이다(뜻글자).
알파벳이 전파되기 전에는 어표를 많이 사용하는 문자 체계가 지금보다 더 많았다. 그중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 마야의 그림문자, 수메르의 설형문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 번째는 각각의 음절에 대하여 하나의 기호를 나타내는 음절문자다. 미케네 문명 시대의 그리스 선형(線形) B문자와 같이 고대에는 음절문자도 흔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으로는 일본인들이 전보, 은행 결산보고서, 시각 장애자를 위한 문서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나 음절문자다.
그러나 이상의 문자 체계에서 한 가지 방식만을 사용하는 문자 체계는 전무하다. 중국 문자도 순전히 어표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영어의 문자 체계도 알파벳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알파벳 문자 체계가 그렇듯이 영어에서도 숫자, $ % + 따위의 어표, 즉 음성적 요소들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 단어 전체를 나타내는 자의적인 기호들을 많이 사용한다.
독립적으로 문자를 만들어낸 것이 확실한 민족은 BC 3000년 이전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과 BC 600년 이전의 멕시코 인디언들이다. BC 3000년경의 이집트 문자와 BC 1300년 이전의 중국 문자도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인 수메르인의 설형(쐐기)문자로서 쓰기 편하도록 평평한 점토판을 사용하였으며 처음에는 뾰족한 도구로 점토판을 그냥 긁었는데 차츰 점토판에 깔끔한 표시를 눌러 찍을 수 있는 갈대 첨필(尖筆)로 바뀌었다.
또 문자를 한 줄로 가지런히 쓰도록 하고 행(行)을 일정한 방향으로 읽도록 했으며 위에서 아래로 차례차례 읽어 내려가도록 하였다.
문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진전을 보인 한 가지만 고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수메르인 들이 음성 표기법을 도입한 일일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알파벳이 생겨난 것은 한 번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BC 2000년~1000년, 주인공은 현대의 시리아로부터 시나이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살면서 셈계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 역사상 모든 알파벳,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모든 알파벳은 궁극적으로 이 셈 알파벳의 조상으로부터 유래되었던 것이다.
셈계 알파벳들 중에서 한 계열은 청사진 복사와 발전적 수정을 통해 초기 아라비아 알파벳을 거쳐 다시 현대의 에티오피아 알파벳으로 이어졌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의 계열은 옛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의 셈계 언어 알파벳을 거쳐 현대의 아랍어, 헤브라이어, 인도어, 동남아시아 어 등의 알파벳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인들에게 가장 낯익은 계열은 BC 8세기 초엽 이전 페니키아 알파벳과 그리스 알파벳으로 이어졌다가 거기서 다시 BC 8세기 동안에 에투루리아 알파벳으로, 그리고 다음 세기에는 로마 알파벳으로 이어진 계열이다. 이 로마 알파벳은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 바로 지금 우리가 쓰는 알파벳이 되었다.
초기의 문자들은 불완전하거나 복잡하거나 아니면 그 모두를 가지고 있던 형태였다. 그 쓰임새 역시 사용자들의 숫자만큼이나 제한적이었다.
최초의 수메르 문헌들은 모두 감정을 배제한 궁전이나 사원 관료들의 기록이다. 우루크 시 수메르 최초의 기록보관소에서 발굴된 점토판의 90%는 거둬들인 물품, 일꾼에게 지급한 식량, 농산물의 분배 따위에 대한 사무 기록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표의 수준을 넘어서 음성 문자를 발달시키게 되자 비로소 수메르 인들은 선전이나 신화 등의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튼 초기의 문자는 그러한 정치제도의 필요(기록 보관이나 왕권에 대한 선전 따위)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문자의 사용자들은 식량을 생산하는 평민들에 의해 비축된 잉여 식량을 먹고 살던 전업 관료들이었다.
한편 수렵채집 민 사회는 문자를 만들어내지도 도입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초기 문자를 사용할 만한 제도적인 쓰임새도 없었거니와 필경사를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잉여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사회적 농업적 구조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량생산과 그것을 습득한 후 수천 년에 걸친 인류사회의 발전은 인간의 유행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진화에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문자의 진화에도 필수적이었다.
또한 문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발명품이 전파되는 데도 지리와 생태가 미친 영향이 놀라울 만큼 유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문자 체계 한글>
1446년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문자체계는 몽골 또는 티베트의 불교 문자의 예에서 착안한 표음 문자의 개념과 중국 한자의 네모꼴 블록형식의 문자 형태로부터 영감을 얻었지만, 몽골 문자나 한자의 블록 문자 중 어느 것도 세부까지 차용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세종대왕은 표음 문자와 블록형식 문자 형태의 기본적인 개념만을 차용한 것이 분명하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문자의 운용 원칙과 형태 등 모두 세부 사항을 스스로 고안해 내고,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의 어떠한 문자체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놀랍고도 새로운 원칙을 만들었다. 세종은 음소(音素)를 블록 안에 배열하여 음절별로 분류하도록 했고 특정 문자 형태가 정해진 소리를 대표하도록 만들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형태는 물론이고 한글 자모에만 있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도 새로 발명하였다. 예를 들면 몇 개의 자음과 모음을 네모 칸 속에 묶어 음절을 만들고 소리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자음이나 모음을 나타내는 글자는 그 형태도 서로 관련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자음 글자들의 형태는 각각 그 자음을 발음할 때 나타나는 혀나 입술 모양을 본뜻 던 것이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한글은 전 세계 언어학자들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문자체계라는 어쩌면 당연한 칭송을 받고 있는 것이다.
7.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유럽에 추월당한 불운의 과정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중국은 수천 년이나 앞서갔으면서도 어째서 뒤늦게 출발한 유럽에 추월당하고 말았을까?
유럽은 상인 계급과 자본주의가 발달했고 발명품에 대한 특허권을 보호했으며 절대 군주나 무거운 세금이 없었고, 또한 경험주의적 탐구정신을 중시하는 그리스적 유대교적 기독교적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직접적 원인들에 대해 우리는 궁극적인 원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런 직접적 요인들은 어째서 중국이나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아니라 하필 유럽에서 발생했을까?
BC 4000년~3000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국가들이 탄생한 후 처음에는 힘의 중심이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제국들 사이를 번갈아 이동하면서 줄곧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BC 4세기 말 알렉산더대왕 치하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로부터 동쪽으로 인도까지 정복하면서 드디어 힘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돌이킬 수 없는 첫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BC 2세기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힘의 중심은 서쪽으로 더 이동했고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다시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이동했다.
이 같은 이동의 주요 요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금방 자명해진다. 옛날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했던 많은 지역이 지금은 사막, 반사막, 스텝으로 변하거나 토양이 심하게 침식되거나 염분이 너무 많거나 해서 농업에 부적합한 땅이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 동부 일대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많은 지역이 숲으로 덮여 있었다. 이 일대가 원래의 비옥한 삼림지대로부터 침식된 잡목 지대 또는 사막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식물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서도 자세히 밝혀졌다.
이곳의 숲은 농업을 하기 위해 개간하고 건축용 목재를 구하기 위해 벌채하고 땔감으로 쓰거나 회반죽을 만들기 위해 태우는 바람에 사라지고 말았다. 더구나 이 일대는 강우량이 적어서 처음부터 생산성이 낮은 편이었다. 따라서 식물이 자라는 속도가 파괴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는데, 특히 지나치게 많은 염소를 방목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땅을 덮고 있던 나무와 풀이 사라지면서 토양 침식이 진행되어 계곡에 침니(沈泥)가 쌓였고, 강우량이 적은 환경에서 관개농업을 했으므로 자연히 염분이 축적되었다.
그리하여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지중해 동부의 인간사회는 생태학적 불모지에서 탄생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원의 기반을 스스로 파괴하는 생태학적 자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동쪽에 있던 가장 오래된 사회들부터 시작하여 지중해 동부의 사회가 차례차례 자멸함에 따라 힘의 중심은 차츰 서쪽으로 이동했다. 북유럽과 서유럽이 그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이 현명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더 강인한 환경, 즉 강우량이 더 많아서 식물이 더 빨리 재성장할 수 있는 곳에 사는 행운을 타고났다. 사실상 유럽은 농작물, 가축, 기술, 문자 등을 모두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부터 받아드린 셈인데, 그 이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힘과 혁신의 중심지라는 위치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유럽보다 앞서가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추월당하게 된 과정이다.
8. 중국은 어쩌다 기술의 선도자 위치를 유럽에 추월당했을까?
세계적으로 인구가 가장 많은 6개국 중에서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5개국은 최근에 와서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나라들이며 지금도 수백 개 언어와 민족 집단이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는 원래 모스코바를 중심으로 한 작은 슬라브족 국가였는데 우랄산맥을 넘어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582년부터였다. 그때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수십 개의 비 슬라브계 민족들을 흡수했으며 그중 많은 민족들은 지금까지도 각자 고유의 언어와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도 최근에 이룩된 정치적 창조물이며 각각 850개, 670개, 210개 언어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예외다. 중국은 BC 221년에 이미 정치적으로 통일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그 상태를 유지했다.
현대 유럽에서는 변형된 수십 가지 알파벳이 사용되고 있는데 중국의 경우는 문자가 생긴 이후로 오직 하나의 문자 체계밖에 없었다. 중국의 12억 인구 중에서 8억 이상이 만다린 어(표준 중국어)를 사용한다.
이는 전 세계에서 단연 최다 인구가 모국어를 사용하는 언어다. 더구나 나머지 인구 중에서 3억 정도가 사용하고 있는 7가지 언어도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가 유사한 것만큼이나 만다린 어와 유사한 언어들이다.
물론 중국에는 8개 언어 이외에 130개 이상의 소수 언어가 있으나 각각 언어의 사용자 수는 몇 천 명밖에 안 된다.
세계 어디든 오랫동안 사람이 살던 지역이라면 으레 언어가 다양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중국의 언어가 거의 통일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뉴기니 면적이 중국의 10분의 1 이하이며 인류의 역사도 약 40000년밖에 안 되었지만 언어의 수는 1000개에 달하고 그 속에는 또 수십 개 어군이 있으며 각각의 어군 사이의 차이는 중국의 주요 8가지 언어보다 훨씬 크다.
서유럽에서는 인도유럽어가 들어온 이후 고작 6000년~8000년 사이에 약 40가지 언어가 새로 생기거나 도입되었다. 그중에는 영어, 핀란드어, 러시아어처럼 서로 판이하게 다른 언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50만년이 넘었다. 인구가 많은 다른 나라들처럼 중국도 한때는 다양성을 가진 나라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나긴 기간 동안 중국에는 서로 뚜렷이 다른 수천, 수만 개의 언어가 생겨났을 텐데, 그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 해답은 바로 중국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일찍 통일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식량생산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거의 맞먹을 만큼 일찍 시작되었고, 북중국에서 남중국까지 그리고 해안지방에서 티베트 고원의 고산지대까지 생태학적으로 다양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농작물과 가축, 기술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광활하고 생산성이 높은 땅을 차지한 덕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고, 비옥한 초승달 지대보다 덜 건조하여 생태학적으로 덜 취약한 환경이었으므로 10000년 가까이 농업을 계속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산성 높은 집약 농업을 유지할 정도인 것이다.
중국의 세계 최초 기술에는 주철,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 등 수많은 문물이 포함되어 있다. 또 중국은 항해술, 제해권 등에서도 세계를 선도했다. 15세기 초에는 수백 척의 배로 구성된 보물선 선단을 파견했는데, 그중 가장 큰 배의 경우 길이가 120m에 달했으며 총 인원도 28000명에 달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보잘것없는 세 척의 배로 아메리카에 도달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중국이 어떻게 하여 자기들보다 낙후했던 유럽에게 기술의 선도자 위치를 빼앗겼을까?
중국 보물선 선단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
1405년~1433년에 일곱 차례의 선단이 중국을 떠나 항해했는데 중국 조정의 두 파벌(환관과 그 반대파)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났었다.
권력투쟁에서 선단을 파견하고 지휘하는 일에 동조한 환관 쪽이 패하고 반대파가 승리하자 곧 선단 파견은 중단되고 결국은 조선소마저 해체하고 해양 항해를 금지했다.
이 사건을 보면 중국이 유럽과 다른 점은 중국 전역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번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 전역에서 선단 파견이 중단되었고 일시적이었던 이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의 양주 공의 신하가 되었고, 다시 포르투갈 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왕에게 해양 탐험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자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였다. 그들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요청했을 때는 결국 허락해 주었다.
콜럼버스가 다섯 번째 설득 노력에서 성공한 것은 바로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유럽의 대포, 전기 조명, 인쇄술, 등등 무수한 혁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모두가 처음에는 무시당하거나 반대에 부딪혔지만 한 지역에서 채택만 되면 결국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유럽의 분열에서 비롯된 이 같은 결과는 중국의 통일이 빚어낸 결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조정은 해외 항해 외에도 이따금씩 중단을 결정했다. 14세기에는 정교한 수력 방적기의 개발을 포기함으로써 산업혁명 문턱에서 물러났고, 세계의 시계제작 기술을 선도하고 있던 기계식 시계를 파기 또는 사실상 전폐해 버렸으며, 이러한 일방적 기술개발의 중단은 15세기 말 이후의 기계장치나 기술 전반에 후퇴를 자초하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휩쓴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한 명 또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 때문에 전국의 모든 학교가 5년 동안이나 문을 닫았던 것은 하나의 좋은 예다.
중국은 통일되어 있을 때가 많았고 유럽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역들은 BC 221년에 처음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문자가 생긴 이후 문자 체계라고는 하나뿐이었으며, 장장 2000년 동안이나 문화적 통일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유럽은 14세기까지도 1000개에 달하는 독립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500년에는 500개 소국으로, 1980년대에는 최소 25개국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늘어나 이제는 40개국에 이른다. 언어 또한 아직도 45개 언어가 존재하며 문화적으로는 더욱 다양하다.
BC 221년 중국이 통일된 이후에도 몇 차례의 분열 시대가 있었지만 언제나 재통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샤를마누 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등 강력한 정복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통일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절정기의 로마제국도 유럽 면적의 절반 이상은 지배하지 못했다. 즉 중국에서처럼 유럽에는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분열된 유럽은 박해받는 개혁자에게 피난처와 그 외의 지원책을 제공하고 각 나라 사이의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기술, 과학, 자본주의의 진보를 육성했지만 통합된 중국은 그러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중국의 국가 체계는 현대 과학의 출연에 필요한 대부분의 조건들을 억압했다.
지리적으로 분열된 유럽에서는 정치적 집단 사이의 경쟁이 혁신을 자극한 반면 통합된 중국에서는 그러한 경쟁 부재가 혁신을 주춤하게 했다.
그렇다면 유럽보다 정치적으로 분열 정도가 더 심하면 더 좋아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인도는 지리적으로 유럽보다 훨씬 더 분열되어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덜 혁신적이었다. ‘최적 분열의 법칙’에서 혁신은 분열이 최적에서 중간 정도에 머문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일어나고 지나치게 통합되었거나 너무 분열된 사회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