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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3, 끝)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

작성자만촌 전석락|작성시간18.01.15|조회수993 목록 댓글 2

 

9.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

 

대부분의 일본인은 일본의 기원을 BC 20000년 전 빙하기에 일본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점차 진화한 것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기마민족이 AD 4세기경 한국을 거쳐 일본을 정복했을 것이라는 이론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이 이론대로라면 그들은 결코 한국인이 아니다.

반면 서구의 많은 고고학자와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이론은 일본인이 BC 400년을 전후해 한국에서 벼농사와 함께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 개의 이론에서 거론된 사람들 모두가 뒤섞여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946년까지 일본의 학교에서는 AD 712년과 AD 720년에 쓰인 연대기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사의 신화를 가르쳤다.

이 연대기는 창조신 이자나기의 왼쪽 눈에서 태어난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손자인 니니기를 일본 규슈지방에 내려 보내 지상의 신과 결혼을 시켰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니니기의 증손자 진무는 신성한 새의 도움으로 그의 적을 무력화하고 BC 660년 일본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BC 660년이라는 연도와 일본 왕실이 등장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 사이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연대기는 13명의 가공의 왕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오늘날 일본과 동아시아 해안가는 얕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빙하기에는 마른 육지였으며 바닷물은 빙하 속에 갇혀 수위는 현재보다 약 150m 아래였었다.

그 시기 북쪽 홋카이도는 사할린 섬에서 러시아 본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했고 남쪽 규슈는 한반도 남쪽 대한해협과 이어지는 다리였다.

오늘의 일본 열도는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의 황해와 동중국해는 중국 본토까지 육지로 확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매머드가 다리처럼 이어진 육지를 통하여 일본으로 걸어 들어가고 그 무리에 현재 일본의 곰이나 원숭이의 조상뿐만 아니라 고대 인류의 조상도 포함되었을 것이란 가정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빙하기의 일본은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영국이나 캐나다처럼 빙하로 완전히 덮였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은 메말라, 인간이 먹고 살만한 작물이라곤 하나도 없는 수풀이 덮인 땅이었다.

빙하기의 일본인들은 이런 환경을 개척하면서 성숙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30000년 정도 전에 뗀석기(打製石器) 대신 날카로운 간석기(磨製石器)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류 중 한 무리였다.

영국 고고학계에서는 간석기의 발명이야말로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향하는 거대한 문화적 진보를 낳는 수단이라 설명하는데, 그런 석기는 영국에서 식량생산 문화가 시작하던 7000여 년 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13000년 전, 전 세계의 빙하는 급속도로 녹기 시작했고 일본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다. 기후, 강수량, 습도 등 모든 것이 증가했다.

작물의 생산성은 오늘날 일본 수준으로 높아졌고 빙하기 때 일본 남부지방에만 분포했던 견과류를 맺는 낙엽수는 북부 침엽수림이 있던 곳까지 영역을 넓혔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일본에는 일본 역사상 가장 중대한 두 가지 변화 중 첫 번째 변화가 도래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고대 일본인이 만든 토기는 토기가 굳기 전에 진흙 위에 새끼줄을 굴리거나 눌러 장식을 하였는데 이를 두고 새끼줄 무늬라는 뜻의 승문(繩文) , 일본 발음으로 조몬(繩文)’이라 불렀다. 최초의 조몬 토기는 12700년 전 일본 남단의 섬 규슈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로서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유럽 것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져 1960년에 발표되었다.

그 후 조몬 토기는 일본 북쪽으로 전파되어 9500년쯤 오늘의 도쿄 일대로 퍼졌으며 최북단 홋카이도에는 7000년 전쯤 당도하였다.

토기의 북상 과정은 견과류가 풍부한 낙엽수의 북상과 시기를 같이하는데 식량이 많아지면서 정주생활과 토기가 늘어났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토기의 발명으로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고 다양한 식재료를 향유할 수 있게 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조몬인은 지금의 일본인과는 다른 아이누(Ainu)족의 원조상을 말한다. 홋카이도와 사할린에 일부 남아 있는 아이누족은 하이(蝦夷) 또는 모인(毛人)이라 적고, 에조 또는 에미시라 읽는다. 이들은 털이 많은데 그 털이 새우처럼 길고 뻣뻣하다고 해서 새우 하()자와 털 모()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이들은 키가 작고 얼굴이 네모지며 광대뼈가 나오고 눈에 쌍꺼풀이 있는 폴리네시아인 계통으로 짐작된다.

조몬인은 기원전 300년 무렵 갑자기 등장한 야요이인의 세력에 밀려 점차 생활터전을 내주고 환경이 열악한 북쪽으로 쫓겨나 홋카이도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1869년 메이지 정부는 에조의 공식명칭을 아이누라고 했다. 동시에에조의 땅이라는 뜻으로 불리던 에조치(蝦夷地)’홋카이도(北海道)’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홋카이도의 아이누는 2006년 현재 23,782명으로 집계되는데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규슈 -

 

조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이 남긴 수천 개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쓰레기 더미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조개더미 유적에서 그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결과를 종합해 보면 그들은 사냥과 채집을 했고 낚시를 했으며 다양하고 균형 잡힌 식생활을 했다.

주식은 견과류로 밤과 호두, 쓴맛을 제거한 도토리, 칠엽수 열매 등을 많이 먹었다. 조몬 시대에도 연어, 참치 등을 잡고 돌고래를 얕은 바다로 유인해 잡는 등 해산물도 많이 소비했다. 조몬인들의 두개골에는 외이도 외골증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는 오늘날 잠수부들에게도 나타나는 증상으로 당시에도 잠수하여 어패류 등을 채집한 것으로 보인다. 수렵으로는 멧돼지와 사슴이 주된 사냥감이었고 이어서 산양과 곰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집약 농경을 하지 못하고 미숙한 시도를 해보는데 그쳤다.

개를 기르지 않았으며(아마 돼지도) 이렇다 할 가축도 없었다. 금속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고 문자도 없었으며 옷감도 짜지 않았다. 조몬인이 살던 마을과 무덤가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집도 무덤도 없었다. 사회 계층은 미미하게 분화되었으며 족장이나 지도자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모든 부정적 요소는 중국 본토와 한국의 당시 상황과 대조적이다.

BC 400년경 당시 중국은 부유한 엘리트 계층과 가난한 평민으로 이루어진 여러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취락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제국을 형성하려던 무렵이다.

BC 7500년 초엽 중국 북부에서는 기장을, 남부에서는 벼를 기반으로 한 집약 농경이 발전했고, 돼지와 닭, 물소 등도 사육했다. 그때 중국은 글을 쓰기 시작한지 이미 900년이 지난 후였으며, 금속 도구를 쓴 지도 1500년이나 된 무렵이었다.

중국의 발전된 문물은 한국으로 전파되었는데 한국 역시 BC 2200년경부터 벼농사를 하였으며 BC 1000년경부터는 금속을 사용했다.

 

이러한 조몬인들에게 일어난 두 번째(첫 번째는 토기의 발명) 결정적 변화는 BC 400년경 한반도 남부로부터 도래한 새로운 생활양식(사람들도 도래했을지도 모른다)에 의한 두 번째 인구의 폭발 증가를 경험하며 촉발되었다.

규슈지방에서 처음 시작한 새로운 생활양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기를 이용하고 벼를 경작하는 농경문화였다.

 

이 새로운 생활양식의 토기는 1884년 도쿄 외곽 야요이(彌生)라는 곳(현 도쿄대학 후문 근처)에서 처음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조몬 토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한국의 민무늬토기와 비슷한 무문 토기였으며 이후 이런 토기가 일본 각지에서 출토되었다. 그것이 대략 AD 3세기까지의 유적에서 나옴에 따라 이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르며 일본역사에서 BC 3세기부터 AD 3세기까지 600년간을 말한다.

                                                                          -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규슈 -

 

야요이(彌生) 문화의 많은 요소들은 확실히 한국적이었으며 일본의 이전 시대와 상당히 달랐다. 동제 물품, 직조기술, 유리구슬, 땅에 묻는 쌀 저장 항아리, 죽은 사람을 독에 넣어 묻는 풍습, 한국식 도구와 집 등이 그 예다.

야요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작물은 벼였지만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된 27종의 곡류와 완벽히 가축화된 돼지 역시 이 시대의 특징적인 산물이다.

 

10. 일본인 조상에 관한 세 가지 학설

 

일본 문화는 1만여 년간 지속된 조몬 시대보다 700여 년간의 짧은 야요이 시대에 훨씬 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조몬 시대의 정체성과 야요이 시대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는 대비는 일본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현대 일본인의 조상은 조몬인일까 야요이인일까? 아니면 그 둘의 혼혈일까?

일본에는 이 세 가지 학설을 둘러싼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첫 번째 학설은 조몬의 수렵채집인 자체가 점차 현대 일본인으로 진화했다는 의견이다. 그들은 이미 수천 년간 마을을 이뤄 정착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농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야요이 시대로의 변화는 아마도 조몬 사회가 좀 더 많이 식량을 생산해 인구 증가를 가능케 한 추위에 강한 볍씨와 관개수로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 이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두 번째 학설은 많은 한국인이 농업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이주하였다는 가설이다. 야요이 일본은 한국에서 수백만의 이주자가 도래하여 조몬인을 압도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면 이때 한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인가.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강성해져있었다. 일찍이 국가체제를 갖추고 많은 전쟁 경험이 있었던 중국의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해왔다. 결국 고조선은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위지동이전에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의 왕인 준()은 궁중 사람들과 좌우의 측근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馬韓)이라 했다.”

 

이 여파로 한반도의 정세는 격변했다. 한반도 남쪽의 삼한과 북쪽의 부여를 비롯한 만주의 소국들이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위하여 세력을 다투면서 서로 병합해갔다.

부여에서 한 갈래 튀어나와 고구려가 등장하고 또 고구려에서 한 갈래 갈라져 백제가 건국한다. 진한 12개국이 6개국이 되고 그중 사로국이 신라로 성장한다. 변한에서는 가야 6국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고고학에서는 삼국시대로 가는 기원의 단계라고 해서 원삼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원삼국시대의 고대국가 탄생 과정에서 최초의 승자는 삼국과 가야였다. 우리 역사책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패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패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세력들의 일부는 승자들의 지배를 받느니 신천지를 찾아 떠났다. 그들이 일본까지 건너간 것이었다. 보트 피플이고 이민자였다. 한반도의 정세변화는 많은 집단을 이민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마침 해류는 한반도 남해안·서해안과 규슈를 자연스럽게 뱃길로 이어주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을 도래인이라고 한다.

                                                                               -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 규슈) -

 

세 번째 학설은 한국에서 이주가 이뤄졌다는 증거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규모였다는 견해는 부정한다. 대신에 생산성 높은 벼농사를 짓는 농경으로 조몬의 수렵채집민보다 인구가 빠르게 불어나 결국 조몬인을 압도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겨우 5000명의 한국인이 규수에 이주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이 벼농사를 지으며 년 1%씩 인구 증가를 한다면 700년 후면 5000명의 이주자는 500만 명의 자손을 남길 것이고 조몬인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일본인에 관한 이 세 학설 중에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나타난 비슷한 양상의 변화와 비교해 보았을 때, 두 번째나 세 번째 학설이 필자에게는 첫 번째 학설보다 더 타당하게 보인다.

 

최근 몇 년간 분자유전학자들은 고대 인류의 유골에서 DNA를 추출하여 고대 일본인과 현대인의 모집단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결론은 한국인/야요이 인 쪽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아이누인/조몬 인의 유전자는 한국인 이주자들이 가장 많이 도착하고 조몬 인의 인구가 가장 적었던 일본 서남부에서 제일 희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견과류 숲이 울창하고 조몬 인의 인구 밀도가 가장 높으며 야요이 인의 벼농사가 번성하지 못한 일본 북부 지역에서는 아이누/조몬 인의 유전자 구성 비율이 제일 높다.

그리고 조몬 인의 두개골은 현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인과 가장 닮았다. 따라서 1869년 점령하여 일본으로 편입된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에 살고 있는 아이누 인들은 조몬 인의 후손일 확률이 크고 현대의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도래한 야요이 인의 자손일 확률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일본어와 아이누어 사이에 뚜렷한 관련이 없고, 일본어와 한국어 역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겨우 2400년 전에 민족의 융합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아이누어를 살펴보자. 아이누어는 홋카이도에서 살던 아이누 인들이 사용했던 언어다. 홋카이도의 조몬 인 역시 아이누어와 비슷한 말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규슈의 조몬 인은 분명 다른 언어를 썼을 것이다. 규슈의 남쪽 끝에서 홋카이도의 북쪽 끝까지 일본 열도의 총 길이는 2400Km에 달한다. 이로 인해 조몬 시대에는 도구 제작 기술과 토기 형태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고,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역사적으로도 계속된 정치적 분쟁을 불러왔다. 10000년 동안 조몬 시대가 지속되면서 그에 상응하는 언어적 다양성 역시 크게 발달했을 것이다.

아이누어가 일본 북단에서만 사용되던 언어였다면 남단의 규슈에서 사용되던 조몬 어는 폴리네시아와 인도네시아어 및 타이완의 토착어가 속하는 오스트로네시아 어족과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일본어가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해 왔다. 고대 타이완인은 뛰어난 해상민족이었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사방으로 진출해 흩어졌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북상하여 규슈에 도달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BC 400년경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들의 언어를 고대 야요이어의 원형이라고 간주하기도 어렵다. 한국은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한 AD 676년 이전에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현대 한국어는 이 중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언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신라는 일본과 그다지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한국의 초기 연대기를 보면 삼국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신라에 복속된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는 후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전해지는 고구려어 단어를 보면 현대 한국어보다 오히려 옛 일본어의 그것과 더욱 유사하다.

삼국이 통일되기 전인 BC 400년경 한반도의 언어는 보다 다양한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전해져 현대 일본어의 기원이 되었던 한반도의 언어는 현대 한국어의 기원이 된 신라의 언어와는 크게 달랐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한국인과 일본인은 언어보다 외모나 유전자에서 더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인의 기원에 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조몬 인들이 환경에 적응해왔다는 변형설, 야요이 인들이 조몬 인들을 정복하고 정착했다는 인종 치환설, 일본 열도 원주민과 도래 인의 혼혈이라는 혼혈설 등이다.

요시노가리 유적지(규슈 사가현 간자키군 3개 마을에 있는 유적지 한반도에서 벼농사 등이 전해진 유물이 발굴됨)에서 출토된 인골들의 DNA를 분석한 결과 평균 수명이 40세가 못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개골을 측량해본 결과 두 유형이 나타났다. 하나는 키가 140센티미터 정도로 작고 얼굴이 네모난 인골이고, 다른 하나는 키가 160센티미터 정도이고 얼굴이 계란형으로 길다. 그 차이는 중학생과 대학생 정도라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조몬인 인 아이누 계통으로 피지배층이고 후자는 한국인 계통의 도래 인들로 지배층이었다고 추정된다.

 

도쿄대 인류학 교수 하니와라 가즈로의 일본인의 성립(1995)은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그동안의 학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결국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 인들이 아이누 계통의 일본 원주민과 반복적인 혼혈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는데 도래 인의 비율은 규슈 지역과 오사카·나라의 긴키 지역이 약간 차이를 보여준다고 했다.

최근 언론 보도(한국일보2012.11.1)에 따르면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의 사이토 나루야 교수 팀이 일본 본토인·중국인·서구인 460명과 아이누·오키나와인 71명의 DNA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일본인류학회가 펴내는 국제 학술지 Journal of Uuman Genetics인터넷판에 소개했는데, 한반도 도래 인과 일본 원주민의 반복적인 혼혈 과정을 거친 것이 오늘날의 일본인이라는 혼혈설의 시나리오가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인의 형성에 한반도인의 피가 많이 섞여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당시 야요이 문화를 주도한 것이 한반도 도래 인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공론화되지 않고 있다. 일본인으로서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2003년 개정 증보판을 내면서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글에서 지금까지 일본 고대사와 일본인 형성에 한반도 인이 준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어왔지만 농경문화를 가져온 한반도 인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인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설을 지지했다.

그는 당시 한반도인은 일부가 아니라 집단으로 이주해왔다고 보았다.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된 이유는 역시 수경재배에 의한 벼농사로 획득한 부와 이를 바탕으로 기존 토착세력을 물리치고 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논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였다.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과 동시에 많은 차이점이 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같은 언어 뿌리에서 2천년 정도 분화가 나타난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어와 일본어가 지금 정도로 차이가 나려면 4천년은 필요하다. 그런데 야요이 시대는 23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지금 한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신라어가 이어진 것이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언어는 (고조선 계통의) 고구려어라고 보았으며, 이미 그때 삼국의 언어는 상당히 분화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삼국의 언어로 분화하기 전의 고조선 어라는 견해다.

정말로 탁견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도 해결된 셈이다.

                                                                                -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규슈 -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이러한 반목은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부터 쌓아 온 친분관계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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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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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낙솔 | 작성시간 18.01.15 삼국유사 탈해왕 기록에
    그는 본디 龍城國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지요.
    저자 일연은 용성을 倭國의 동북쪽 천리 밖에 있다고 해설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할린 근처가 되는 셈이지요.
    석탈해는 아이누 족의 후예일지 모릅니다.
    지금 일본열도에서 아이누 족이 멸종되어가듯
    한반도에서 석씨가 희성이 되어가는 것과 상통하네요.
    그리고 김씨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인종청소되듯 신라에서 소멸되어가는데
    야요이에게 조몬 인들이 청소되는 것과도 비슷하네요.
    또 하나, 진한 여섯 부족 중에
    習比部 薛씨촌이 원효 설총의 중흥기가 있었음에도
    석씨와 함께 몰락하는 미스터리가 있는데
    설씨도 아이누 계통일지 궁금하네요.
  • 작성자만촌 전석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1.15 글쎄요, 낙솔의 궁금증에 정확히 답할 능력이 없네요.
    그러나 총,균,쇠에서 언급했드시 아이누 족의 원 조상인 조몬인이
    폴리네시아(남방) 계통이라고 한다면,
    석탈해나 설총 가계는 아이누 족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약 10여 년 전 경목 기우회 회우들과 일본 호카이도 여행 시에 낙솔도 함께 갔었지요.
    그 때 아이누 유적지와 민속촌을 구경했었는데,
    그들 얼굴 모습이나 피부색이 분명 남방 계통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리고 DNA 분석에서도 아이누 족은 남방계통으로 밝혀져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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