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헬레니즘 -로마시대의 철학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기원전 323년)한 이후로 그리스 문화에 동양적 요소들이 흘러들어 왔고, 이로 인해 지금까지 없었던 아주 독특한 세계주의적 인류 문화로 변모해 갔다. 이때의 문화를 두고 19세기 독일 역사학자인 드로이젠은 헬레니즘이라 불렀다. 고대철학의 제3기에 해당하는 헬레니즘시대의 철학은 키니코스학파, 회의론자, 에피쿠로스학파, 그리고 중심 스토아학파로서 구체적인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철학은 항상 그 시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이어서, 오랫동안 전쟁이 이어졌기 때문에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자연히 혼란스러운 밖의 세계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구원과 행복을 얻으려고 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 역시 정치적 자유를 잃고 있던 터라 국가사회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내면세계로 가라앉아 자기의 安心立命만을 구했다.
그래서 철학이 논리학·형이상학·윤리학 등으로 한정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개인의 처세를 둘러싼 윤리학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또한 이 시대의 후반부에 들어와서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신음하던 여러 민족들이 세상의 허무함과 인간의 무력감을 느끼고 초인간적인 신에게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때부터 많은 종교 사상들이 여기저기에서 어지럽게 나타나게 되었는데, 예수가 등장한 이후 기독교에 의해 비로소 종교 분야가 통일에 이르게 된다.
1) 키니코스(Cynics)학파
먼저 무대에 등장한 키니코스학파는 오늘날의 아웃사이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운동을 이끈 최초의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플라톤과 동시대인인 안티스테네스로서,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노동자와 같은 옷을 입고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살았다. 키니코스학파는 명예와 부를 멀리하고 자연과 일체된 삶을 강조했던 금욕주의 학파로서, 이들의 학문을 시니시즘(cynicism)이라고 부른다.
‘키니코스’는 그리스어 ‘개’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까닭에 견유(犬儒)학파라고 불린다. 이 키니코스라는 말에 어원을 둔 cynical이라는 형용사는 ‘냉소적’ ‘조롱적인’의 뜻을 가진다.
안티스테네스의 후계자는 디오게네스로서, 그는 모든 전통과 관습을 비웃었다. 그는 씻지도 않고, 더러운 외투를 걸치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한 마디로 노숙자처럼, 개처럼, 통속에서 살았다.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디오게네스가 거처하는 항아리 통속 주거지를 찾아왔다. 대왕이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해 줄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
그 한 마디뿐이었다.
2) 스토아학파 - 품격 있는 삶
스토아학파란 이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BC335경~BC263)이 아테네 아고라 광장의 돌기둥 사이를 거닐면서 가르친 데서 유래한다. ‘스토아’란 돌기둥을 뜻하고, ‘아고라’는 시민 생활 중심지로서, 시장이 열리고 의회와 법정이 있던 곳이다.
스토아학파는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문화를 거쳐 기원후 2세기까지 이어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주요 학파가 되었다. 특히 폭군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BC4?~AD65?)와 명상록을 남긴 마지막 5현재 아우렐리우스(AD121~180) 로마 황제는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다.
<세네카의 죽음> 루카 지오르다노 17세기 경 작품
네로 황제는 역모 혐의로 그의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을 명한다.
세네카는 스스로 팔과 다리의 혈관을 끊었지만 숨이 멈추지 않자 하인에게 독약을 가져오라고 했다.
스토아학파는 철학적 발전을 위한 업적보다는 인지도와 역량이 컸으며 스토아 철학을 현실 속에서 능동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신의 뜻, 즉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평등하다고 보는 세계시민주의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을 우리는 보통 금욕주의라고 부른다. 이들은 참된 행복이 쾌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를 잘 준수하고 자칫 감정에 사로잡히기 쉬운 자신을 이겨내며 욕정을 단념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대로 인간의 본성은 이성이기 때문에 그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이 덕이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스토아철학을 좀 더 살펴보자.
첫째, 스토아학파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세계주의로 나아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을 갖는다는 보편성에 입각해서 개인과 개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국가적 제한이나 민족적 편견을 부수고 전 인류의 공통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의 세계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로마제국의 정책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는 선민사상에 따라 배타적이기만 했던 유대교를 개방적인 기독교로 발전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엄격한 금욕주의적 윤리를 예찬한 점이나 재물을 가볍게 본 점, 그리고 민족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 모든 인간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둘째,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든 개인은 이성적 존재이면서 전체의 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실 서로 친척 관계에 있다고 봤다. 인종에 관계없이 인간은 형제자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하고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 못지않게 인류에 대한 사랑도 실천해야 한다.
셋째, 스토아학파는 자연법사상을 불러일으켰다. 자연법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자유·평등·생명권 등 어느 나라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지켜져야 하는 영원한 법이다. 실정법과 대립되는 의미인 이 자연법은 키케로(BC106~BC43)를 통해 로마 법률에 흘러들었다. 당시 로마법은 노예나 여자 또는 미성년자를 차별했는데, 스토아 사상을 가진 황제들이 자연법사상을 끌어들여 만민법의 기초가 되게 했다. 나아가 자연법은 근세의 계몽주의나 민주주의 이념의 뿌리가 되었다.
3) 에피쿠로스학파 - 쾌락주의
스토아학파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에피쿠로스학파다. 이 학파의 시조 에피쿠로스(BC341~BC270)는 아테네 외곽 정원에 학교를 설립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이 때문에 정원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행복이며, 인간은 어느 때 행복하냐에 따라 주장이 달라진다. 가령 스토아학파들은 덕을 실현할 때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쾌락이라고 말한다. 즉 모든 행복은 즐거움과 관계되어 있으며 즐거움(快樂)은 우리에게 좋은 것(善)이 되고, 불행을 가져오는 불쾌는 우리에게 나쁜 것(惡)이 될 수밖에 없다. 즉 快樂은 善이고 不快는 惡이다.
이렇게 보자면 학문도 인류에게 고통보다는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이어야 하고, 도덕이라는 것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종교 또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가져다줄지언정,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협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정신적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 쾌락의 강도는 육체적 쾌락보다 더 강하다. 인간은 정신력으로 육체적 고통을 제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나에게 빵과 물만 있다면, 나의 행복을 제우스신의 그것과 견주리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스토아학파가 행복을 ‘덕스러운 생활’에 있다고 봄으로써 금욕주의의 입장이었던 반면, 에피쿠로스학파는 “행복이란 곧 쾌락에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학문이나 도덕이 인간의 쾌락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한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봤다. 예컨대 우리가 자연이나 세계에 대해 열심히 탐구하는 것은 헛된 망상과 미신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고 마음을 유쾌하게 갖기 위해서다. 이러한 입장에서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그 목적에 적합하다고 봤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빈 공간과 그 안에서 운동하는 원자뿐이다. 그리고 세계 만물은 이 원자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신이나 절대자, 불가사의한 요괴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신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 자체가 미신이라 생각했다.
4) 로마 사회와 사상, 로마법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 민족의 정신생활 내면에서 유기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데 비하여 로마인의 정신생활은 철학의 발생, 성장에 적합한 지반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단지 상류계급 사람들의 교양을 위해 쓰여 졌다. 이러한 외적 조건에 근거해 그리스에서 이식된 그리스의 제 학설을 배양함으로서 로마 철학사상은 형성되었다. 따라서 로마인으로서 독자적인 철학 파를 창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로마 철학의 특색은 로마 사회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리스 철학을 절충하려고 시도한 점에 있다. 로마인 사이에 가장 많은 동조자를 얻은 것은 스토아 철학이다.
로마에 건너 온 그리스의 폴리비오스(BC204~122)의 정치사상은 로마인에게 상당히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키케로(BC106~43)는 철학자 또는 사상가로서 로마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키케로는 그리스 철학의 제 원리를 로마의 정치적 혁신을 위해 이용하는 동시에 로마의 정치생활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그리스 철학을 수정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한편에서는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다른 한편에서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등에서 사상을 채택하여 이들을 융합하고 절충함으로써 자기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로마인의 긍지는 실은 광대한 세계를 정복해서 이것을 조직적으로 통치·지배한 점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의 우월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수입 섭취에 노력했지만, 이 세련된 문화를 가진 그리스인에 대해서는 퇴폐적인 망국민으로서 멸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키케로는 ‘덕(德)은 우리들 자신에, 지(智)는 그들 그리스인으로’라고 한 말에서 이것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 철학을 로마에 도입하는 것에 노력하고 자신의 저서가 그리스 철학자의 책의 모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자인한 키케로가 감히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인의 유덕성이고, 또 국가 및 법의 문제에 있어서의 탁월성이었다.
로마법이 ‘로마법 대전’이라는 형태로 포괄적으로 편찬된 것은 시대를 훨씬 내려가서 동서로마제국 분열 후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483~565)의 치세 하에서였지만, 원래 소박한 도시법으로부터 출발한 로마법이 시민법과 함께 만민법마저도 포함한 세계의 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로마의 지중해 정복의 결과였다.
이 세계국가에 있어서 로마 시민과 시민권을 갖지 않은 자와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거래의 규율을 중심으로 발달한 ‘만민법’은 세계·우주를 관통하는 로고스를 주장하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사상의 영향 하에 완성된다.
키케로도 만민법은 ‘자연법의 영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법의 독특한 특색은 어디까지나 법을 도덕으로부터 분리하고 법학의 체계를 철학이나 종교로부터 분리 독립시킨 점에 있다.
“로마는 세 번 세계를 통일시켰다. 제1차는 무력에 의해 통일하고, 제2차는 로마(서로마제국)의 몰락 후 종교(그리스도교)에 의해 교회의 통일을 초래하였으며, 제3차는 중세에 있어서 로마법 계승에 의해 법의 통일을 발생시킨 것으로, 뒤의 2, 3차 통일은 정신의 힘에 의한 세계의 통일이다”라고 한 것은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1818~1892)이 <로마법의 정신>에서 한 말이다.
5)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와 키케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났다. 키케로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에서도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의 탄생이 이루어진 주요한 시기에 걸쳐 있다. 학문적 재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야심까지 있었던 그의 삶이 그리 순탄치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집정관(콘솔)과 국부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비밀 협약에서 비롯된 삼두체제가 시작되면서 키케로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하여 그리스로 망명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 쪽을 선택한 그는 카이사르 천하가 되자 칩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했다.
<카이사르의 암살> 빈센조 카무치니, 1798년 작
BC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다. 키케로는 암살 현장에서 원로원의 다른 사람들과 그 광경을 보았지만, 브루투스 일당의 음모에 애초부터 감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죽자 로마가 다시 공화정제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로마에서는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미 60대가 된 키케로는 명성이 절정에 달해있었다. 폼페이우스에서 카이사르에 이르는 여러 유력자가 하나하나 쓰러진 상황에서, 이제 그는 원로 정치가나 다름없었다. 키케로는 본인의 영향력을 이용해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에 당선되도록 도와주었는데, 이는 개인적 호의 보다는 공화제로 복귀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안토니우스를 견제하려는 조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러 키케로의 바람을 저버리고 BC43년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새로운 삼두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협정을 맺는다. 세 사람은 협정의 제물로 각자에게 중요한, 그러나 피차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을 하나씩 제거하기로 합의한다.
레피두스는 친동생을, 안토니우스는 외삼촌을, 그리고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는 키케로를 제물로 바치기로 합의했다.
키케로는 해외로 피신하려는 계획을 채 성사시기도 전에 달려온 병사들을 보고 키케로는 가마에 탄 상태로 순순히 목을 내밀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칼을 맞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