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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 입문 (7) 근대 철학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작성자만촌 전석락|작성시간18.03.23|조회수2,194 목록 댓글 2


제4부 근대사회 계몽사상의 대두와 형성


교회가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주는 영향이 차차 약해지자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통하여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사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난 근대 사상은 17~18세기에 체계를 세웠다고 볼 수 있으며, 이제 철학의 역사는 맹목적이고 억압적인 중세의 종교 중심적 생각에서 인간 중심의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그 방향을 바꾼다.


계몽사상은 서양의 17~18세기에 걸친 철학의 중요한 목표였으며, 또한 교육 내용이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보다 스스로 한 잘못으로 빠진 미성숙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계몽이란 생각과 행위에 있어서 강제가 아닌 자유와 개인의식의 강조다. 계몽의 방법은 합리론적 혹은 이성적 방법과 경험론적 방법으로 나뉜다.

합리론은 독일과 프랑스 중심의 철학 이론으로 세계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논리적 구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론은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철학 방법으로,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한 경험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세계를 알게 되며, 그 결과로 세계의 질서에 관하여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계몽의 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시민계급이 급성장하고, 대중 교육과 자유무역이 촉진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려는 법조문이 잇따라 발표되며, 국가 권력과 국민의 권리에 관한 많은 이론이 등장한다.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 1776년 미국의 <인권선언>,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민주주의는 국민의 권리로 자리 잡는다.


1. 대륙의 합리론


먼저 합리론은 인간의 본질은 이성에 있으며 인간의 이성 또한 신의 이성의 일부라고 본다. 우리의 선천적 인식능력인 이성을 신뢰하고, 어떤 하나의 명제로부터 개별적 명제를 도출하는 연역적 방법을 주로 택한다.
프랑스·네덜란드·독일 등 유럽의 대륙 쪽에서는 인간의 선천적 이성을 신뢰하고, 수학을 언제 어디서나 보편타당한 학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몇 가지 중요한 기본 개념들로 전체적인 철학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경향이 합리론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17세기 유럽의 모든 사상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철학 가운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데카르트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1596~1650)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유의 주체인 ‘나’가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이 명제처럼 우리가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확실한 것이 틀림없다고 봤다. 이러한 관점에서 데카르트는 신과 세계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도출해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하나의 혁명이다. 왜 그런가?
중세 유럽은 철저하게 교회가 지배했다. 그렇다고 그 천 년 동안 오롯하게 교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 교회는 세속의 정치가 뺨칠 정도로 탐욕에 물든 성직자들의 암투와 타락으로 스스로 제 목에 밧줄을 걸기도 했고, 세속의 정치와 대결하고 또는 타협하면서 교묘하게 권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부패 세력과 반부패 세력의 갈등과 긴장이 교차하면서 교회는 점진적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
정치와 달리 지식의 경우는 완전히 교회의 독점체제였다. 모든 책은 수도원에 보관되고 검열되었다. 중세의 신학과 철학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완전한 속성의 진리를 스스로 알 수 없다고 천명했다. 완전성이란 창조주인 신의 영역이지 피조물인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알거나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자인 신의 은총을 입는 것뿐이었다. 이른바 은총설이나 조명설이다. 진리는 오직 교회의 전유물이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지식의 독점에 반기를 들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의 대표적 명제는 인식의 전제조건으로 의심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도 위험했다. 교회는 데카르트를 이단으로 여겼으며, 그가 죽은 뒤 13년 후 그의 저서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이전까지는 교회라는 가장 강력한 권위가 모든 지식의 위계를 결정하는 순간 그것은 결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것을 의심하겠다고 나섰다. 이미 그 자체가 도전이었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결과, 데카르트가 얻은 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의심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의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짧은 문장 하나는 그렇게 ‘중세를 상대로 한 결별통보’가 되었다. 기도로 얻는 것도, 은총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생각하는 나’에 의해 얻어진 진실이다. 교회의 권위가 개입할 수 없는 인식의 출발이었다. 그게 바로 확실성이다.


이렇게 데카르트에 의해 근대의 싹이 텄다. 근대정신의 독립선언과 같은 이 선언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 및 현대 정신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 사유의 혁명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이끈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혁명은 현실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전까지 눈치 보며 묵묵히 순응해야만 했던 권위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아’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 사람들이 현실을 깨우치고 여전히 권력의 절대성에만 집착하는 기득 세력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게 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물론 당시의 여러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작동되었지만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발아되고 계몽주의로 각성된 시민의 사유가 혁명의 간과할 수 없는 동인이다. 그러니 철학이 부재한 시대와 민중은 결코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철학을 일종의 수학으로 삼으려 했다. 다시 말해 엄격한 연역적 방법을 사용해서 모든 것을 하나의 근본개념으로부터 이끌어내고자 했다.


2) 스피노자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의 조상은 스페인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으로 그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의 사상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데서 시작한다.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범신론의 사상을 역설했는데 괴테가 그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평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파문을 당하는 등 비난과 질타를 받으면서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했다. 또한 렌즈를 닦아 생활비를 조달했는데 러셀은 그를“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고결하고 매력적인 철학자”라고 묘사한바 있다.



흔히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언정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말을 상기하면서 그가 낙천적인 기질을 가졌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철학에는 숙명적 체념과 같은 것이 담겨 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동양적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혹자는 스피노자 학설을 부처의 가르침과 비교하기도 한다.


2. 영국의 경험론


영국 시민사회의 발전을 크게 진전시킨 것은 두 정치혁명, 즉 청교도혁명(1649년)과 명예혁명(1688년)이었다. 산업시민계층을 주요 세력으로 의회에 진출한 청교도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영국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교도세력은 분열되고 크롬웰에 의한 독제정치가 시작됨으로써 스튜어트왕조의 찰스 2세가 국왕으로 추대되는 왕정복고(1660년)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절대주의적 왕정이 아니라 의회를 통해 시민계급의 발언권을 대폭 수용하는 입헌군주제였다.
그런데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가 과거의 절대왕제를 꿈꾸고 왕권의 절대화를 꾀함으로써 영국 국민은 무혈혁명(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를 추방하고 윌리엄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영국 혁명


17세기에 두 번의 시민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더욱이 그것이 시민세력이라는 광범위한 기반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베이컨, 홉스 이래의 경험주의적 전통과 맞물려 영국사상을 시민계층의 일상생활에 뿌리박게 만들었다.
즉 영국의 사상은 프랑스나 독일에서와 같이 정치적·종교적 비판의 예리한 무기가 되거나 국민적 소망이 이념적 표현의 형태로 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발전과정을 위한 기초가 되고 역사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민의 권리주장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여기에 로크이후의 ‘영국경험론’ 사상은 시민적 인간학의 기초로서 형이상학을 대신하는 인식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특히 로크의 사상이 18세기 ‘계몽사상’의 원전으로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경험론이란 뜬구름 잡기식의 탁상공론이나 사변(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논리적 사고만으로 현실 또는 사물을 인식하려는 일)을 배척하고 모든 학문의 기초를 경험에 두려고 한 철학적 경향을 말한다. 즉, 경험론은 지식의 원천이 이성보다도 경험에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사조이며, 이성이야 말로 지식의 근원이라고 하는 합리론과 대비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탈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나, 소피스트,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등과 중세 유명론(‘오직 이름뿐’이라는 개념으로 신도 이데아도 모두 이름뿐,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등도 모두 경험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영국 경험론과 그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실증주의와 돌바크(1723~1789) 등의 유물론, 미국의 실용주의, 오스트리아의 마하(1838~1916)의 현상주의와 빈 학파로 대표되는 논리실증주의도 모두 큰 의미의 경험론에 포함된다.
                                  
경험론이 처음으로 방법론적으로 준비된 것은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에 의해서였다. 그는 경험을 근거로 하여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홉스(1588~1679)는 유물론적인 감각론을 제창하여 독특한 지식론을 전했다. 로크(1632~1704)에 의해 기초가 다져지고 흄(1711~1776)에 의해 완성된 경험의 철학은 17~18세기 영국 시민사회 형성원리가 된 기본이며 영국적 철학이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의 경험론과 구별하는 차원에서 고전경험론이라고 불리어진다.


경험론은 합리론의 생득(生得)관념(또는 본유(本有)관념)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사태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론으로서는 합리론의 생득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백지설(빈서판)’이다. 흔히 로크의 백지설로 알려져 있는데, 이 용어를 주요하게 사용한 사람은 로크가 아니라 라이프니츠(1646~1716)였다.
백지설은 대륙의 합리론에 대한 정면 비판이기도 했고, 영국 특유의 발생론적 시각과 인과론적 사유의 발로이기도 했다. 백지설에 따르면 모든 관념은 후천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아무런 지식도 없는 백지 상태다. 지식은 그 위에 경험한 것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는 게 백지설의 골자다.


경험은 감각을 통해 수용된다. 경험의 주체는 감각기관이고 감각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경험론은 합리론과 완전히 다른 철학적 사유의 방법과 태도였지만, ‘보편적 이성’을 지닌 ‘보편적 자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나 자신이 사유의 주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게 바로 시대정신이고 근대사상의 핵심이다. 모든 인식의 중심은 바로 나다! 이 얼마나 놀랍고 도발적인가.


자아가 사유의 주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합리론은 이성에 의한 보편적 인식을 도출한다. 그것은 강자에게 매우 매력적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의 인식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마땅히 나의 견해에 동의해야 한다는 권력의지가 작동되는 경우 자칫 획일성과 독재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경험론은 그런 보편적 인식을 거부한다. 심지어 흄은 인식과 주체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면서도 그 본질은 포기하지 않았다. 인식의 출발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 나 자신이다.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먼저 싹튼 것은 여러 요인들의 결과물이지만 무엇보다 경험론적 인식의 바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1) 존 로크


철학과 수학 그리고 자연과학 등을 연구했으며, 특히 의학을 공부해서 의학자격증까지 얻었다. 한때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고, 권리장전의 작성에도 가담했다. 17세기 사상의 출발점에 영향을 준 것이 데카르트 철학이라면, 18세기 사상의 새로운 기초를 쌓은 것은 로크의 사상이었다. 지금까지 데카르트 철학의 범주에 머물렀던 영국사상은 로크에 와서 이를 탈피하여 유럽사상 전체를 주도하게 되었다.

로크의 사상은 인간의 기본능력으로서의 ‘오성(悟性, understanding)’을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로크에 의하면 오성이란 생각하는 주체적 능력이며, 이것을 직접 대상으로서 음미할 수는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마음의 직접적인 대상’인 관념을 고찰함으로써 오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


                                                                 존 로크                                


그는 데카르트식의 ‘생득관념(본유관념, 인간의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있다고 주장되는 관념)’을 부정하고 일체의 관념이 경험에 의해 파생되며 ‘감각’과 ‘반성’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의 철학은 버클리와 흄에 의해 후대로 이어졌으며, 정치사상은 프랑스 몽테스키외가 발전시켜 미국의 헌법에도 구현되었다. 또한 그의 자유주의적 교육사상은 루소에 의해 유럽대륙으로 전파되었고, 마침내 모든 계몽주의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로크의 교육론은 매우 진보적이다. 로크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어떤 틀을 뒤집어씌워서는  안 되고, 그들이 스스로 발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교훈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펼쳐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폭력을 가할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성숙한 개성에 이르도록 자주성을 신장시켜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질을 꿰뚫어봐야만 한다. 학생들이 놀면서 배우도록 하는 것이 로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강제적인 규칙이 따르는 공립교육보다 개인 교육이 더 낫다고 봤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적 교육은 루소에 의해 대륙으로 전파되었고, 로크 또한 계몽주의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로크의 사상, 특히 그의 정치론은 18세기 프랑스 사상계에 충격을 주었고, 프랑스 계몽사상을 낳게 하였다. 또한 이것은 프랑스 계몽사상을 통해 유럽전역에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시민사회의 발달이 순조롭게 진전된 영국에서는 로크의 사상이 정치론보다는 오히려 인식론의 형태로 전개되어 버클리(1685~1753), 흄(1711~1776)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영국 경험론’의 계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계몽주의의 특징은 이신론과 자연주의다. 이신론(理神論)이란 신을 최초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운행에 대해서는 신의 개입을 부정하는 입장을 말한다.
신을 그저 기계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에게 기적이나 계시처럼 초자연적인 것을 행할 자유가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는 이성 안에만 있다.
영국 계몽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자유주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을 주장한 로크의 이론과 국가권력의 분립과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을 주장한 로크의 교육사상은 영국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가 싹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그의 계몽주의적 자유사상과 인권설은 유럽과 미국은 물론, 현대의 거의 모든 헌법, 특히 기본법의 뿌리가 되었다.


2) 아담 스미스


시민사회의 현실적 영역으로서의 경제사회를 정면으로 다루고 영국경험론적인 방법으로 ‘고전경제학’을 창시한 것은 바로 아담 스미스(1723~1790)였다. 처음에 도덕철학 교수였던 스미스는 뒤에《국부론》과《도덕 감정론》과 같은 주요 저서를 남겼다.


그는 물리세계의 일반 원리를 체계화한 뉴턴을 모범으로 삼아 사회 세계의 일반 원리를 체계화하려고 했다. 그는《도덕 감정론》에서 공감에 근거해 도덕적 행위의 원리를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국부론》에서 정치경제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자신을 경제학자라고 부른 적도 없고 그렇게 불리는 건 질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Economist라는 말이 ‘자린고비’ 쯤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경제학이라는 게 독립적 학문으로 자리 잡은 건 20세기 들어서이다).


그가《국부론》에서 주장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 즉 약자를 억압하고 상공인들의 배를 불려서 국부를 증대시키려는 국가의 개입에 대한 비판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 복지를 실질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요즘 경제민주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의 원천을 노동에서 구하는 사고방식은 이미 로크나 버클리에서 나타났지만 스미스는 이보다 더욱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즉 스미스는 사회를 상품생산자에 의해서 구성되는 상업사회로 규정하고, 거기에서의 교환가치를 노동의 양으로부터 구하였다.


스미스에 의하면 초기 미개사회에서는 이러한 교환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본이 축적되고 토지가 사유화된 상업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량에 알맞은 생산물을 교환에 의하여 얻을 수 없게 되고, 빈부의 차가 점차 심해지면서 부자와 빈민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업사회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경제활동에 대한 제약을 없애고 인간본성이자 경제적 본능인 이기심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스미스는 보았다.
즉 이기심의 자유로운 발동은 근면과 절약을 가져오게 하여 이득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은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되어 사회의 이익과 진보에 공헌한다. 이러한 스미스의 사상은 영국 중산층의 사상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프니츠 사상과 훌륭하게 조응함으로써 근대시민사회의 이상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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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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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낙솔 | 작성시간 18.03.24 어려운 부분입니다.
    메리여왕 시절 해적선으로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괘멸시킨 영국은
    이후 그런 조폭기질을 살려 혁명을 연이어 성공시키지요.
    이런 경향이 철학에서도 반영됐다고 봅니다.
    경험론이란 현실적 가능성을 도출하는 것이지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전환 같기도 합니다.
  • 작성자만촌 전석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3.24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영국은 유럽의 변방국에 지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비밀리에 해적 노릇을 도왔다는 설도 있지요.
    그러나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큰 힘은
    기동성 좋은 작은 배에 장거리 대포를 장착해
    치고 빠지는 작전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 당시에도 영국의 대포 제작기술만은 월등했다고 합니다.
    세계사 속의 유대인 이야기를 보면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성공은
    유대인의 재정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7~18세기 가장 먼저 시민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고,
    또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세계 최강의 영국이 되었지요.
    이런 것들이 영국 경험론의 주요 배경이 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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