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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 입문(13) 현대(20세기) 철학 (실존주의)

작성자만촌 전석락|작성시간18.04.04|조회수678 목록 댓글 0

2. 실존주의


헤겔의 이성철학에 대한 반발은 실존주의로 나타난다. 헤겔의 변증법에 의한 대립 해소는 관념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 세계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 있는 각 개인의 주체적 진리에 주목한다. 그것은 실존주의가 현대의 위기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한 사상이고, 근대의 관념론, 합리주의가 부딪힌 철학적 고찰상태를 타개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인간을 주체적인 자각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입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와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와 사회 가운데 개인의 생존과 사상에 일찍이 없었던 위기와 혼돈, 불안과 동요를 초래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던졌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열린 것이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온 사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의 위기적 상황에 직면해서 불안, 절망, 허무의 의식에 빠져 있던 인간이 이것을 극복하여 본래의 자유로운 주체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한 사상이 실존주의이다. 즉 실존주의는 인간 하나하나의 철저한 자각과 상실된 자유로운 창조적 주체성의 회복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실존주의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실존주의 철학자의 기본 입장은 인간 자신을 세계 안에 주어진 단순한 사실로서 받아드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이에 대하여 분명한 설명을 하려고 한다. 인간의 특징에 관한 자연과학적 설명을 넘어서서 사유하는 존재로서 정신적인 것에서 인간의 특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실존주의 혹은 실존철학은 기존의 철학적 전통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인간에 관하여 새롭게 이해하려고 한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키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 등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와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자가 있다. 이 밖에 실존주의 사상은 릴케, 카프카, 카뮈의 문학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1) 키르케고르, 실존주의 선구자


실존주의적 사상 경향은 20세기에 들어와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미 19세기 전반에 덴마크의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우수와 고뇌의 일생을 통해 처음으로 ‘실존’을 제기하였다. 그는 니체와 더불어 실존철학의 기초를 다진 사람으로 꼽힌다.


                            


키르케고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독일의 관념론은 구체적인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에게는 이론보다는 삶 자체가 중요했다.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주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을 주장한다 해도,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읽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나의 실존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헤겔이 주장한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 반기를 든다. 진리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일회적이고 내면적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중요하다.

키르케고르에게 ‘나’는 모든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키르케고르는 인간 모두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병들어 있는 사람은 의사가 진단내리기 전까지 자신이 건강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절망상태임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환자는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의사를 찾아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얼마나 절망 속에 빠져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절망에서 빠져나올 길도 찾게 될 터이다.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에 따라, 절망의 정도를 나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하지만 그 때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것은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인간의 처참한 운명에서 유래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그 병은 영원히 구원될 수 없는 정신의 병이다. 실력 있는 의사라면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다운 철학자라면 “이 세상에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 《공포와 전율》등이 있다.


2) 후설의 현상학


현상학은 “사상(事象, 어떤 일이나 현상) 그 자체로 돌아가라”를 모토로 삼는다. 즉, 현상학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학문이다.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은 2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유대계 출신의 독일 철학자다. 그의 저서는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세대의 유럽사상가 및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의 실존주의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후설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모든 과학의 총체성으로서 철학의 근본적인 토대를 마련할 수 없기에 칸트 철학을 벗어나고자 했다. 후설의 현상학은 자연적인 현상을 최종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과학의 무비판적 자기이해에 대응하면서 전개되었다. 후설은 인간성의 위기는 과학의 실증주의에서 야기된 이론적 위기와 결합되었으며, 그 결과 삶이 소외된 객관주의가 나타났다고 보았다.



   후설의 현상학과 실존철학


3) 야스퍼스


칼 야스퍼스(1883~1969)는 하이데거와 함께 현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처음 정신병리학을 공부하고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철학 체계는 세계, 실존, 초월자(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가치 전환적인 서구 사상적 위기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 준다. 그의 부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 나치 정권은 그를 독일에서 추방하여 그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



4)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20세기 독일의 실존철학의 대표자로, 그는 후설의 후계자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이어 그 대학의 총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나치가 패망하자 히틀러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 외에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오솔길> 등이 있다.



하이데거는 지금까지 서구 유럽의 형이상학이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철학은 통속적 의미의 존재만을 따졌을 뿐, 근원적인 의미의 존재는 아예 문제 삼지도 않은 존재를 망각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이상학을 쳐부수는 대신, 그것이 진정한 의미인 기초 존재론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렇다면 기초 존재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현존재)에 관한 것이다. 다른 존재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 가운데서 존재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고, 또 존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존재를 분석하는 일이 기초 존재론의 첫 번째 과제다.


그렇다면 현존재란 무엇일까?
현존재는 실존이라고 해석되는데, 그것은 첫째, 세계 안의 존재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공간적인 의미만은 아니고, 모든 현존재의 근본구조 자체를 뜻한다는 것이다.
둘째, 현존재는 염려다. 우리 인간은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현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셋째, 현존재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다. 죽음 앞에 섰을 때, 현존재는 결국 자신이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날마다 시시각각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인간이 결국 한순간을 살다 가는 존재임을 실감하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화(無化)되는 상태에서 불안을 느낀다. 인간의 불안은 자신의 존재 전체가 스스로 궤도 상실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다급한 심정에서 유래한다.
인간이 시간이라는 지평선 안에서 찰나를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깨닫게 한다. 이제 죽음은 무작정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의 삶을 유일하고도 가치 있는 것으로 깨닫게 해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5) 사르트르


프랑스 실존주의가 나름의 독창적인 방향을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중심에 철학자보다 작가로 더 잘 알려진 장 폴 사르트르(1909~1980)가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초반에는 독일군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직접 참여했고, 1945년부터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자유문필가로 살았다. 1952년에는 공산주의 운동에도 가담했으나 그 후 당을 이탈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사르트르는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서재에서 마음껏 책을 보는 등 자유분방하게 지냈다.
프랑스 국립대학 시절 작가인 시몬 보부아르를 만나 그녀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삶의 반려자로 지냈다. 사르트르가 이 학교를 수석으로, 보부아르가 차석으로 나란히 졸업했다.
사르트르는 작은 키로 유머러스한 성격 덕분에 사람들을 곧잘 웃기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그는 이미 세 살 때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고, 66세 때는 왼쪽 눈마저 시력이 떨어져서 독서는 물론 집필도 못하였다.

같은 시대의 실존주의 문학가 카뮈와 교제하면서 정치적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거절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만 치우쳐 있어서 그 공정성을 잃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후설이 현상학에서 “대상(존재)이란 항상 의식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라고 하였으나 사르트르는 존재는 인간에 의해 의식되건 않건 간에 그 자체로서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옛날부터 존재라는 개념은 철학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존재는 이미 신적인 것도, 더없이 높은 초월자도 아니다. 창조되지도 않았고 존재할 이유도 없으며 다른 존재와의 어떠한 관계도 없는 무의미한 것, 그가 쓴 책의 이름처럼 그저 <구토>를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철학적 전통에 대한 하나의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6) 카뮈


알베르트 카뮈(1913~1960)는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던 알제리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아버지가 전사하자 청각장애가 있던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고학으로 알제리대학을 나왔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조직에 참여하여 나치에 저항했다.



사르트르와 친분이 있었던 알베르 카뮈는 사실 철학자라기보다는 소설 극작가이지만 그의 실존주의적 문학 작품은 실존주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카뮈가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는 ‘무의미함’과 ‘저항’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이방인》,《시지프의 신화》,《페스트》등 많은 작품을 썼다.《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서 펼쳐 보인 것이라면《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 상의 인물 시지프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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