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비판이론
비판이론의 주제는 현대의 산업자본주의 아래 민주주의라는 미명으로 교묘하게 숨어 있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벗겨내어 고발하고 인간과 이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비판이론의 어원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따온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비판이 마비된 사회와 반대가 없는 사회는 파쇼적 권위주의의 정치 지배가 파놓은 현대문명의 함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체제에 대한 도전,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말한 ‘위대한 거부’는 인간 회복 선언이자 현재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대한 학문적 저항이라 할 수 있다.
비판이론의 온상이 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연구소는 1923년에 창설되어 나치 정권이 수립된 이듬해인 1934년에 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미국 뉴욕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부설기관으로 있다가 전쟁이 끝난 다음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 왔다.
비판이론이 나오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먼저 1920년대 말, 유럽은 어떤 상태였는가? 자유기업 경제체제가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으며 사회주의 역시 그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새롭게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등장했지만, 독일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긴박한 위기에 몰려 있었다.
비판이론은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생활과 각 개인들의 심리적 발달, 문화적 산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즉 학문·종교·예술·법률·관습·여론·오락·스포츠와 같은 문화적 산물이 자본주의 경제구조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를 조종해서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게 하고, 이에 상응하는 현실 긍정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비판이론이 신좌파의 이념적 지주로 각광을 받은 때가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반체제 학생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그러했는데 1964년 미국의 버클리에서 자유 성토운동이 조직되고, 1970년 프랑스 파리에서의 학생 데모, 1971년 독일의 학생운동이 그 뒤를 따랐다.
비판이론가들이 이성·자유·정의가 단순히 연구해야 할 이론적 주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을 때, 이른바 운동 세력들은 대단히 호감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구성원들 상호간의 합의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을 강조했을 때, 비판이론가들은 이제 그들의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이제 비판이론에 대해 열광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고발정신과 비판정신은 이 시대에도 매우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일차원적 자기만족을 즐기며 권위주의적인 비리를 눈감아 버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의 일부 기득권 계층과 중산층에 이들의 외침은 뜨끔한 경종으로 메아리쳐 올 것이다.
1)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1895~1973)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 사회학자로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 학자다. 철학에 사회학·정치학·경제학·심리학 등 여러 분야를 받아드려 일종의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말하자면 인간을 그 전체적인 모습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적극적으로 사회연구소 활동을 계속하면서 아도르노와 공동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을 집필했다. 전쟁이 끝난 후 평생 친구인 아도르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대학총장을 지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도 유대인으로 독일의 사회학자·철학자·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다. 체계성을 거부하고 근대문명에 대해 독자적 비판을 제시했다.
허버트 마르쿠제(1898~1979)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로써,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참여한다.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에 신좌파운동의 대변인 및 이론가로서 부상하여 많은 학생과 젊은이들의 신좌익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마르크스, 마오쩌둥과 더불어 3M 중의 한 명이라고 불러지기도 했다.
2) 하버마스
위르겐 하버마스(1929~ )는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 철학과 사회학 강의를 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마르쿠제보다 극단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주역’으로 기대한 것은 잘못이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이미 물질적인 수요를 충분히 즐기고 있기 때문에 혁명에 대한 의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꼭두각시에 불과한 그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위한 창조자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하버마스는 비판적 지식을 갖춘 학생집단에 주목했다. 비록 학생들이 혁명을 주도할 수는 없겠지만 해방을 향한 잠재력을 생산해내고 전파하는 역할은 충분히 해낼 것으로 봤던 것이다.
4. 미국의 실용주의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주민들은 원주민과 싸우고 황무지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위험과 고통의 역사에서 이론을 위한 관념적 사상보다 삶의 개척을 위한 실천적 원리가 필요했다. 이 생활철학이 오늘날 미국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실용주의다.
분석철학이 형이상학이나 종교같이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하려는 의도로 논리를 전개해나갔다면, 미국에서 일어난 프래그머티즘은 이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은 철학과 종교를 함께 끌어안으려는 시도로 점화되었다.
영국의 청교도가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미국 사회에서, 종교는 매우 중요한 신념이었다. 반면 과학적 성과들에 힘입은 공업화와 산업화의 급속한 발전은 신학과는 전혀 다른 과학의 현실적 힘을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윈이 들고 나온 과학적 사고에 기반 한 진화론은 종교적 신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의 갈등 속에서 쉽게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며, 이는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의 개척정신과 자본주의 정신에도 더없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프래그머티즘은 그리스어 pragma에서 유래한 것으로 행동과 실천을 중히 여기는 철학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가치문제도 중요시한다. 그리고 진리와 가치를 미래와 관련지어 파악하며, 또한 사회를 존중한다. 즉 미래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철학이다.
1) 퍼스
C. S. 퍼스(1839~1914)는 미국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이면서 현대의 기호이론에 많은 공헌을 했다.
2) 제임스
퍼스의 실용주의를 하나의 철학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하버드대학의 교수였던 W. 제임스(1839~1914)는 실용주의를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들을 무시하고,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나 실상에 주목하려는 입장”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제임스는 어떤 관념이나 개념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현금 가치를 갖느냐고 묻는다. 미국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윤이나 성과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제임스는 “실제로 얻어진 결과에 의해 가치가 인정되는 것만이 참이다”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미국인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3) 듀이
실용주의를 완성한 분이다. 듀이는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명제를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J. 듀이(1859~1952)는 인간의 사고나 관념이란 더욱 나은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지성이나 지식은 미래의 행동을 위한 도구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을 도구주의라고 한다.
그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데 특히 중요한 것이 교육이며, 교육이란 넓은 의미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성과 정서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학교제도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5. 분석철학
초경험적·사변적 방법에 의지하는 형이상학을 배격하고자 하는 철학에는 실용주의 외에 분석철학이 있다. 다만 분석철학에서는 “철학의 주요 임무란 어떤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기호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철학의 모든 문제도 과학적 방법으로 하나하나 확실하게 해결한다고 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수단으로 언어와 기호의 분석만을 철학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영미와 영어권 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분석철학은 공리주의와 실증주의의 토양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이 분석철학은 과학철학이라는 성격을 가장 많이 드러내고 있으며, 이 분야의 철학자 중에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아서 현대 과학을 신뢰하는 20세기의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철학의 기원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고전학파의 신실재론과 독일 경험비판론의 흐름을 계승한 빈 학파의 논리적 실증주의 운동이다. 이 두 철학운동은 서로 관련을 가지고 발전했고 이러한 발전을 더욱 촉진시킨 것은 수학과 물리학의 급격한 발전에 자극을 받아 확립된 이른바 기호논리학이다.
(1) 프레게
고트로브 프레게(1848~1925)는 분석철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깊은 영향을 끼친 독일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 현대 수학논리학의 창시자로 인정을 받는다.
독일 예나대학의 수학 교수였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러셀은 프레게가 자신이나 비트겐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의 저서에 언급하고 있다.
프레게가 평생 동안 연구한 것은 산수였다. 수는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 중의 하나로서, 산수에는 이런 수에 대한 다양한 문장들이 있다. 여기서 2+3=5는 수에 관한 참인 문장이지만, 2+2=5는 수에 관한 거짓 문장이다.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이란 너무나도 자명해서 특별한 증명이나 정당화가 필요 없는 문장을 말한다. 즉 2+3=5가 참인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한 논리적 진리로부터 추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론’을 다루는 학문이 논리학이다. 다시 말해 논리학은 전제로부터 결론으로의 추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학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가 말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이고, 결론이 말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러셀
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저술가로, 신념을 양심적으로 지켜나간 도덕가로서 널리 알려진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할아버지가 상원의원을 지낸 적이 있는 영국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러셀
1940년 뉴욕 주 대법원은 러셀의 작품에 대해 “음탕하고 호색적이며 편협하고 허위에 가득 차 있으며, 어떤 도덕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에 러셀은 ‘자유사상과 인간 이성의 대변자’라는 찬사 속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러셀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에서 출발한 평화에 관한 신념을 노년까지 잃지 않았고 국제적인 군비축소, 핵무기 포기, 베트남전쟁 종식을 위해 젊은이들과 더불어 거리에 나서서 투쟁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러셀의 반핵운동은 오늘날 국제사회의 많은 문제를 볼 때, 그 당시의 냉전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욱더 큰 의미가 있다.
그의 논리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수학의 원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스승인 화이트헤드의 협력을 얻어 완성한 것으로, 기호논리학의 발달사에서 하나의 금자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일찍이 라이프니츠가 우리의 논리적 사고 과정을 기호로 표시하려고 한 구상은 프레게 등에 의해 정밀한 기호논리학으로 확립되었다. 러셀은 바로 이들의 기호논리 사상에 심취하여 원자론적 세계관에 도달했는데, 이것을 논리적으로 순화한 이론이 곧 논리적 원자론이다.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은 어떤 사상이나 세계를 쪼개 나가면 그 이상 쪼갤 수 없는 독립적 단위에 도달하게 되며, 역으로 이와 같은 원자적인 단위들을 묶어 놓은 것이 바로 사상과 세계라고 주장한다. 분석적 사고를 명쾌히 표현한 러셀의 이러한 사상은 논리적 실증주의가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러셀은 인공적인 언어로서 수학적 언어의 구조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보통 언어의 구조에 대한 분석을 등한시하고 말았다. 이 점에서 그는 비록 분석철학의 선구자로 불리기는 하나 엄밀한 의미의 분석철학자로 분류되기는 어렵다. 분석철학이 철학으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기까지는 비트겐슈타인의 등장이 필요했다.
(3) 비트겐슈타인
현대 철학사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신화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철학적 업적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많은 삶에게 여전히 경이로운 철학자로 불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기업가였으며,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후원자였다. 그의 집을 드나들던 예술가는 구스타프 말러와 요하네스 브람스 등이 있었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 영향을 받아서 예술 쪽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중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독학하다가 베를린 공과대학을 거쳐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공학을 중단하고 케임브리지로 옮겨서 러셀을 찾아간다.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을 알아본 러셀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녔음에도 비트겐슈타인을 대등한 상대로 인정한다. 러셀은 제자인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을 “내 생애 자극적이고 지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회고한 바 있으며, 그를 ‘완벽한 천재의 모범’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으로 만나서 친구이자 협력자의 관계로 발전했으나, 나중에는 좋지 않은 모습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미 많은 재산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한 시인에게 기부했고, 전쟁이 끝났을 때는 ‘단순한 삶을 우해서’ 유산으로 받은 많은 재산을 포기한다. 그 뒤 비트겐슈타인은 수도원에서 정원사로 일하거나 시골의 교사로 일하면서 생활한 후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이미 출판한 《논리 철학 논고》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케임브리지의 특별 연구원으로 5년을 지낸 후 특별 명예교수로 임명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아일랜드로 떠나 그곳에서 은둔하면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죽기 2년 전에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삶과 철학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고,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함과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자신의 능력에 관해서도 완벽함을 요구했던 까닭에 생전에는 단 한 권의 책을 출판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생전에 죄의식과 절망감에 시달렸고 자주 자살을 생각했는데, 그 원인을 사람들은 부모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희생정신과 정직함은 그의 높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세미나는 지식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생전에 출판한 《논리 철학 논고》와 죽은 뒤에 출판한《철학 탐구》가 있다.
여하튼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을 탄생시킨 장본인으로서, 그의 《논리 철학 논고》에서 전개된 전기 사상과 《철학 탐구》에 담겨 있는 후기 사상은 매우 다르면서도 각각 다른 두 종류의 분석철학 성립에 큰 기여를 했다.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전개했던 논리적 원자론의 입장을 버린다. 대신 그는 이제 현실에서 사용하는 일상 언어의 분석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의 《철학 탐구》이며, 그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 일상 언어철학이다.
6. 논리실증주의
비트겐슈타인의 반 형이상학적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학파가 바로 논리실증주의다. 이 학파는 근대의 경험주의적·실증주의적 전통 위에 기반을 두고 특히 현대 과학의 발달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철학 운동이다.
이 운동의 모태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학파는 1923년 비엔나대학의 슐리크(1882~1936)를 중심으로 철학자·과학자·수학자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논리실증주의학파를 비엔나 학파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 대부분 학자들이 영국과 미국으로 망명하여 실질적으로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학자들의 꾸준한 활동으로 많은 동조자를 얻었으며, 특히 미국의 실용주의와 접촉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초기에는 비트겐슈타인도 참여했지만, 학파가 뚜렷한 성향을 천명하자 빠져버렸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을 배격했다. 형이상학적 주장이란 경험적으로 검정할 어떠한 수단도 없으므로, 결국 무의미하다. 가령 “절대자는 시간을 초월해 있다”와 같은 주장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검증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전혀 말 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는 형이상학이 공허하고 모호하다거나 또는 쓸모없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으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라고 몰아세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기본구상, 즉 그들의 목표는 통일과학을 이룩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물리학, 심리학, 자연과학, 문학, 철학 등 개별학문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통합하여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설립하려 했다. 이들의 통섭의 논리적 분석방법은 페아노, 프레게, 화이트헤드, 러셀, 비트겐슈타인을 거치면서 완성된 연역적 논증방식(이미 주어진 내용 속에 감추어진 진리를 명백히 드러내는 방법이기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