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현상과 양자역학
들어가면서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짐 알킬릴리와 분자유전학자인 존조 맥패든이 함께 쓴 『생명, 경계에 서다』는 양자역학을 통하여 생명현상을 다루는 ‘양자생물학(quantum biology)’에 관한 과학교양서이다. ‘양자생물학’이란 생물물리학(biological physics)의 한 분과라고 할 수 있다. 책 『생명, 경계에서다』 의 원저 제목 “Life On the Edge”의 ‘Edge’ 란 바로 고전역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양자역학 세계와의 경계(境界)를 의미한다.
작년 12월 초 서점에서 『생명, 경계에 서다』 두 권을 구입했다. 한권은 내가 읽기 위해서고, 다른 한 권은 전자공학을 전공한 낙솔에게 선물하여 양자역학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생물학의 대세였던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명현상을 양자역학으로 풀어가는 새로운 양자생물학 이야기라는 서평에 책 내용이 너무나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책은 울새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북유럽에 서식하는 유럽울새는 겨울이 되면 기후가 더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원서식지로 돌아온다. 몸길이가 12∼14cm 정도인 이 작은 새가 해마다 3천200km 정도를 이동하면서 길을 잃지 않는 비결은 지구의 자기장이다. 울새는 자기력선과 지표면이 이루는 경사의 각도를 측정하는 '경사나침반'과 같은 방식으로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해 이동한다. 울새의 몸에서 작동하는 생물학적 경사나침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의 영역인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유럽 울새
그러나 책 읽기는 쉽지가 않았다. 양자생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자의 ‘파동-입자 이동성’, ‘양자 터널링’, ‘중첩’, ‘양자 얽힘’, ‘결 어긋남’ 같은 키 워드를 이해하여야 했다. 이러한 양자의 세계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자기장을 이용한 새들의 이동, 세포 내에서 효소의 작용방식,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나는 호흡에서 전자 전달이 일어나는 이유, 식물의 광합성이 일어날 때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식, 후각과 시각, 그리고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까지 생명의 가장 기본현상이 양자역학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생명, 경계에서다』는 저자들의 연구 내용과 더불어 극히 최근에 발표된 논문을 인용한 내용이기에 책을 쉽게 요약하기는 필자의 실력으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생명, 경계에 서다』를 요약하면서 양자역학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이해하고 정리 해보기로 하였다. 현재 우리의 삶은 양자역학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하기에 양자역학, 그것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하였다.
제1장 양자역학의 역사
1.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된 양자역학
대단히 작은 미시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역학이론인 양자역학은 1920년대 중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원자의 행동과 그 원자를 구성하는 더 작은 입자들의 특성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원자 내에서 전자가 어떻게 배열되고 어떤 규칙을 따르는지를 묘사함으로써 양자역학은 화학과 물질과학과 심지어 전자공학의 토대가 된다. 사실 양자역학은 20세기 초반부터 우리의 삶의 일부분을 차지해 왔다.
물질에서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양자역학적 설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전자공학의 토대인 반도체의 작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도체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실리콘 트랜지스터와 마이크로칩, 더 나아가 컴퓨터의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자역학으로 인한 지식의 발달이 없었다면, 레이저는 물론이고 CD, DVD, 블루레이 플레이어도 없었을 것이다.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스마트폰도 없고 위성을 이용한 길 안내나 MRI 검사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선진국에서는 국내총생산의 3분의 1 이상을 양자세계의 역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응용기술에 의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래에는 레이저 유도 핵융합을 통해 거의 무한한 전력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공학, 생화학, 의학 분야에서 인공 분자 기계가 다방면에서 작업을 수행하고, 정보 전달에는 순간이동 같은 공상과학 기술이 일상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20세기에 시작된 양자 혁명은 21세기에 더욱 가속화되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 생활을 변모시킬 것이다.
2. 생물학자와 물리학자
MIT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은 세계적인 과학 명문으로 꼽힌다. 1861년에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설립된 이 학교는 2014년 현재 재직 교수 1000여 명 중에서 9명이 노벨상 수상자다. 그러나 MIT에서 가장 유명한 터줏대감은 사람이 아니다. 이 학교의 상징인 그레이트돔이라는 건물의 그늘 아래 있는 학장의 정원에서 자라는 사과나무다. 잉글랜드 왕립 식물원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잘라 이식한 이 나무는 아이작 뉴턴이 사과의 낙하를 관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과나무의 직계 후손이다.
350년 전 뉴턴은 왜 지구 중력의 끌어당김 같은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과일의 형성이라는 생명현상의 수수께끼는 완전히 지나쳐버린 것일까? 아이작 뉴턴이 이 문제에 호기심이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줄 수도 있는 한 가지 요인은 17세기의 지배적인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의 외적 메커니즘은 물리법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어도 물체 특유의 내적 동력인 활력, 즉 생명은 초자연적 원천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물학, 유전학, 생화학, 분자생물학이 어느 정도 발전하자 생기론이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주요 과학자 가운데 생명이 과학의 영역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어떤 과학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으며, 분자생물학과 양자역학이 나란히 발전했지만 협력하지는 않았다. 생물학자들이 물리학 강연에 참석하는 일은 드물었고, 물리학자들은 생물학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하나의 우주로 비유되며, 그 규명에는 생물학, 물리학, 화학 지식이 상호 보완에 의하지 않으면 그 정체를 밝힐 수 없음이 분명하다.
3. 양자혁명
왜 물질은 생명체를 이룰 때와 암석을 이룰 때 그렇게 다르게 행동할까? 바로 이것이 생명의 중심에 있는 수수께끼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인 1642년에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다. 뉴턴은 힘이 무생물의 운동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수학적으로 매우 잘 묘사했고, 오늘 날 이 체계는 뉴턴 역학이라 불린다. 뉴턴의 힘은 처음에는 무척 신비로운 존재였지만, 수 세기가 흐르는 동안 점차 에너지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움직이는 물체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움직이는 물체의 에너지는 정지 상태에 있는 물체에 부딪힐 때 전달되어 그 물체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힘은 떨어져 있는 물체들 사이에도 전달될 수 있다. 이런 힘의 예로는 뉴턴의 사과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지구의 중력과 나침반의 바늘을 움직이게 하는 자기력이 있다.
갈릴레이로부터 시작된 과학의 놀라운 발전은 18세기 들어 뉴턴에 의해 가속화되었고, 19세기 말엽에는 고전물리학이라고 알려진 학문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혀갔다. 당시에는 열과 빛 같은 다른 형태의 에너지도 원자와 분자 같은 물질의 구성 성분과 활발한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뜨거워지거나 빛을 발산하거나 색이 바뀌는 따위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물체는 입자로 구성되고, 입자의 운동은 중력이나 전자기력에 의해 조절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물질세계에 속하는 것 가운데 최소한 무생물 대상은 입자로 이루어진 가시적인 물질과 물질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두 가지 존재로 나뉘었다.
18세기와 19세기 계몽주의시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과학지식은 뉴턴 역학과 전자기학과 열역학을 낳았다. 그리고 이 물리학의 세 영역은 대포에서 시계, 폭풍우에서 증기기관차, 진자(振子)에서 행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거시적인 사물과 현상의 운동 및 특성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물질의 미시적인 구성 요소인 원자와 분자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물리학자들은 친숙한 법칙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물리학에 혁명이 요구됐다.
첫 번째 중대한 약진인 ‘양자’ 개념은 독일의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가 1900년 12월 14일 독일 물리학회의 한 세미나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왔다. 이날은 양자이론의 탄생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열복사선이 다른 형태의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간다는 게 통념이었다. 그러나 파동 이론으로는 뜨거운 물체가 에너지를 방사하는 방식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플랑크는 파격적인 생각을 내놓았다. 이런 뜨거운 물체 속에 있는 물질은 불연속적으로 분포하는 특정 파동으로만 진동하고, 그 결과 열에너지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불연속적인 작은 덩어리인 ‘양자’로만 복사된다는 것이었다.
그가 양자 이론을 제안하고 5년 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개념을 확장시켜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 복사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양자화’되어 있다고 제안했다.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꾸러미, 즉 입자를 이룬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빛의 입자를 광자(光子, photon)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광전효과라고 알려진 오랜 수수께끼가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제안했다. 광전효과는 빛을 비추면 물질에서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이 아닌 바로 이 연구로 1921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두 번째 큰 약진을 이뤄낸 인물은 덴마크의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였다. 원자의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보어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의 궤도를 자유롭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양자화’된) 특징 궤도에만 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전자가 낮은 궤도로 떨어지기 위해서는 관련된 두 궤도 사이의 에너지 차와 정확히 같은 값의 전자기 에너지 덩어리(광자), 즉 양자를 방출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높은 단계의 궤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에너지를 지닌 광자를 흡수해야만 한다.
세 번째 약진은 보어의 코펜하겐 물리학자 중의 독일의 젊은 천재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 의해서다. 그는 원자 속 전자의 위치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자 자체도 미지의 방식으로 모호하게 흩어져 있기 때문에 확실한 위치를 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것을 수학으로 증명했다. 1927년 이 개념은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되었고, 지금까지 전 세계 실험실에서 수천 번 이상 재확인되었다. 이 원리는 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발상 중의 하나이자 양자역학의 초석으로 남았다.
하이젠베르크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생각을 한창 발전시키던 때인 1926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에르빈 슈뢰딩거는 원자의 모습을 매우 다르게 표현한 논문을 한 편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슈뢰딩거는 공식 하나를 내놓았는데, 오늘날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알려진 이 공식은 입자가 움직이는 방식이 아닌 파동이 진행하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이 방정식의 제안에 따르면, 전자는 원자 속에서 핵 주위를 도는 동안 위치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입자라기보다는 원자 전체에 퍼져 있는 파동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측정하지 않으면 전자의 모습을 알 수 없다고 믿었던 반면, 슈뢰딩거는 관찰하지 않을 때에는 물리적 파동이었다가 관찰을 하면 개별적인 입자로 “붕괴”된다는 개념을 선호했다. 슈뢰딩거가 생각한 원자론은 파동역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설명은 양자역학의 수학에 대한 서로 다른 방식의 해석이며, 둘 다 저마다의 방식대로 옳다고 여겨진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한 제5회 국제 솔베이 물리학회에 참석한 학자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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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만촌 전석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4.28 둔하고 답답한 인간이다 보니
독서 광장을 빌려
부족한 지식을
요약 정리해
오래 간직할려는 욕심 때문이지요..
해평! 넓게 받아 주소서. -
작성자낙솔 작성시간 18.04.28 만촌은 참으로 솔직하고 겸손합니다.
반도체를 전공했다는 저 역시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냥 긍정하는 경우와 비슷하지요.
"엣다 모르겠다"하고 착점하는
바둑의 초읽기에 비교할 수 있겠네요.
"믿음으로 가는 나라"
어느 가스펠송의 가사인데요,
'양자나라'는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전의 고착된 지식이나 원리를 버려야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