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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사진

한라산 철쭉 산행(2026-06-03)

작성자강두환|작성시간26.06.07|조회수37 목록 댓글 0

새벽 3시,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단 세 시간 남짓 등 가죽을 붙였던 육신은 천근만천근 무겁게 내려앉지만, 머릿속에 '제주 한라산'이라는 다섯 글자가 스치는 순간 거짓말처럼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솟구친다.

설렘은 언제나 피로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묘약이다.

가만히 하늘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활짝 열리는 계절이다.

계절의 시계는 어느덧 초여름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고 있지만, 다행히 아직 대지를 조여오는 열량은 인간의 육체가 기꺼이 견뎌낼 만한 서늘함을 품고 있다.

산천을 수놓던 연두 빛의 여린 잎사귀들은 이제 제법 묵직한 초록의 외투로 갈아입으며 푸르름을 더해가고, 봄날을 하얗게 메웠던 아카시아와 이팝나무꽃들은 소리 소문 없이 자연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서운할 틈도 없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붉은 장미가 반갑게 손짓하며, 지쳐가는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눈부신 오월의 끝자락이자 유월의 시작이다.

5월의 여운을 뒤로하고, 6월 3일 지방선거로 찾아온 보배 같은 임시공휴일. 나는 또다시 산이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저 푸른 바다 건너 한라산으로 달려간다.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기를 소망하는 '행복한 산친구'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통하는 아홉 명의 다정한 동반자들이 오직 한라산의 철쭉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동행 길에 올랐다.

지방선거일이자 공휴일을 맞아 한라산 영실코스의 주차장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차를 돌릴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꺼이 들머리까지 이어진 2.5km의 아스팔트 길을 걸어 올라가기로 한다.

왕복으로 치면 무려 5km가 늘어나는 셈이다.

본래 계획된 산행 거리 11km에 이 길을 더하니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16km라는 거대한 숫자로 불어났다.

그러나 산을 품으러 온 자들에게 이 정도의 변수는 오히려 산이 허락한 깊은 은총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오늘의 한라산 기온은 최고 17도 안팎. 산을 오르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는 없을 것이다.

영실 들머리에서 등산화 끈을 다시 매고 장비를 점검한 뒤, 비로소 본격적인 산행의 첫발을 내딛는다.

어제 대지를 촉촉하게 적신 단비 덕분일까.

숲이 머금은 흙내음과 나무들의 숨결이 유독 싱그럽다.

가슴 깊은 곳까지 차오르는 맑은 공기에 호흡은 더없이 감미롭고 평온하다.

영실의 상징인 병풍바위로 향하는 가파른 급경사 계단길.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법도 한데, 한라산이 주는 묘한 영기(靈氣) 덕분인지 발걸음들이 가볍기만 하다.

그러나 병풍바위에 다다르기까지 주변의 풍경은 조금 아쉬운 탄식을 자아냈다.

목마르게 기대했던 분홍빛 철쭉들이 고산의 거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시들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은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철쭉이 떠난 자리를 붉은 병꽃과 은은한 보리수, 그리고 하얗게 피어난 마가목꽃들이 가득 채우며 아쉬워하는 우리를 따스하게 위로해 준다.

어떠하랴. 이 척박한 고산의 바위틈에서 제 이름을 지키며 피어난 이 꽃들이 구름처럼 반겨주니, 그 자체로 온전한 감사요 기쁨인 것을.

나무계단으로 정비된 급경사 구간은 허벅지를 팽팽하게 조여오며 인간의 체력을 시험하지만, 우리 행산 회원들은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서로의 발걸음을 격려하며 힘차게 고도를 높여간다.

깊은 계곡을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가 베이스를 깔아주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저마다의 음색으로 천상의 화음을 연주한다.

여기에 뺨을 스치는 살랑살랑한 산바람과 어제 내린 비가 만들어낸 신비로운 운무(雲霧)가 어우러지니, 산행은 고통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대서사시로 변모한다.

한라산이 가진 특유의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그 거대한 자연림 속에 숨겨진 태고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마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와아!" 하는 감탄사가 초록의 계곡 사이로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그 소리는 다시 메아리가 되어 우리의 걸음을 북돋운다.

그렇게 숨 가쁘게 병풍바위를 지나 마침내 고산의 평전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자리에 얼어붙은 듯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조금 전 등산로 주변에서 보았던 빛바랜 꽃들은 한낱 서곡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곳 평전의 철쭉들은 고산지대의 엄격한 온도차 덕분에 이제야 비로소 생애 가장 눈부신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붉은 불꽃을 터뜨린 채, 온 산을 핏빛으로, 때로는 화사한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장관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 압도적인 규모와 화려함은 육지의 그 어떤 철쭉 명산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활했다.

넋을 잃었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을까.

우리 회원들은 모두 정신을 빼앗긴 채, 그 자리에 서서 말을 잃었다.

아, 이 경이롭고 서정적인 정경을 단 한 조각이라도 놓칠세라 모두가 카메라 화면 속에 한라산의 영혼을 담아내느라 분주해진다.

언어라는 도구가 얼마나 무력한지 새삼 깨닫는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천상의 화원을 온전히 표현해 낼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깊은 탄식과도 같은 감탄사만 연발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백록담 정상은 두터운 운무의 장막 뒤에 숨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다 바람이 불어 장막이 살짝 열릴 때면 백록담의 웅장한 실루엣이 부끄러운 듯 나타났다가, 이내 다시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며 우리의 애간장을 태운다.

밀고 당기는 연인처럼 아스라한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윗세오름길과 남벽분기점. 그 길은 어디를 가나 철쭉의 향연이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융단의 길이었다.

시선이 닿는 한라산의 모든 지평선이 온통 분홍빛 수채화 물감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가슴 아픈 자연의 투쟁이 숨어 있었다.

한라산의 사면을 푸르게 뒤덮고 있는 '제주산죽'의 거센 기세가 그것이다.

땅속뿌리로 무섭게 번식하는 이 산죽들이 한라산 전체를 장악해가면서, 키 작은 관목류와 철쭉들은 산죽의 세력에 밀려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만약 이 산죽의 범람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한라산은 온통 철쭉의 거대한 동산이 되었을 텐데, 산죽의 세를 이기지 못해 철쭉의 개체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땅속 깊이 얽혀 있는 저 뿌리들을 퇴치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제주시와 국립공원의 숙제가 깊어만 간다니, 부디 이 아름다운 철쭉의 바다가 오래도록 지켜지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남벽분기점에 다다랐을 무렵, 하늘이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두텁게 산을 감싸고 있던 운무가 거센 바람에 순식간에 걷히며, 거대한 백록담 남벽의 위용이 온전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산 전체가 환호성으로 들끓었고, 손가락들은 다시 한번 바쁘게 셔터를 눌러댔다.

찰나의 순간이기에 더욱 극적이고 아름다운 조우였다.

오늘, 짙은 안개와 변화무쌍한 날씨로 우리의 애간장을 쥐락펴락했던 한라산. 그러나 돌이켜보면 안개에 가리면 가려진 대로, 열리면 열린 대로 그 모습 그대로가 거대한 대자연의 서사시였다.

이 변화와 신비로움 또한 자연의 위대한 일부이기에, 오늘 한라산은 우리에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아낌없이 보여준 것이리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고, 같은 풍경에 감탄하며 걸었던 이 유월의 하루는 내 삶의 지표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붉은 철쭉빛 각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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