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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심명(信心銘)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36> “고업이 일어날 때에 맞춰서 악연이 발생한다 ***

작성자현문[아리야(Ariya)]|작성시간26.06.10|조회수1 목록 댓글 0

<36> “고업이 일어날 때에 맞춰서 악연이 발생한다 

 

2023.11.03

 

제69화 사고는 우연이 오는 것이 아니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본문

 

약불여차(若不如此) 필부수수(必不須守)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키지 말아야 한다.

 

강설

 

약간 어렵게 생각되는 구절이다. 이와 같다는 말을 잘 새겨서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곧 진리와 같고, 진리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리가 아니면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진리는 지금 내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이 자체이다. 더 따질 것도, 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그대로 그대로인 것이고 여차(如此)하고 여시(如是)한 것이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자체가 진리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 이의를 달아서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이를 반드시 지키지 말라는 뜻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세상 모든 것은 인과(因果) 인연으로 움직인다.

 

모두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것이어서 세상과 세상을 만드는 마음의 모습이 모두 원인에 의해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원인을 짓는 시간과 그 결과가 나타나는 시간이 서로 다를 뿐이다. 즉 태어나는 때의 원인과 죽음에 이르는 때의 결과가 다르다. 지혜가 없는 이들은 마냥 원인을 지어 놓고도 그 결과만 가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게 된다.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지금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이를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다. 이래도 공(空)이요, 저래도 공(空)으로 결국 더하고 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모두가 일어날 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必然)의 모습이다. 불의의 사고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필연이란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원인이 여러가지 있을 수 있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한 사고의 경우에, 분명 그 원인이 내게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이를 단순하게 치부해서는 안된다.

 

중생, 특히 사람은 감정으로 살아간다. 엄밀히 말하면 업(業)이 곧 감정이다. 병이 들어도 통증을 느끼는 감정과 아픈 기분을 느끼는 감정이 없다면 병이 든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자식을 자식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남다른 감정이 오고 가기 때문에, 울고 웃으며 미묘한 감정이 애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감정이 없다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별한 사이가 될 수도 없다. 그런데 감정이란 크게 세 가지로 작용을 한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좋은 감정과 괴롭고 슬프고 불행하고 나쁜 감정, 그리고 이 두 가지 감정의 중간 감정이다.

 

이를 불교 유식에서는 고락사(苦樂捨)의 삼수작용(三受作用) 이라 하고, 세번째 사(捨)의 중간 감정을 제외한 두 가지 감정을 고락(苦樂)의 업(業)이라 한다.

 

문제는 좋은 감정인 낙(樂)의 감정에 의해 나쁜 감정인 고(苦)의 감정이 자동으로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인과(因果)의 법칙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감정의 질(質)과 양(量)은 한치의 오차 없이 똑같기 때문에, 즐거운 만큼 괴로운 감정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낙업(樂業)의 즐거운 감정이 일어날 때가 되면 좋은 일이 벌어지게 되고, 고업(苦業)의 괴로운 감정이 일어날 때가 되면 나쁜 일이 눈앞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를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한다.

 

그러므로 아프거나 고통스럽거나 괴로워 할 때가 되면, 즉, 고업(苦業)이 일어날 때에 맞춰서 악연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사고가 생기거나, 몸을 다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사업이 부도가 나거나, 가족에게 우환이 생기거나 등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게 되어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 오만가지 일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인과(因果)에 의한 인연의 현상이다. 따라서 이것은 잘 된 것이고 저것은 잘못된 일이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고,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하는 분별심(分別心)이야말로 고락(苦樂)의 감정만 부추겨 스스로 생사(生死) 고락(苦樂)의 업(業)을 거듭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세상과 세상을 만드는 마음의 모습은, 원인과 결과의 인과(因果) 작용으로서, 모두가 필연(必然)이요, 고락(苦樂)의 시절인연이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가 진리요, 여차(如此) 여시(如是)라 하겠다. 의심을 하면 할수록, 불평불만을 가지면 가질수록, 화를 내면 낼수록, 남 탓을 하면 할수록, 욕심을 내면 낼수록, 고락(苦樂)을 느끼면 느낄수록, 고통과 괴로움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달아야 한다.

 

만약 그래도 이 도리를 알지 못하여 마음을 추스르고 편안하지 않다면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무조건 기도하기를 권한다. 기도 방법으로는 독경염불을 하거나, 절을 하거나, 염주를 돌리며 부처님 명호를 부르거나, 다라니 주력을 하거나 등이다.

 

일정한 시간과 기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정진하면 효과가 나타난다. 아울러 참선과 보시, 정진을 함께 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송(頌)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것

지금 바로 이대로가 여차(如此)요, 진리이다.

모두가 인과(원인,결과)요, 자업자득이므로

괜한 트집으로 괴로움을 자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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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눈과 귀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

 

본문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다.

 

강설

삽화 = 김계윤 작가.

 

사람을 셀 때 한사람 두 사람이라고 센다. 한 사람이라 하면 몸 하나를 가리킨다. 몸에는 수십억 개의 세포가 있고, 눈, 귀, 코, 혀, 몸, 머리 등이 하는 수많은 기능들이 있다.

 

하나의 몸에 모두가 담겨 연결되어 있음에도 이를 한 사람이라 칭하니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한 가족이 되고, 한 가족이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한 마을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룬다. 한 사회가 모여 한 국가가 되고, 한 국가가 모여 오대양 육대주가 되고, 하나의 지구를 이룬다.

 

지구와 같은 행성들이 모여 태양계와 같은 우주의 한 구성원이 되고, 또 여러 은하계가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가 곧 모두를 이루고 모두가 모여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개체가 하나하나 따로따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모인 가운데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와 별개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하나의 몸 안에 눈과 귀가 따로 일수 없고, 코와 입이 따로 일 수 없듯이 가족 간에도, 이웃 간에도 사회나 국가 간에도, 지구와 우주 간에도 서로 따로 일수 없는 것이다.

 

눈과 귀가 서로 싸우지 않고, 코와 입이 서로 싸우지 않듯이 나와 너, 가족간, 이웃간, 국가간, 우주간에도 서로 싸우거나 충돌하는 것은 이치에도 전혀 맞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고통과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남의 탓을 하거나 서로가 시비(是非) 다툼을 하고 하물며 피 흘리는 전쟁을 하는 것은 하나의 몸 안에 있는 오른손과 왼손이 다투는 것과 같고 머리와 다리가 서로 싸우는 꼴과 다름 아닌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되는 일인가.

 

인과(因果)의 법칙을 알고, 공(空)의 이치를 알고, 지금 내 앞의 모습은, 내 마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육식(六識 - 눈, 귀, 코, 혀, 몸, 생각으로 감지)으로 비춰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육근(六根)으로 감지되는 현상들이 모두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꿈, 환, 물거품, 그림자같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슬, 번개같은) 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설사 남들이 내게 몹쓸 짓을 하여 발가벗겨진다 해도 내 마음에 거리낌과 감정에 걸림이 없다. 고락(苦樂)과 시비(是非)의 분별심(分別心)이 없는 한, 무엇이 대수이고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고 여시(如是-그러한), 여차(如此-이와같이)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보고 불편한 마음을 가진 제3자가 있다면, 이는 당연히 제3자 자신의 불편한 업(業)에 의한 것이므로, 순전히 제3자의 몫이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나는 당연히 나의 편안한 업(業)이 작동하는 것이다.

 

내일도 할 일이 많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함정이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이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생기고 만다. 아무리 잘해도 더 잘하는 것에 비해서는 잘못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된다.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분별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잘못의 분별심을 그때그때 놓고 놓으면 잘하고 잘못하는 마음 모두가 발붙일 수 없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가 중도행(中道行)이요, 보살행(菩薩行)이 된다. 고락(苦樂)의 기분 감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를 보는 제3자가 잘잘못을 따진다면, 이는 순전히 제3자 자신의 몫이고 업(業)이며, 고락(苦樂)의 기분 감정 또한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 조절이 잘되지 않고 감정 조절이 힘들다 생각하는 이는, 기도의 힘을 빌려야 한다.

 

욕심에 의해 억지로 기분을 좋게 하려 하거나 밖의 힘으로 행복하려 움직이는 것은 인과(因果)의 업(業)에 걸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밖에는 없다.

 

송(頌)

 

한 몸인 귀와 눈이 서로 싸우지 않고

팔과 다리가 서로 다투지 않듯이

나는 눈과 팔이 되고, 너는 귀와 다리가 되니

시비(是非) 분별(分別)은 서로가 고통이다.

 

[불교신문 3793호/2023년11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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