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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심명(信心銘)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37> “깨달음을 얻으면 감정의 업(業)이 사라진다” <끝> ***

작성자현문[아리야(Ariya)]|작성시간26.06.10|조회수0 목록 댓글 0

<37> “깨달음을 얻으면 감정의 업(業)이 사라진다”

 

2023.11.09

 

제71화 풍선효과

총무원장 진우스님.


본문

단능여시(但能如是) 
하려불필(何慮不畢)
다만 능히 이와 같다면 
어찌 마무리하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강설

지난 구절에 “약불여차(若不如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의 여차(如此)와 이번 구절의 여시(如是)는 같은 말이다. 여차(如此)와 여시(如是)의 뜻인 “이와 같음”이란, 내 눈앞에 있는 현실 그대로를 말한다. 이는 진리 그 자체라고 했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바로 원인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더도 덜도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 나타나는 것은 모두 필연적인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이다.

 

과학은 한 치 오차 없는 것을 밝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과학 이론 중에 아인쉬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원리가 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因果)의 내용과 흡사하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즉, 이것이 없어져야 저것도 없어진다는 뜻이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는 차안(此岸-사바세계)이고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은 피안(彼岸-깨침의 세계)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의 차안(此岸-사바세계)이다. 차안(此岸)은 작은 것을 얻으면 작게 잃게 되고, 큰 것을 얻으면 크게 잃게 되는 세계이다.

결국 하나를 집착하여 가지면 하나를 잃게 되고, 만개를 집착하여 가지게 되면 만개를 잃게 되는 세계이다. 과연 나는 어느 만큼의 욕심과 집착으로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즉, 즐겁고 행복한 것을 열 개 가졌다면 괴롭고 불행한 것도 열 개 가지게 되는 것이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라 했다. 어느 때는 즐거운 낙업(樂業)이 나타나고, 그 과보(果報)로 인해 어느때는 괴로운 고업(苦業)이 나타나게 된다.

 

마음속의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말미암아 고락(苦樂)의 업(業)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당연히 나타나는 인과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한다는 것은 그림자를 보고 시비하는 바보와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내게 나타난 현실은 내 마음의 그림자이니, 나의 모습에 불평불만을 갖고 시시비비하는 것은 더욱 안될 것이다.

나타나는 이대로가 여차(如此-이와같은)요 여시(如是-이와같은)요, 진리요, 그러함에 더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니니, 보고 듣는대로 마무리를 짓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풍선효과라는 것이 있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필연적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살다 보면 어느 때는 눌러야 할 때가 있고, 어느 때는 불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마음의 모습과 세상의 이치란, 풍선효과와 같이 한쪽만을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 이쪽을 눌렀는데 다른 쪽이 불거진다고 하여 불평과 불만을 가진다면 스스로 속임을 당하여 괴로움을 자처하게 되는 일이다.

 

이쪽을 누르면 다른 쪽에서 불거져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차(如此) 여시(如是) 즉, 이와 같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으로써 왈가왈부를 그쳐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다. 분명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을 수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것을 선택할 때가 있다.

이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철저히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결과는 똑같다.

 

왜냐하면 지금은 비록 잘못된 선택이 될지 몰라도 모든 일은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이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는 같은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전체를 보면 잘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풍선효과와 같은 인과(因果)의 현상을 바로 보고, 이와 같은 고락(苦樂)인과의 이치를 믿고 마음을 놓아서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고민과 걱정을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차안(此岸-사바세계)에서는 어차피 인과(因果) 인연으로 생멸(生滅)을 거듭할 것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고락(苦樂)에 의해 결과가 같다는 것을 믿고 그때그때 번뇌 망상을 놓고 또 놓고 놓아야 한다.

 

이때 비로소 피안(彼岸-저 언덕-깨침)의 마음이 되어 인과(因果)에 걸리지 않는 공(空)한 마음으로 평안해질 것이다.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도 순간순간 마음이 어지럽다면 매일매일 기도로 극복하라.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참선을 해보라. 또 무엇이든 보시하라, 보시는 따분한 마음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잊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

송(頌)

이것을 선택하던 저것을 선택하던 
결과는 똑같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는 
더도 덜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택하거나 선택한 후 
미련과 집착이 없다면
여차(如此) 여시(如是) 
즉, 있는 그대로 평안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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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두 부류의 인간

본문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님이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다.

강설

신심(信心)은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무작정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해서는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것도 없다.

 

진정으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부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이해하여 믿어야 하고, 부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곧 법(法)이고 이 법을 진실하게 믿는 마음을 신심(信心)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 즉, 법(法)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각과 감정 가운데 한가지라도 마음을 내는 즉시 두 가지 마음이 생기는데 이를 분별심(分別心)이라 한다. 또 분별심은 차안(此岸)의 사바세계 일체 모습을 만들어낸다.

부처님을 생각하면 중생이 생기고, 극락을 생각하면 지옥이 생긴다. 아름다운 모습은 추한 모습을, 좋은 것을 구하면 나쁜 것도 구해지고, 기쁨은 슬픔을, 행복은 불행을, 짜릿함은 통증을, 맛있는 것은 맛없는 것을 생기게 한다.

 

얻음은 잃음을, 한때 잘살면 한때 못살고, 성공은 실패를 등 인과(因果)는 두 가지 과보(果報)를 동시에 생기게 한다.

이렇게 분별(分別)된 마음으로 그 중에 마음에 드는 한 가지만을 취하려 하거나, 다른 한 가지를 싫어하고 배척한다면 이는 이율배반(二律背反)으로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신심(信心)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차안(此岸)의 세상은 모두가 허상이기 때문에 결국 공(空)으로 돌아간다. 그 어느 것도 아무런 의미도 없고, 따라서 아무런 소용도 없다. 노력을 많이 하고 애를 써서 사업에 성공을 했다 하자. 고생한 만큼의 대가로 인해 행복감이 충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행복한 마음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사업이 잘되고 안되고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락(苦樂)의 업(業)이 인과적(因果的)으로 언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낙업(樂業)이 나타날 때가 되면 사업의 성공을 통해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낙업(樂業)이 나타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로 인해, 즐긴 만큼의 괴로운 고업(苦業)이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일이 생기게 된다.

 

만약 전쟁이 나거나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911과 같은 대형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는 고통받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업(苦業)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고업(苦業)들이 모여 공업(共業)을 이룬다.

반대로 평화가 도래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느낀다면 이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낙업(樂業)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낙업(樂業)이 모여 공업(共業)을 이룬 것이다. 실제 현상적으로 부딪침이 전혀 없어도 고락(苦樂)의 업(業)을 느낀다.

 

아무런 상대나 행동없이 혼자 가만히 앉아만 있더라도 어느 순간 낙업(樂業)이 생겨날 시간에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가진다. 반대로 어느 순간 고업(苦業)이 생겨나는 시간에는 마음이 매우 고통스럽거나 괴롭고 불행을 느낀다.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의 업(業)은 마음 바깥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업(業)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바로 이 내용을 말씀하셨으니 인과법(因果法)이다.

그러니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이요, 여차(如此) 여시(如是)라 했다. 일어날 것이 일어나고 나타날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일체의 현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공성(空性)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같은 경계를 보는 내 마음의 업(業)이 문제다. 바깥 경계는 나의 고락(苦樂) 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든 업에 나 스스로가 또다시 끄달려 고락(苦樂)과 시비(是非)의 업(業)을 짓고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 얼마나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오늘도 종단에 여러가지 복잡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의견들이 난무하다. 어떻게 하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가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인과(因果)의 모습으로서,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 물론 이해 당사자들에게는 큰 일들이 아닐 수 없으나, 각자의 자업(自業)에 의해 나타나는 공업(共業)일 뿐이다.

누차 얘기했듯이, 어떤 사안이 발생했다면, 초연한 마음으로 고락(苦樂)과 시비(是非)의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복잡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는 이 사건이 복잡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고업(苦業)이 나타날 시간이 되어 복잡한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세상에 일이 풀리고 안 풀리고는 실제로 풀리고 안 풀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업(業)이 풀리고 안 풀리고 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시비분별(是非分別)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풀리고 안 풀리고의 두 가지 분별 자체가 없다.

인과 인연 따라 흘러갈 것이다. 억지로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설사 무진 애를 써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 마음이 기뻤다고 한다면 기쁜 마음의 과보(果報)로 인해 그만큼의 슬픈 일을 겪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이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부처님 법을 제대로 믿는 신심(信心)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내 마음의 고업(苦業)이 없으면 고통과 괴로움이 없다. 반대로 세상 모두가 평화롭다 해도 내 마음의 고업(苦業)이 발생하게 되면 괴로움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고락(苦樂) 시비(是非)의 두 마음 즉 분별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신심이 없으면 그냥 팔자대로 살수 밖에 없다. 고통과 괴로움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신심을 키우는 부모와 같다.

송(頌)

세상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과(因果)에 끄달려 사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인과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끄달리면 고통이요 
받아들이면 안락(安樂)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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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생각을 우선 멈춰야 한다

본문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로다.

강설

삽화 = 김계윤 작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고 생각으로 짐작할 수도 없음을 말한다. 또 심행처멸(心行處滅)이란 마음의 작용이 전혀 미칠 수 없는 절대 경지를 말하는데, 분별심(分別心)이 끊어진 상태를 뜻한다.

말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바탕 되어야 한다. 생각은 과거의 기억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따라붙게 된다. 기억은 좋은 기억과 좋지 않은 기억으로 분별된다. 아무 감정 없이 그냥 생각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감정이 붙지 않으면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좋거나 나쁘거나 고락(苦樂)의 감정이 없다면 생각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취하려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인과(因果)가 생긴다. 원인을 짓는 때가 있으므로 결과가 나타나는 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언어는 생각을 먼저 한 후에 그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아무래도 감정이 실리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은 고락(苦樂)의 업(業)으로 즐거운 원인과 괴로운 결과의 인과(因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사(生死) 고락(苦樂)을 거듭할 수밖에 없으니 괴로움을 피할 길이 없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다는 것은 생각을 우선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을 하되 고락(苦樂)의 감정을 전혀 얹지 말아야 한다. 감정을 얹지 않으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전혀 의미가 없다.

설사 병이 들었다 해도 괴로움의 감정이 없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괴로움과 슬픔의 감정이 없으면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三世)의 시간은 곧 고락(苦樂)의 인과(因果)에 의해 생긴다. 고락(苦樂)의 감정이 전혀 없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도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문제 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으면 감정의 업(業)이 완전히 사라진다.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는 그냥 생로병사(生老病死) 할 뿐 생로병사에 의한 고통과 괴로움이 전혀 없다. 드디어 아라한과 보살, 부처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수행자(修行者)는 바로 이를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생각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情)에 있어서 고락(苦樂)의 분별 감정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염불, 기도, 참선, 보시, 정진을 통해 몸과 마음에 녹아있는 고락(苦樂)의 업(業)을 바꿔나가야 한다.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락(苦樂) 인과(因果)의 윤회를 계속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고락(苦樂) 시비(是非)의 분별심(分別心)을 가지는 만큼, 고락(苦樂)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고락(苦樂) 인과(因果)속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다보면 즐겁고 기쁘고 행복할 때가 있을 것이다. 또 괴롭고 슬프고 불행할 때 역시 있을 것이다. 속상할 때도 있을 것이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며, 아플 때도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해 시비(是非)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인과(因果)의 틀 안에서 꼼짝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바로 탐진치(貪嗔痴-탐욕, 성냄, 망상) 삼독심(三毒心)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두 공(空)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인과(因果) 윤회(輪廻)를 거듭하지 않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평안 하려면 마음을 깨쳐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해야 한다.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이다.

송(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
고락(苦樂) 인과(因果)의 
과보(果報) 틀을 피할 수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분별(分別)하는 
마음의 업(業)을 바꿔야 하리. 


[불교신문 3794호/2023년11월14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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