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지금 시각 새벽 5시5분,
날이 훤하게 밝았다.
오늘도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글쓰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오늘은 선거날이다.
누가 될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원하는 후보가 되면 안심이다.
그러나 바라지 않는 자가 되면 실망이다.
어떻게 될 것인가?
개표를 해보아야 알 수 있다.
유튜브를 보고 있다.
유튜브를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근심걱정도 늘어가고 있다.
평론가들의 말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특정시간대를 기다린다면 가스라이팅된 것이나 다름없다.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
작년 이재명정부 출범했을 때 시작했다.
이십년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주식투자를 함에 따라 근심걱정도 생겨났다.
소유로 인한 괴로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유튜브라 하여 모두 쓰레기는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귀 기울여 들을만한 것도 있다.
찰리 멍거의 주식이야기가 그렇다.
찰리 멍거,
최근에 안 사람이다.
나이가 99세에 죽은 투자자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인생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노인의 지혜를 접하는 것 같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다.
찰리 멍거는 부자되는 것이 최대의 복수라고 했다.
성과를 내서 성공하는 것이 인생승리라는 것이다.
나는 성공한 사람인가?
이름을 날리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공한 자라고 말할 수 없다.
큰 부자가 되어 있거나, 명예가 있거나, 권력이 있다면 성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승리라는 말이 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은 없어도 그것들과 다름 없음을 말할 때도 쓰이는 말이다.
나에게 글이 있다.
나에게 책이 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이십년동안 써 놓은 수천개의 글이 있다.
글을 모아 만든 백권 이상의 책이 있다.
이런 것도 어쩌면 정신승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승리자가 되려면 성과가 있어야 한다.
부자는 동산이나 부동산과 같은 재산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학자는 학위와 논문이 증거가 될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현재의 지위가 성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글은 어떠할까?
글은 돈이 되지 않는다.
책도 돈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의 매일 오전은 글 쓰는 시간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이십년동안 쌓이고 쌓인 글은 산을 이루었다.
만들어 놓은 책은 책장에 가득하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글이라는 무형의 재산과 책이라는 유형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돈이 되지 못한다.
명사가 아니어서 명예도 없다.
권력과는 더욱더 먼 것이다.
찰리 멍거는 부자가 되라고 했다.
상대방에 대하여 질투와 자기연민을 느끼는 자는 부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고 했다.
성과를 내서 성공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크게 와 닿았다.
나는 부자인가?
결코 부자는 아니다.
큰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없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남아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기대수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다.
이런 때 부자가 되기 위해서 돈 버는 일에 올인하는 삶을 산다면 허망한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살까?
언젠가는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지난날을 회상할 때
“나는 잘 살았는가?”
라며 스스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부자 되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명예와 권력을 이루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나에게는 성과가 있다.
글과 책을 말한다.
돈도 안되는 것이지만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다.
이런 것도 어쩌면 정신승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글은 쌓이고 쌓였다.
글에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전은 글 쓰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구천개에 달하는 시간에는 엄청난 시간이 녹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책으로 만들어 놓으니 실감 난다.
책장에는 책이 가득 있다.
책은 184권이다.
남의 책을 진열해 놓은 것은 아니다.
내가 쓴 것을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책을 바라보면 부자가 된 것 같다.
글은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
굳이 돈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한권의 책은 아파트 한채 가격이 될 것이다.
아파트 한채 가격을 오억원으로 본다면 나는 수백억원의 자산가가 된다.
돈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글은 파괴되지도 않는다.
글은 빼앗아 갈 수도 없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새벽에 읽은 것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본 것이다.
나에게 딱 맞는 법문이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가르침,
즉,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미증유법·교리문답을 배운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들을 귀로 듣고, 발음을 따라 익히고, 정신으로 성찰하고, 견해로 꿰뚫는다.
그는 새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난다.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 오른다.
수행승들이여,
그의 새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 존재는 빠르게 최상의 승묘에 이른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에게 귀로 듣고, 발음을 따라 익히고,
정신으로 성찰하고, 견해로 꿰뚫은 것들이 있다면,
그에게 이와 같은 첫 번째 공덕이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A4.19)
경에서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 오른다.”
라는 말에 꼽혔다.
나에게 해당되는 말 같았다.
경전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하면 고무된다.
사부니까야를 다 읽었다.
쿳다까니까야 계열의 경전의 경우 번역된 것은 다 읽었다.
경전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경전을 읽다가 새기고 싶은 문구가 있으면 글로 남겼다.
이런 행위는 헛된 것일까?
황금만능의 시대이다.
돈이 권력인 시대이다.
사람들은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귀중한 시간을 돈 버는 일에 모두 소비하는 것이다.
특히 전업투자자가 그렇다.
주식을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다.
돈을 벌면 다행이지만 돈을 잃어 버리면 시간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임종 순간에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무엇이 남을까?
죽어서 무엇을 가져 가게 될까?
죽어서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다.
부와 명예, 권력은 가져 갈 수 없다.
그러나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하나 있다.
그것은 업(業)이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행위만 가져 가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무엇을 가져갈까?
나에게는 글이 있다.
글은 무형의 재산이기도 하고 유형의 재산이기도 하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성과물을 가져갈 수 없다.
물질적 성과를 말한다.
성과를 이루기 위한 행위만 가져 간다.
죽어서 글을 가져 갈 수 없다.
죽어서 책도 가져갈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글이나 책은 물질적 재산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있다.
글 쓴 행위를 가져 가는 것이다.
글 쓰기가 쉽지 않다.
매일 장문의 글쓰기는 더욱더 어렵다.
내가 매일 글을 쓰게 된 것은,
그것도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것은 경전을 근거로 해서 썼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 같다.
글 쓰는 순간만큼은 순수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글 쓰는 행위는 선업공덕을 쌓는 것과 같다.
글만 쓴 것은 아니다.
경을 외우기도 했다.
2004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한 이후 수많은 경을 외웠다.
금강경은 한달 보름 걸려 외웠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일 암송했다.
2011년 부터는 빠알리경을 외웠다.
세상에 가장 힘든 일은 어떤 것일까?
나의 경우 경 외우기인 것 같다.
그것도 원문으로 외우는 것이다.
특히 빠알리 경이다.
한문경전을 외울 때 어느 정도 뜻을 알 수 있다.
금강경을 외울 때도 그랬다.
그러나 빠알리 경은 매우 생소하다.
뜻도 모르면서 외웠다.
특히 게송의 경우 뜻을 알아도 내용이 심오해서 더욱더 외우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빠알리 경을 외웠다.
이런 행위는 헛된 것일까?
글을 쓰고 경을 외우는 것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긴 시간을 투자해서 외웠다.
이런 행위를 일반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찰리 멍거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새기고 싶은 것이 많다.
마치 법문을 듣는 것 같다.
유튜브에는 쓰레기로 가득하지만 찰리 멍거의 이야기는 들을만하다.
그래서 라디오 듣는 것처럼 듣는 것이다.
찰리 멍거가 말한 것 가운데 공감하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자는 것이다.
마치 “일일신우일신”을 말하는 것 같다.
시간은 유한하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내일 최후의 순간이라면 삶의 태도는 바뀐다.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것이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갖는다면 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 없다.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매일 새로운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에서 변화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우상향(右上向)의 변화이다.
우량주는 우상향하도록 설계 되어 있다.
우량주를 사놓고 기다리면 된다.
마치 나무가 성장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식이라 했을 것이다.
인생도 우상향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어야 한다.
글쓰기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글쓰기만 하지 않았다.
경도 외웠다.
또한 행선과 좌선 등 수행을 해 왔다.
이런 것은 헛된 것일까?
일반사람이 보기에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낭비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
정신적 재물을 쌓고자 하는 사람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매일 경전을 보고 있다.
머리 맡에 있어서 보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매일 의무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런 세월이 이십년 되었다.
하루라도 경전을 읽지 않으면,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 같다.
이렇게 자판을 때리고 있는 시간에는 마음이 청정해진다.
글을 쓰고 경을 외우고 수행 하는 것은 헛되지 않다.
왜 그런가?
마음에 충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과에 대한 것이다.
작은 성취를 맛보았을 때 작은 성공을 이루는 것과 같다.
작은 성공이 쌓이면 큰 성공이 될 것이다.
삶에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전업투자자는 숫자로 나타날 것이다.
월급생활자는 월급날 월급 타는 것으로 나타난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어떤 것인가?
수행자에게도 삶의 결실이 있다.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의 경’(D2)을 보면 알 수 있다.
출가를 해서 존경받는 것,
수행을 해서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이 수행자의 삶의 결실인 것이다.
블로거에게도 삶의 결실이 있다.
매일 매일 블로그에 글이 쌓이는 것이다.
그것도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자신에게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은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저 세상에서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 오른다.”(A4.19)
라는 말이 있다.
윤회를 믿는다.
윤회는 분명히 있다고 본다.
경전에 쓰여 있는 이유도 크다.
그러나 사유해보면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따르면 윤회하는 삶은 있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업에 따라 어느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이 생에서 경전을 보고 글을 쓰고 수행한 것은 죽음과 함께 끝나 버리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매일 귀중한 시간 내서 글을 쓰고 경을 외우고 수행하는 것은 쓸데 는 짓이 된다.
그러나 경전에 따르면
“그는 새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난다.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 오른다.
수행승들이여,
그의 새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 존재는 빠르게 최상의 승묘에 이른다.”(A4.19)
라고 했다.
이런 말에 힘 받고 이런 말에 고무된다.
내가 오늘도 내일도 쓰는 원동력이 되는 말이다.
어떤 이는 윤회를 부정한다.
포항공대 수학과 K교수는 불교닷컴 칼럼에서 윤회는 쓸모 없는 것이라고 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윤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써 놓았다.
전생을 기억할 수 없다.
수행을 해서 숙명통이 열린다면 기억할 것이다.
전생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만약 전생이 기억난다면 삶은 뒤죽박죽 되고 말 것이다.
전생의 원수를 보았을 때 어떠할까?
이럴 것이라면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낫다.
전생이 기억 날 때도 있을 것이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세상에 수행승이 가르침,
즉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미증유법·교리문답을 배운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들을 귀로 듣고, 발음을 따라 익히고, 정신으로 성찰하고, 견해로 꿰뚫는다.
그는 새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데 가르침의 구절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신통을 지니고 마음의 자재를 얻은 수행승이 신들의 모임에서 가르침을 설한다.
그러면 그에게 이와 같이
'이것이 내가 전생에 청정한 삶을 살 때의 가르침과 계율이다.'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그의 새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 존재는 빠르게 최상의 승묘에 이른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북소리에 밝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길을 여행하다가 북소리를 들으면
북소리인지 북소리가 아닌지에 대하여 의심이나 혼란이 없이
북소리를 정확히 판단할 것이다.”(A4.19)
여기 수행자가 있다.
그는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다.
인간으로 있을 때 전생의 일은 잊어버렸다.
그러나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잠재의식에는 남아 있다.
모든 행위는 반드시 업으로 남기 때문이다.
행위가 있으면 과보가 있기 마련이다.
행위를 하면 금생에서 과보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내생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다.
먼 후생에 나타날 수도 있다.
업이 익으면 나타나는 것이다.
조건이 성숙되면 업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기억 날 때가 있다.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 나는 것이다.
소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에서는 북소리의 예를 들었다.
전생에 북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자가 현생에서 북소리를 들었을 때
“북소리이다.”
라고 아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전생에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한 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에서는 이 밖에도 두 개의 비유를 더 들고 있다.
비유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소라고동소리에 밝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길을 여행하다가 소라고동소리를 들으면 소라고동소리인지
소라고동소리가 아닌지에 대하여 의심이나 혼란이 없이
소라고동소리를 정확히 판단할 것이다.”(A4.19)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어릴 때에 함께 흙장난을 놀던 친구가 언젠가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면,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이보게, 이것을 기억하는가?
이보게, 이것을 기억하는가?'
라고 말하면,
다른 친구는
'이보게, 기억하다뿐인가. 이보게, 기억하다뿐인가.'
라고 말할 것이다.”(A4.19)
언젠가 법문 들은 것이 기억난다.
그때 능인선원 지광스님이 법문한 것이다.
불교에 입문했을 때인 2004년도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순례 갔었는데 벽화를 보고서 발심해서 출가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알고 보았더니 전생에 자신이 그렸던 벽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북소리의 비유, 소라고동소리의 비유, 흙장난의 비유와 일치한다.
여기 수다원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
다음생에 이교도의 집안에 태어나 이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수행자의 삶을 살게 된다.
어느 날 불교 경전 게송 하나를 듣고 발심하여 수행자로 사는 것이다.
젊어서 출가한 스님이 있다.
스님은 왜 젊었을 때 출가했을까?
불교TV에서 스님의 출가이유를 들어 보면 전생에서 수행자였음에 틀림없다.
어렸을 때 절에 갔었는데 매우 친숙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에서 북소리의 비유, 소라고동소리의 비유, 흙장난의 비유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이런 행위는 헛된 것이 아닐 것이다.
경을 외우는 것도 헛된 일이 아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니다.
왜 그런가?
선업공덕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저 세상에서 어느 때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기억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 오른다.
(tassa tattha sukhino dhammapadāpilapanti)”(A4.19)
라고 했다.
이 문구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전생에 배웠던 것들과 외워서 체화된 부처님의 가르침들이
맑은 거울에 영상이 비치듯 나타난다.”(Mrp.III.170)
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 생에서 수행자는 다음 생에서도 수행자이기 쉽다.
마치 바이올린 천재가 전생에서도 바이올린 켠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생에 선업공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소리, 소라고동소리를 듣고 전생이 생각나는 것과 같다.
또한 흙장난의 예와 같이 하나의 계기가 있어서 전생에 있었던 일이 발현되는 것이다.
경전을 보았을 때 감동받았다면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음에 틀림없다.
법문집을 보고서 감명받았다면 전생에 그 스승 밑에서 수행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하나의 계기로 인하여 전생의 삶을 이어서 살게 되었을 때
현생에서 열반에 이를지 모른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그의 새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 존재는 빠르게 최상의 승묘에 이른다.”(A4.19)
라고 했다.
이 문구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여기서 새김이 느리게 일어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기억하는 새김이 느리게 일어난다는 것이고,
최상의 승묘에 이른다는 것은 열반에 도달한 다는 뜻이다.”(Mrp.III.170)
라고 설명해 놓았다.
경을 읽으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 오른다.”(A4.19)
라는 말이다.
이는 가르침으로서 사띠에 대한 것이다.
수행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한다.
경에서는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미증유법·교리문답”
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구분교(九分敎)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은 사띠(sati)에 해당된다.
사띠라 하여 반드시 수행의 의미로서의 사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외우고 있다면 다음생에 어떻게 될까?
수많은 빠알리경을 외웠다.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 담마짝까경, 십이연기분석경, 팔정도경 등 수많은 경을 외웠다.
지금은 잊어버렸다.
외울 당시에는 생생해서 매일 암송했다.
애써 외운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암송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외워 보라고 하면 암송할 수 없다.
외운 것은 다 잊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암송하게 될 것이다.
암송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암송한 가락이 있어서 조금만 연습하면 외워지게 되는 것이다.
죽어서 다음 생에서는 어떠할까?
다음 생에서 수행자로 산다면 전생이 기억날지 모른다.
전생에 경을 외운 사람이라면 경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수행자는 게송 한마디만 접해도 깨달음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른바 ‘약설지자(ugghaṭitaññū)’를 말한다.
간략한 언급만으로도 아는 자를 말한다.
산따띠 장관 같은 케이스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한번 행위한 것은 남아 있다.
행위가 익으면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번 외운 것도 언젠가 조건이 충족되면 과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마치 순례 갔던 자가 그림을 보고서 마음이 끌려 마침내 그 그림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이는 전생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면 그에게 이와 같이
'이것이 내가 전생에 청정한 삶을 살 때의 가르침과 계율이다.'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A4.19)
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현생에서 경, 응송 등 구분교의 가르침을 다시 접하는 것이다.
사띠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수행과 가르침을 기억하는 의미로서의 사띠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으로 번역했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의미로서의 사띠는 새김이라는 번역이 타당하다.
그러나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구분교를 마음챙김한다.”
라는 말은 어색한 것이다.
그러나
“구분교를 새김한다.”
라는 말은 적절하다.
경에서는 전생을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다.
전생에 경전을 공부했던 사람은 현생에서도 경전공부하기 쉬움을 말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기억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맞지 않는다.
경에서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 오른다.”(A4.19)
라고 했는데 이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사띠에 대한 것이다.
현재시각 7시 12분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지 2시간 7분이 지났다.
정리하고 나면 30분이 더 지날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헛된 일일까?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사실은 어떤 행위이든지 과보로 산출된다는 사실이다.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 일어난다.
먼 후생에서 일어날지 모른다.
어느 날 하나의 그림이나 소리를 듣고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있다.
전생에 있었던 것도 소환될 것이다.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자는 수행자의 삶을 살아간다.
전생에서 수행자로 살았다면 이번 생에도 수행자로 살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하나의 계기에 따른다.
경에서는 북소리의 비유, 소라고동소리의 비유, 흙장난의 비유를 들었다.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2026-06-03
담마다사 이병욱
[출처]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작성자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