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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 연꽃

자기연민이 일어날 때

작성자현문[아리야(Ariya)]|작성시간26.06.09|조회수2 목록 댓글 0

자기연민

 

 

한바탕 바람이 불어온다.

숲에서 파도가 친다.

감은 눈에 들리는 것은 “쉐”하는 나무소리이다.

 

맑고 싱그러운 아침이다.

어제 비가 와서 대지는 촉촉히 젖었다.

저 멀리 있는 산에는 흰 구름이 끼었다.

왕방산 산책길의 아침이다.

 

오분명상을 했다.

목적지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 것이다.

“아악아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뻐꾹뻐꾹”하는 소리도 들린다.

한바탕 바람이 휘몰아칠 때에 “차르르” 하며 숲의 파도가 밀려 오는 것 같다.

 

오늘 아침은 마음이 차분했다.

어제 광풍 분 것과는 다르다.

어제는 자기연민의 날이었다.

 

자기연민, 자신을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마음일 것이다.

이런 말을 유튜브에서 찰리 멍거가 말한 것을 들었다.

 

자기연민은 나쁜 것이다.

주식투자자 찰리 멍거에 따르면 질투하는 마음과 함께 아주 나쁜 것이라고 했다.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스스로 비참하게 만드는 마음이다.

 

자기연민이라는 말이 있을까?

인터넷검색해 보았다.

AI개요에 따르면

“자기 연민은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긍정적인 마음(Self-Compassion)과,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며 피해 의식에 빠지는 부정적인 감정(Self-Pity)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연민은 선법이다.

이는 아비담마에 따른 것이다.

연민(karuṇā)은 부끄러움, 창피함 등과 함께 25가지 아름다운 마음부수 가운데 하나이다.

 

자기연민은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 두 가지가 있다.

찰리 멍거가 말한 것은 부정적 감정이다.

주식투자를 실패하여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또한 열등적 감정이기도 하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여 질투와 함께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본래 연민은 선법이다.

연민은 사무량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무량심에서 연민은 어떤 마음인가?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라고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하루 속히 고통에서 벗어나길!”

라며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연민은 긍정적인 것이다.

 

누구나 자기연민을 가질 수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자기연민을 갖는다.

운명적 상황에 처했을 때도 자기연민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운명적 사건에 직면해 있을 때이다.

이럴 때는 전생탓을 한다.

또한 업의 탓을 하기도 한다.

 

전생탓과 업탓은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또한 자기합리화 같은 것이기도 하다.

불행에 빠진 것에 대하여 전생탓, 업탓으로 보면 빠져 나갈 구멍은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를 스스로 불쌍하게 여겨 스스로 위로 받고자 한다.

 

언제까지 전생탓, 업탓하며 살 수는 없다.

불교인이라면 극복해야 한다.

오늘 아침 앙굿따라니까야를 읽다가 새기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A4.195)

라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에 자이나교가 있었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의 제자가 자이나교도와 대론하는 장면이 종종 발견된다.

 

부처님의 제자 목갈라나와 자이나교도 밥빠가 대화했다.

목갈라나는

“밥빠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신체적으로 자제하고 언어적으로 자제하고 정신적으로 자제하는데,

무명이 사라져 소멸되고 명지가 일어난 뒤에,

밥빠여,

그것을 원인으로 그에게 아직 미래에 괴로운 느낌을 초래할

번뇌가 들이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까?”(A4.195)

라고 물었다.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이나교도 밥빠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존자여,

여기 이전에 지은 악한 업의 과보가 아직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경우에 그것을 원인으로

그에게 아직 미래에 괴로운 느낌을 초래할 번뇌가 들이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A4.195)

라고 말한다.

 

행위를 하면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업과 업보에 대한 것이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숙명론이 된다.

자이나교도 밥빠에 따르면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어도

과거 어느 때인가 지은 업은 피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말했다.

 

나의 과거는 어떤 것일까?

이 생에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거생은 알 수 없다.

수행을 해서 숙명통이 열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일 수 있다.

과거생에 어떤 죄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업이 익었기 때문일 것이다.

 

업과 업보를 잘못 해석하면 숙명론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과거의 원인이라면 나는 현생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또한 모든 것을 과거의 업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모든 것을 과거 업의 탓으로 돌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는 부처님이 숙명론자들에게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 들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전생 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이간질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욕지거리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꾸며대는 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분노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다.”(A3.61)

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리면 현생에서는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전생의 행위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A3.61)

라고 말했다.

 

숙명론을 받아들이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업의 탓으로 보았을 때 애써 수행을 하거나 청정한 삶을 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괴로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이나교도들은 자신의 몸을 학대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는

“그는 고행을 통해 과거세의 모든 업의 파괴를 시설하고 부작(不作)을 통해

새로운 업의 다리를 파괴할 것 가르칩니다.”(A3.74)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 괴로운 자가 있다.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하여 과거 전생에 큰 죄를 지어서 지금 이렇게 벌을 받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과거의 죄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이나교에 따르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이다.

극단적 고행으로 과거의 죄업을 씻어내자는 것이다.

그래서

“고행을 통해 과거세의 모든 업의 파괴를 시설하고 부작(不作)을 통해

새로운 업의 다리를 파괴한다.”(A3.74)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괴로움이 있다.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도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고통도 있다.

이런 고통을 소멸할 방법은 없을까?

자기연민에 빠진 자가 고통에서 해방될 수는 없을까?

 

극단적 고행으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면 어느 정도 효과 있을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불쌍하게 여겨 자신의 몸을 때리는 행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처 없이 걷는 것으로 과거 죄업을 씻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극단적 고행을 부정했다.

이는 부처님이 고행을 해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만 상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 대신 청정한 삶을 사는 것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수행을 하면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이나교도 밥빠에게

“밥빠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체적 폭력을 조건으로 곤혹과 고뇌를 초래 하는 번뇌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신체적 폭력을 삼가면,

곤혹과 고뇌를 초래하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

이것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밥빠여,

그에게 미래에 괴로운 느낌을 초래할 번뇌가 들이닥칠 가능성이 있다고봅니까?”(A4.195)

라며 질문했다.

 

고행은 일종의 폭력과 같은 것이다.

고행을 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고행을 해서 과거의 죄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의 신체에 폭력을 행하면 할수록 번뇌만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죄업을 어찌할 것인가?

자기연민으로 자신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고행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청정하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청정한 상태가 되었을 때 더 이상 번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A4.195)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좋은 문구가 있으면 외워야 한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A4.195)

라는 문구도 해당된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이 문구는 이전에 한번 나왔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보면 반복되는 문구가 있다.

동어반복 같은 것이다.

니까야에서 자주 언급된다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한다.

왜 그럴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 제동 걸 수 있다.

전에 말한 적이 있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런 반응이 있으면 긍정적 신호가 된다.

이제야 자신의 말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똑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경을 볼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A4.195)

라는 말도 그렇다.

기록을 찾아보니 이 말은 ‘니간타의 경’(A3.74)에도 실려 있다.

 

불교는 해방의 종교이다.

과거생 어느 때 지은 업으로 인하여 현세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신체를 학대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기연민만 하며 앉아 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으로 극복된다.

 

과거에 지은 업을 부술 수 있다.

고행을 하지 않아도 자기연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세 가지 ‘멸진청정’에 대한 것이다.

 

세 가지 멸진청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계, 정, 혜 삼학이다.

 

먼저 계학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바야여,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고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지켜야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웁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과거의 업에 접촉할 때마다 그것을 부숩니다.

이것이야말로 멸진으로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 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A3.74)

 

아난다 존자가 자이나교도 아바야에게 말한 것이다.

계행을 지키는 것이 과거생에 지은 죄업을 부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계, 정, 혜 삼학으로 완성된다.

경에서 정학은 네 가지 선정으로 설명된다.

선정상태가 되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지은 죄업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에서 혜학은 심해탈과 혜해탈에 대한 것이다.

해탈에 이르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과거에 지은 업도 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을 어떻게 부술 수 있을까?

이는

“과거의 업에 접촉할 때마다 그것을 부숩니다.

(purāṇañca kammaṃ phussa phussa byantīkaroti)”(A3.74)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과거생에 어떤 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은 업이 익어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띠와 삼빠자나로 부수는 것이다.

또한 계, 정, 혜 삼학으로 부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청정한 삶으로 실현된다.

 

불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지금 절망에 처한 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자기연민에 빠진 자는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다.

신세한탄하는 사람은 자기연민에 빠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라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새김(sati)과 올바로 알아차림(smapajana)으로 과거의 업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자기연민에 빠진자는 자신을 학대할 뿐이다.

자기연민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게 된다.

특히 남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럴 때 자기연민은 부정적인 것이 된다.

 

누구나 자기연민이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이다.

특히 운명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자신을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연민이 일어난다.

 

분노의 마음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불선한 마음이 되었을 때 더욱더 괴롭기만 하다.

이럴 때는 알아차려야 한다.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삼빠자나를 하는 것이다.

 

이익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손해 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삼빠자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익 되는 일을 하는 것도 지혜의 영역이다.

남과 비교하여 자기연민이 일어났을 때 이익되지 않음을 아는 것도 올바른 알아차림이다.

이것이 ‘이익삼빠자나 (satthakasampajañña)’이다.

 

어떻게 해야 자기연민에서 벗어날까?

비교하여 비참한 마음이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경험할 때마다, 알 날때마다,

여섯 문에서 드러나는 물질·정신을 끊임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관찰하면 무상·고·무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아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볼 때 관찰하면

'보고 나서는 사라진다'라고 압니다.

'생겨나서는 사라진다'라고도 압니다.

 

그래서 무상하다는 사실도 분명히 압니다.

듣는 것도 관찰하면 듣고 나서 사라집니다.

'생겨나서는 사라진다. 무상한 법이다'라고 압니다.

경험한 것, 생각해서 아는 것도 관찰하면 사라집니다.

'생겨나서는 사라진다. 무상한 법이다'

라고 압니다.

 

이렇게 알면 중간 부분에서

'탐욕이 있는 이,

성냄이 있는 이.

어리석음이 있는 이'로 등록되지 않습니다.”(뿌라베다숫따 법문, 95쪽)

 

 

육문에서 접촉되는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라고 했다.

그것도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명색구분새김’하는 것이다.

 

번뇌는 접촉에서 발생된다.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과거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정신과 물질로 분리해서 관찰해야 한다.

보이는 것으 물질이고 이를 아는 마음은 정신이다고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새기면 어떻게 될까?

 

법문집에서는

“관찰하면 사라집니다.”

라고 했다.

 

관찰하면 사라진다.

희망의 메시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명색구분새김해야 한다.

개념으로 보면 번뇌가 일어나지만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새기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서 아는 것도 관찰하면 사라집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독히 자기연민에 빠질 때가 있다.

자기자신이 불쌍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길!”

이라며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긍정적의미로서 자기연민이다.

 

자기연민이 부정적 의미로 발생할 때가 있다.

남과 비교해서 비참함을 느낄 때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몸을 학대해서 죄업을 씻어낼 수 없다.

계, 정, 혜 삼학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부정적 자기연민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은 겪을 때마다 끝냅니다.”(A4.195)

라는 가르침이 답이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올바른 알아차림(sampajana)과 새김(sati)으로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2026-06-05

담마다사 이병욱

[출처] 자기연민이 일어날 때|작성자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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