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진흙속의 연꽃

마음의 물꼬

작성자현문[아리야(Ariya)]|작성시간26.06.09|조회수1 목록 댓글 0

마음의 물꼬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후회와 자책의 감정이 일시에 사라졌다.

마음의 물꼬를 튼 것이다.

 

농촌출신이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시골을 떠났다.

그럼에도 논농사에 대한 기억은 있다.

물꼬를 내면 메마른 대지에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 오는 것이다.

 

마음에도 물꼬가 있을까?

메마른 마음, 황폐한 마음에 물꼬를 트면 생명의 물이 들어온다.

황무지 같았던 마음은 충만 된다.

극적인 반전이다.

오늘 새벽 그랬다.

 

마음 바꾸기에 달려 있다.

마음 하나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근심, 걱정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을 내려 놓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면 평온한 마음이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멘탈이 부서진 것은 탐욕 때문이다.

작은 이익에 목숨 걸었을 때 삶을 지배해 버린다.

 

마음이 폭주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답이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연소의 경’이 떠올랐다.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삼라만상과 산천초목이 불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불타고 있는 것이다.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의 세계에서 불타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세계관은 독특하다.

산천초목 산하대지와 같은 기세간도 세상이지만

자신의 눈과 귀 등으로 인식된 것도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여섯 가지 세계가 있다고 했다.

시각의 세계, 청각의 세계, 후각의 세계, 미각의 세계, 촉각의 세계, 정신의 세계를 말한다.

앞서 언급된 가르침은 시각에 대한 것이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이 있게 되는데 불타고 있다고 했다.

삼사화합을 조건으로 하는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느낌도 불타고 있다고 했다.

 

불은 어떻게 나는가?

조건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경에서는 탐, 진, 치를 들었다.

그래서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탐, 진, 치는 불타는 세상의 땔감이 된다.

 

불은 땔감이 있어야 탄다.

그런데 부처님은 불타는 세상의 땔감을 탐, 진, 치로 보았다.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불은 더욱더 거세게 타오르고,

화를 내면 할수록 역시 불은 더욱더 거세게 타오른다.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어리석은 자일수록 불은 더욱더 거세게 타오른다.

 

탐, 진, 치는 불타는 세상의 땔감이다.

탐욕으로 살수록, 성냄으로 살수록, 어리석음으로 살수록 불은 더욱더 거세게 타오른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중학교때 불교를 배웠다.

불교학교에 배정받은 것이 이유가 된다.

중학교 일학년 때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중학교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불교 교과서에 하나의 삽화가 있었다.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동산에 올라가 있는 장면이다.

부처님은 석양무렵 아래 동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밥 짓기 위해서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 오른 것이다.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

고 말했다.

 

무엇이든지 처음 기억은 강렬하다.

중학교 때 불교시간에 배운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화와 함께

“세상이 불타고 있다.”

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

 

중학교 때는 몰랐다.

사십대 중반에 불교에 입문한 이후에 알았다.

그것도 초기불교에 관심가지면서 알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Ādittapariyāya Sutta, 연소의 경)’을 보고서 알게 되었다.

거기에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S35.28)

라는 문구를 보고 알게 되었다.

 

의문이 풀렸다.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전체가 불붙은 것은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고 있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구 전체는 지금 이 시각에도 불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제 저녁에 불에 타버렸다.

육처 가운데 정신이 불타버린 것이다.

근심, 걱정, 후회, 회환이라는 땔감으로 불에 타버렸다.

 

불에 타면 괴로울 것이다.

지옥불과 같은 용광로에 삶아지고 있다면 매우 괴로운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S35.28)

라고 했다.

 

삶은 절망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

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연기적 삶을 살고 있다.

연기가 계속 회전되면 연기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전적 연기의 종착지는 항상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S12.2)

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니 삶은 절망인 것임에 틀림없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고 나서 의문이 풀렸다.

중학교 때 가졌던 의문,

“세상이 불타고 있다.”

라는 의문이 풀린 것이다.

 

탐, 진, 치가 윤회의 땔감이 되어서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

라고 말한 가르침을 알게 된 것이다.

 

때로 유행가에서 진리를 본다.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때 유행하던 노래 가운데 하나가 있다.

정미조의‘불꽃’(1975년)이라는 노래이다.

 

가사를 보면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

라는 내용이 있다.

 

나는 불꽃임에 틀림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르는 불꽃인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은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S35.28)

라고 했다.

삶은 절망의 불꽃이기도 한 것이다.

 

삶은 불꽃이다.

삶은 절망이다.

삶은 절망의 불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매일매일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탐욕의 땔감으로 타오르고,

성냄의 땔감으로 타오르고,

어리석음의 땔감으로 타오른다.

결국 죽을 것이기 때문에 절망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문제만 제기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 하여 고성제만 설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은 물로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연소의 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처님은 절망의 불꽃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시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S35.28)

라고 했다.

세계에 대하여 염오하고 이욕하면 해탈함을 말한다.

 

불타는 세상이다.

불타는 세상을 떠나려면 이 세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마음을 내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게 된다.

어느 정도인가?

세상을 토한 음식으로 보는 것이다.

 

토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테라가타에서 딸라뿟따 장로는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

라고 말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으면 다시 세상에 돌아오게 된다.

세상을 토한 음식 보듯 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오지 않게 된다.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대하여 눈곱만큼이라도 미련을 가지지 않으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게 된다.

 

삶은 지옥이다.

삶이 왜 지옥인가?

매일매일 시각의 불, 청각의 불 등 여섯 감역에서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탐, 진, 치를 땔감으로 하여 매일매일 맹렬히 오르고 있는 것이다.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더 거세게 타오른다.

화를 내면 낼수록 더욱더 불타오른다.

이럴 때 지옥에 있게 된다.

지옥불에 스스로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삶은 지옥 그 자체가 된다.

 

지옥을 경험했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태워졌다.

결국 절망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현실이 지옥이 된 것이다.

 

지옥은 저 지하 깊은 곳에 있을까?

지옥은 내 마음속에 있다.

그래서 딸라뿟따 장로는

“우리가 그대 때문에 아수라가 되고 그대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니,

언젠가 축생의 존재가 되고 아귀의 존재가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 (Thag.1134)

라고 말했다.

 

마음 쓰는 것 하나로 현실은 지옥이 되고 아수라가 된다.

또한 야차가 된다.

마음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면 지옥에 있게 되고 아수라에 있게 된다.

 

오늘 새벽 마음의 물꼬를 텄다.

지옥 같은 현실, 아수라와 같은 세계, 야차 같은 거친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마음 하나 바꾸니 세상이 평온해진 것이다.

이런 것도 변화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방심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아수라가 되고 야차가 된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올랐을 때 지옥불에 있게 된다.

이런 때 물꼬를 터야 한다

.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을 때 물꼬를 트게 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게 되었을 때 변화가 일어났다.

마음의 물꼬가 트인 것이다.

마음 하나 바꾸니 세상이 평온해졌다.

토한 것을 다시 삼킬 수 없다.

 

 

2026-06-07

담마다사 이병욱

[출처] 마음의 물꼬|작성자 담마다사 이병욱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