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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 연꽃

꽃 파는 소녀의 인생역전

작성자현문[아리야(Ariya)]|작성시간26.06.09|조회수1 목록 댓글 0

꽃 파는 소녀의 인생역전

 

 

제미나이에게 물어보았다.

빠세나디 왕과 말리까 왕비가 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물어본 것이다.

이에 여러 장의 그림을 받았다.

그림 속의 왕비는 미녀이다.

 

말리까 왕비는 미녀일까?

초기경전 니까야를 보면 상식을 깬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는 전생에서 화를 잘 내고 격렬해서,

사소한 말에도 노여워하고 분노하고 공격하고 저항했고,

분노와 성냄과 불만을 거침없이 드러냈나 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러했기 때문에 이 생에 용모가 추악하고 못 생기고 보기에 흉한가 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저는 전생에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과 옷과 탈 것이나 화환이나 향이나 크림이나 침상이나 거처나

등불을 보시하였나 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러했기 때문에 이 생에 저는 부유하고 재산이 많고 재물이 많나 봅니다.

세존이시여,

게다가 저는 전생에 질투심을 갖지 않고,

남들이 이득을 얻고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고

존중을 받고 칭송받고 예경 받는 것을 시샘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았나 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러했기 때문에 이 생에 저는 권력이 많나 봅니다.”(A4.197)

 

 

앙굿따라니까야 ‘말리까의 경(Mālikāsutta)’에 실려 있다.

경에 따르면 말리까 왕비는 미녀가 아니었음에 틀림 없다.

이는

“이 생에 용모가 추악하고 못 생기고 보기에 흉한가 봅니다.”(A4.197)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빠알리 법명을 지어 준다.

나의 법명은 담마다사(dhammādāsa)도 빠알리 법명이다.

담마다사를 우리말로 풀이 하면

‘법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담마(dhamma)가 법이고

아다사(ādāsa)가 거울의 뜻이다.

담마와 아다사가 합성되어서 담마다사가 된다.

한자어로 말하면 ‘법경(法鏡)’이 된다.

 

빠알리어 법명 짓는 원칙이 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파악하여 적절하게 지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 경전 속에 있는 인물을 지어 줄 때가 있다.

말리까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이다.

 

빠알리 법명 말리까는 여성 불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말리까 왕비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말리까 왕비처럼 지혜로운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앙굿따라니까야 말리까의 경에서는 추녀에 가깝다.

“이 생에 용모가 추악하고 못 생기고 보기에 흉한가 봅니다.”(A4.197)

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말리까 왕비는 추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추녀로 태어났을까?

경에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냄과 관련이 있다.

말리까는 전생에 화를 자주 낸 것이다.

그래서 그 화를 낸 과보로 인하여 추녀로 태어난 것이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읽어 보면 인과응보의 법칙을 알 수 있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성냄이다.

 

말리까 왕비가 부처님 계신 곳에 찾아왔다.

왕비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어떤 여인은 용모가 준수하고 잘 생기고 보기에 아름답고

더구나 부유하고 갑부이고 재산이나 권력이 많은데,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A4.197)

라고 물어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리까여,

세상에 어떤 여인은 화를 잘 내고 격렬해서,

사소한 말에도 노여워 하고 분노하고 공격하고 저항합니다.

그녀는 분노와 성냄과 불만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그녀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과 옷과 탈 것이나

화환이나 향이나 크림이나 침상이나 거처나 등불을 보시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질투심을 갖고,

남들이 이득을 얻고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고 존중을 받고 칭송받고 예배 받는 것을

시샘하고 싫어하고 질투합니다.

 

그녀는 그때에 죽어서 현재의 이러한 상태로 다시 와도,

태어나는 곳마다 용모가 추악하고 못 생기고 보기에 흉하고,

더구나 가난하고 빈곤하고 재산이나 권력이 없는데,

그 원 인은 이것이고 그 조건은 이것입니다.” (A4.197)

 

네 가지 경우의 수에 있어서 첫번째 것이다.

네 가지 경우의 수에서 최악에 해당된다.

화를 잘 낼 뿐만 아니라 보시도 하지 않는다.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

이런 사람은 다음 생에 추녀로 태어나고 미천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긴 모습이 모두 다 다를까?

사람들은 왜 성향이 모두 다 다를까?

누구나 한번쯤 이런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의문에 명쾌하게 답을 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에서 발견된다.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에 물었다.

바라문은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M135)

라고 질문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이런 말은 초기경전 니까야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논서에서는 ‘업자성정견’이라고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업과 업보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적용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성제처럼 정견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정견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업의 법칙 역시 진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속적 정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는 어떠한 것인가?

 

'보시도 있다. 제사도 있다.

공양도 있다. 선악의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홀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있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35)

 

 

이것이 세속적 정견이다.

번뇌에 영향을 받는 정견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것은 세간적인 올바른 견해를 말한다.

보다 나은 윤회의 삶으로 이끄는 공덕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조건지어진 삶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Pps.IV.115)

라고 설명되어 있다.

 

세속적 정견이 있으면 출세간적 정견도 있어야 할 것이다.

사성제가 대표적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마음,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

고귀한 길을 성취한 자에게 고귀한 길을 닦은 결과로서 지혜,

지혜의 능력, 지혜의 힘, 탐구의 깨달음 고리,

올바른 견해가 있는 고귀한 길의 요소가 생겨나는데,

이것들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이다.”(M135)

 

이것이 출세간적 정견이다.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주석에서는

“길에 대한 올바른 견해, 즉 출세간적인 올바른 견해는

곧 네 가지 거룩한 진리(cattări ariyasaccāni:四聖諦)에 대한 앎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해서도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에 해당한다.”( Pps.IV.115)

라고 설명되어 있다.

 

진리에는 세간적 진리가 있고 출세간적 진리가 있다.

차이는 번뇌의 유무에 대한 것이다.

번뇌가 있는 세간적 진리는 윤회하는 삶에 적용된다.

업과 업보의 법칙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번뇌를 소멸하는 출세간적 진리는 윤회를 끝내는 것이기 때문에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 것이 되어서

업과 업보의 법칙에는 해당되지 않는 출세간적 진리가 된다.

 

국민스님이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이다.

스님은 불자들뿐만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법문한다.

심지어 개신교나 천주교와 같은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까지 대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스님의 법문에서는 윤회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업과 업보도 거론되지 않는다.

 

언젠가 국민멘토 스님의 법문을 유튜브에서 들었다.

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힌두교에서 만든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그러나 초기경전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은 수없이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왜 국민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회의적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신을 따르는 대상이 전국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법문할 때 사람이 축생이 되고,

축생이 사람이 된다는 식의 육도윤회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도 검증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만나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스님은 과학적 유물론자로 보인다.

유물론에 과학이 개입된 것이다.

 

본래 유물론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라는 식으로 전개되는 유물론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마치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스님의 장애관은 어떤 것일까?

언젠가 유튜브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즉문즉설을 들었다.

스님에 따르면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되었다.

부모의 유전자 영향도 있고 태내에서 잘못된 것도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초기경전 니까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 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수레공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음료,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 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M129)

 

축생에서 인간이 된 자에 대한 가르침이다.

인간이었다가 축생으로 떨어진 자에 대해서는

“일찌기 여기서 맛을 탐하고 여기서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가운데 동료로서 태어난다.”(M129)

라고 했다.

불선과보에 대한 것이다.

 

축생이 된 자도 업이 다하면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되기는 쉽지 않다.

 

어느 정도인가?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

라며 이른바‘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를 들었다.

 

축생은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힘들다.

차라리 지금 인간 몸인 상태일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빠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미천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M129)

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문즉설 국민스님은 니까야를 읽어 보았을까?

법문 중에 니까야를 언급한 것을 들어 보지 못했다.

맛지마니까야 129번경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업과 업보의 법칙대로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생긴 모습이나 성향에 대하여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아니라

전생에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뭇삶들(衆生)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라고 말했다.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업을 소유하는 자(kammassaka):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경향성의 업(業)은

정신적 지속 속에서 적절한 다른 조건들이 생겨나면 결과를 초래한 다.

 

2) 업을 상속하는 자(kammadāyāda):

업의 소유자는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되는 상속자임과 동시에

현재에 의해 새롭게 바뀌어가는 상속자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존재가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된다는

숙작인견(宿作因見: pubbekatahetu diṭṭhi)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3) 업을 모태로 하는 자(kammayoni):

업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으로서

마치 씨앗이 적절한 흙과 습기를 만나서 발아해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

“업은 땅이고 의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물기이다...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게 된다.”(S22.54)

 

4) 업을 친지로 하는 자(kammabandhu):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업은

인과적 생성원리에 따라 윤회하는 동안 수반된다.

형제, 친척, 친지들은 모였다가 흩어지지만 업은 기나긴 생사여로의 윤회를 함께 하는

진정한 동반자로서 친지이므로 선업을 닦아야 한다.

 

“오랜 세월 타향을 헤매던 나그네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귀환을 반기듯

공덕들을 쌓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갈 때

공덕들이 친지들처럼 사랑스럽게 그를 반긴다.”(Dhp 219~220)

 

5)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kammapaṭisaraṇa):

육체적으로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의지처로 삼듯,

선한 업을 쌓지 못해 저열한 세계에 태어났을 때 고통은 심각하므로

진정한 질병의 치료는 자신의 치유력이듯 우리의 진정한 귀의처는

선업에 관해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업의 가르침을 설했다.

업의 가르침은 윤회하는 삶과 관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윤회에 대하여 회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멘토스님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다.

 

말리까 왕비는 추녀였다.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미나이에서 이미지를 만들면 미녀로 나온다.

그렇다면 추녀가 어떻게 왕비가 되었을까?

각주에서는 자타카를 찾아 보라고 했다.

 

경전을 읽는 맛이 있다.

각주에 써 있는 대로 추적해 가는 것이다.

말리까 왕비와 관련하여 자타카 ‘산죽에 얽힌 본생 이야기’(Jat.415)에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있다.

 

(산죽에 얽힌 본생 이야기)

 

‘사소한 섬김이란 참으로 없다.’

라고 하는 이것은 스승께서 제따바나 정사에 계실 때,

왕비 말리까에 관해 이야기하신 것이다.

그녀는 싸밧티 시에 한 우두머리 화만사(華鬘師)의 딸로

최상의 아름다움을 지녔고 매우 지혜로웠다.

열여섯 살 때 어느 날

소녀들과 함께 화원으로 가면서 세 죽사발을 준비해서 꽃바구니에 넣어서 출발했다.

그녀는 도시에서 나올 때 세존께서 몸의 광명을 놓으며

수행승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도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세 그릇의 죽을 드렸다.

스승께서는 대왕으로부터 선물 받은 발우를 건네서 그것을 받았다.

그녀는 여래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을 명상 대상으로 삼아서 희열을 얻고 한쪽으로 물러 섰다.

스승께서는 그녀를 쳐다보고 미소를 지었다.

존자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미소를 지으시니,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고 세존께 여쭈었다.

 

그러자 스승께서는 그에게

"아난다여,

이 소녀는 이 산죽의 공양의 결과로,

오늘 바로 꼬쌀라 국의 왕의 제일왕비가 될 것이다."

라고 미소 짓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는 중에 그 소녀는 [406] 화원으로 갔다.

그날 꼬쌀라 국의 왕이 아자따쌋뚜와 함께 싸우다가 싸움에 패배하여 도망갔다가,

말을 타고 돌아오면서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고,

마음이 사로잡혀 말을 그 화원의 입구로 몰았다.

 

공덕을 갖춘 소녀는 왕을 보고 도망가지 않고 다가와서 말의 고삐를 붙잡았다.

왕은 말의 등에 앉은 채로

"남편이 있는가, 남편이 없는가?"

라고 묻고는,

남편이 없는 것을 알고 말에서 내려와 바람과 열기에 지쳐서

그녀의 무릎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그녀를 말 등에 앉게 하고,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시로 들어와,

그녀를 그녀 가족의 집에 보냈다.

 

그리고 그는 저녁 무렵 수레를 보내서,

커다란 존경과 경의로 그녀를 그녀 가족의 집에서 데려와,

보석 더미 위에 세우고 관 정식을 올려 제일왕비로 삼았다.

그 후에 그녀는 왕의 마음에 들었고,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남편보다 먼저 일어 나는 것 등을 갖추고 다섯 가지 아름다운 매력을 갖추고,

남편을 신으로 섬기는 여인으로서 부처님들에게도 후원자가 되었다.

그녀가 스승께 세 그릇의 죽사발을 공양하여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소문이

온 도시에 퍼져나갔다.(Jat.415)

 

화만사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해 보았다.

검색해 보니

“화만사(華鬘師)는 고대 인도에서 꽃이나 구슬을 꿰어 목이나 몸을 장식하는

'화만(華鬘)'을 만들던 기술자 또는 전문가를 의미합니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말리까는 화만사의 딸이었다.

전쟁에서 패해 쫓기던 빠세나디가 화만사의 딸 말리까를 만나는 장면이 극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말리까는 인생역전하는 것과 같다.

꽃 파는 소녀가 단번에 제일의 왕비로 인생역전 된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다 보면 서로 다른 내용을 발견할 때가 있다.

말리까의 용모에 대한 것도 그렇다.

 

자타카에서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지녔고 매우 지혜로웠다.” (Jat.415)

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이 생에 용모가 추악하고 못 생기고 보기에 흉한가 봅니다.”(A4.197)

라고 표현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말리까 왕비는 지혜로운 여성의 표상과도 같다.

이는 왕비가 빠세나디 왕과 나눈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어느 날 왕은 왕비에게 말했다.

왕은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S3.8

)라고 물었다.

왕은 왜 이렇게 물었을까?

 

흔히 사람들은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

젊은 커플에서 볼 수 있다.

“나 사랑해?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럴 때

“당신만을 사랑해.

”라고 답해야 안심할 것이다.

왕도 이런 말을 기대했을 것이다.

 

왕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왕비는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S3.8)

라고 답한 것이다.

왕보다 자기자신이 더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왕비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고 했다.

왕은 후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진 왕의 입장에서는 불경한 것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왕은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왕은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왕이 왕비에게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S3.8)

라고 물은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왕은 자신이 가난한 소녀를 왕비로 만들었으므로

'당신이 나보다 사랑스럽다.'는 대답을 기대했으나

말리까는 현명해서 정직하게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Srp.I.140)

라고 설명되어 있다.

 

말리까 왕비는 지혜로운 여인의 표상이다.

왕의 질문에 자기자신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우파니샤드를 예를 들어서

“당신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당신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브리하드아라니야까 우파니샤드, Brhadaranyaka Upaniṣad II 4.5)

라고 각주에 설명해 놓았다.

 

왕은 현명했다.

왕의 도발적인 질문에 현명한 왕비는 자기자신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했다.

이에 왕은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소.”(S3.8)

라고 추인해 주었다.

 

세상에 자기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경에는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S3.4)

라는 가르침이 있다.

 

말리까 왕비는 미녀인가 추녀인가?

자타카를 보면 미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앙굿따라니까야 ‘말리까의 경’에서는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는 전생에서 화를 잘 내고 격렬해서,

사소한 말에도 노여워하고 분노하고 공격하고 저항했고,

분노와 성냄과 불만을 거침없이 드러냈나 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러했기 때문에 이 생에 용모가 추악하고 못 생기고 보기에 흉한가 봅니다.”(A4.197)

라고 말했다.

이는 추측에 대한 것이다.

 

말리까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또한 지혜로운 여인이다.

또한 향기나는 여인이다.

 

빠알리 말리까(mālika)는 자스민을 뜻한다.

향기 중에 최상을 자스민 향이라고 한다.

이 말에 대하여 빠알리어 사전에는

“(f.) [fr. mālā] double jasmine Dāvs 5,49.(Page 530)”

라고 설명되어 있다.

 

말리까는 말라(mālā)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말리까에 대하여 ‘겹자스민(double jasmine)’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double jasmine Dāvs 5,49.’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요즘 검색의 시대이다.

구글검색하다 보니 밀린다팡하에 겹자스민에 대한 문구를 발견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구이다.

 

“대왕이여,

온갖 물에서 생겨나고 물에서 생겨나는 꽃들 가운데 재스민이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불리고

나머지들은 어떤 것이라도 다양한 꽃의 종류로 단순히 꽃들일 뿐이고,

이러저러한 관점에서 비교하면 재스민꽃만이 사람들이 애호하는 꽃인 것처럼,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라도 번뇌의 소멸을 위해 실천하는 모든 자들을

이러저러한 관점에서 비교하면 번뇌를 부순 수행자가 최상자라고 불립니다.”(Mil.183)

 

 

전재성 선생이 번역한 것이다.

단지

“재스민꽃”

이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문 번역을 보니

“O king, as of all flowers produced in the water or on the land,

the double jasmine is acknowledged to be the chief,

all other kinds of flowers of whatever sort are merely flowers,

and taking them in order it is the double jasmine that people most desire and like.”

라고 번역되어 있다.

빠알리어 말리까에 대하여 ‘double jasmine(겹자스민)’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자스민에도 겹자스민이 있다.

꽃이 겹으로 피어 있는 것이 최상이라고 한다.

향기도 최상이고 형태도 최상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겹자스민에 대하여 번뇌 다한 수행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흔히 인생역전을 말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인생역전이라고 한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인생역전은 어떤 것일까?

 

누구라도 수행승이 될 수 있다.

미천한 신분이라도 수행승이 되면 존경받는다.

 

이는 아자따삿뚜 왕이

“저는 그에게 인사하고 일어나 환영하고 자리를 권하고

의복, 음식, 처소, 필수약품을 마련해 초대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법에 따라서 그에 대한 보호와 안전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D2)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실에서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이다.

 

수행자의 진정한 결실은 번뇌의 소멸로 이루어진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복전(福田)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역전일 것이다.

 

말리까는 인생역전을 이루었다.

전투에 패해 쫓기던 왕을 잘 돌보아 주어서 그 공덕으로 제일의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런 왕비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지혜로웠다.

 

그럼에도 왕비는

“이 생에 용모가 추악하고 못생기고 보기에 흉한가 봅니다.”

라고 말했다.

전생에 성냄과 시기와 질투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외모는 상대적이다.

왕을 사로잡을만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의 왕비로 간택된 것이다.

마음이 아름답고 무엇보다 지혜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말리까 왕비는 꽃파는 소녀에서

한나라의 제일왕비로 인생역전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인생역전은 언제나 이루어질까?

 

 

2026-06-09

담마다사 이병욱

[출처] 꽃 파는 소녀의 인생역전|작성자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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