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당당하기
평온한 일상이다.
평상심시도라고 한다.
평온한 일상도 도가 될 수 있을까?
밀린다팡하를 읽는다.
이번에 두 번째 읽기 시동을 걸었다.
머리맡에 놓고 매번 조금씩 읽는다.
나가세나 존자의 탄생이야기는 흥미롭다.
스펙터클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또한 우주적 스케일이다.
영웅의 탄생은 신화적이다.
경전에서 보는 나가세나 존자의 탄생 인연담 역시 신화적이다.
나가세나 존자는 바로 이전 생에 천상에 있었다.
욕계천상 삼십삼천에서 ‘마하세나’라는 이름의 천신으로 살았던 것이다.
마하세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요청을 받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밀린다 왕의 질문에 답하라는 것이다.
마하세나는 난감했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인간으로 태어나라니!
이에 마하세나는
“존자여,
저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인간계는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계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존자여,
저는 여기 신들의 천상세계에서 다음의 보다 높은 천상세계로 올라가서
완전한 열반에 들겠습니다.”(Mil.7)라고 말했다.
천상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
욕계천상은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너무 행복해서 수행할 마음이 나지 않은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밀린다팡하를 보면 천상도 천상 나름이다.
삼십삼천 천상에는 마하세나와 같은 천신도 있었던 것이다.
경전 문구에서 천상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오로지 즐거움,
행복만 있는 천상에서의 삶은 단순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경에서
“저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인간계는 원하지 않습니다.”(Mil.7)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인간계는 많은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인간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인간계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하여
“인간계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Mil.7)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천상계는 행복한 곳이다.
반대로 인간계는 고통스러운 곳이다.
인간계가 행복할 때도 있지만 근본 바탕은 괴로운 곳이다.
복잡한 일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된다.
인간계는 복잡하고 괴로운 곳이다.
이는
“저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인간계는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계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Mil.7)
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상계는 어떤 곳인가?
“천상계는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천상계는 행복한 곳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평온한 삶은 천상의 삶과도 같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천상의 삶과도 같다.
한적한 농촌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하는 것은 어쩌면 천상의 삶일지 모른다.
천상에서도 수행이 가능할까?
밀린다팡하를 보면 가능한 것 같다.
“저는 여기 신들의 천상세계에서 다음의 보다 높은 천상세계로 올라가서
완전한 열반에 들겠습니다.”(Mil.7)
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원한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행복을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행복에 겨우면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써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이 되기 쉽다.
대부분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다.
먹는 것이 하루일과 가운데 가장 큰 일이 될 수 있다.
이런 삶에는 발전이 없다.
천상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한평생 먹을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안락한 삶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감각을 즐기는 일 밖에 없다.
이런 삶에 향상이 있을 수 없다.
천상에서는 향상이 있을 수 없다.
지나치게 안락한 삶에서는 애써 노력하고자 하는 삶이 실종된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서는 공덕 짓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밀린다팡하를 보면 보다 높은 천상으로 올라가서 열반에 들고자 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전생에서부터 수행자로 살았던 존재들일 것이다.
요즘 평온한 일상이다.
포천에 살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업은 계속하고 있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이다.
매일 의무적으로 쓴다.
소재가 고갈되면 하루 거르기도 한다.
매일 쓰지 않으면 숙제하지 않은 것 같이 찜찜한 기분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 게으른 것으로 간주하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으로 본다.
TV나 유튜브에 빠져 사는 사람과 다름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글쓰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마치 일을 하는 것과 같다.
감각을 즐기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다.
애써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게으르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무엇보다 작은 성취이다.
청소를 하면 마음이 산뜻해진다.
왜 그럴까?
청소를 함으로 인하여 작은 성취를 맛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매일매일 성취를 맛보는 것과 같다.
마치 청소를 하면 마음이 충만되듯이,
글을 쓰고 나서 인터넷에 올리면 순간적으로 강렬한 성취감을 맛본다.
이런 맛에 쓰는 것인지 모른다.
글쓰기는 괴로운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것과 비교하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장문의 글을 쓰는 것은 게으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고행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글이 완성됐을 때는 강한 성취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성공을 바란다.
대부분 물질적 성공에 대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에 대하여 성공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성공에는 반드시 물질적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신적 성공도 있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 매번 성취감을 맛보아야 한다.
매일 청소를 하는 것도 매일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 된다.
매일 글을 쓴다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성공은 작은 성취가 쌓여서 된 것이다.
매일매일 매번 작은 성취가 쌓이고 쌓였을 때 큰 성공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매일매일 글을 쓰는 것은 성공으로 가기 위한 작은 성취가 된다.
나는 성공할 수 있을까?
글쓰기로도 성공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고 본다. 지난 이십년동안의 성과가 이를 말해준다.
나는 성공한 사람인가?
만일 내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나의 자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눈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성과물이 있기 때문이다.
포천 아파트 거실에 커다란 책장이 있다.
책장에는 책이 가득 채워져 있다.
백권이 넘는 책이다.
정확하게는 184권이다.
남의 책이 아니라 내가 쓴 책이다.
이것이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성과물이다.
나는 성공한사람인가?
게으름을 죄악시 한다.
한가한 오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는 것을 죄악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글을 하나 써 놓아야 안심이 된다.
글은 쌓이고 쌓였다.
지난 이십년동안 매일 쓰다시피 하다 보니 엄청나게 축적된 것이다.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재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 된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돈도 되지 않는 일에 올인하는 삶을 산 것에 대하여 인정해 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글을 쓰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가?
나의 경우 경전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된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쓰지 않으면 이렇게 많이 쓸 수 없다.
또한 이렇게 길게 쓸 수 없다.
글쓰기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게으르지 않기 위해서 쓰는 것이고 또한 공부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이런 세월을 이십년 살다 보니 이제 생활화가 되었다.
오늘 같이 이렇게 한가한 오전에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도
글쓰기가 생활화되었기 때문이다.
경전을 근거로 쓰다 보면 글쓰기가 탄력을 받는다.
머리맡에 있는 경전에서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발견했을 때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구도 이에 해당된다.
“수행승들이여,
1) '늙기 마련인 사실에 대해서 늙지 말라.'라고
어떠한 수행자이건 성직자이건 신이건 악마이건 하느님이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결코 어떠한 보장도 하지 못한다.
2) 수행승들이여,
'병들기 마련인 사실에 대해서 병들지 말라.'라고
어떠한 수행 자이건 성직자이건 신이건 악마이건 하느님이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결코 어떠한 보장도 하지 못한다.
3) 수행승들이여,
'죽기 마련인 사실에 대해서 죽지 말라.'라고
어떠 한 수행자이건 성직자이건 신이건 악마이건 하느님이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결코 어떠한 보장도 하지 못한다.
4) 수행승들이여,
‘번뇌를 수반하고 재생을 가져오고 공포를 유발하고 고통을 낳고
미래의 태어남·늙음·죽음을 초래하는 그러한 악한 업들에 대해서
그 과보가 생겨나지 말라.'
라고
어떠한 수행자이건 성직자이건 신이건 악마이건 하느님이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결코 어떠한 보장도 하지 못한다.”(A4.182)
앙굿따라니까야 ‘보장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경에서
“세상의 그 누구라도 결코 어떠한 보장도 하지 못한다.”
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요즘 백세시대이다.
나는 백세까지 살 수 있을까?
나는 기대수명까지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인간은 업(業)대로 살기 때문이다.
어떤 업이 익어서 과보를 줄지 모른다.
또한 불운한 사건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살다 보면 우연의 피습도 있을 수 있다.
제 명대로 못사는 이유에 해당된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늘이 지나 내일이 올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반드시 죽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에서는 늙음, 질병, 과보가 언급되어 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평온한 일상이다.
이런 삶이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나 사람은 점차 늙어 간다.
기관이 망가지면 병에 걸린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누구나 임종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 누우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죽기 마련인 자이면서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전율하지 않는 자는 없다.”(A4.184)
라고 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죽음이 오기 전에는 천년만년 영원히 살 것처럼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라문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에 대하여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망을 떠나지 못하고,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고뇌를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했는데,
그가 어떤 혹독한 질병에 걸렸습니다.
혹독한 질병에 걸리자 그에게 이와 같이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도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을 버리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그는 슬퍼하고 상심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곤혹스러워합니다.
바라문이여,
이러한 자가 죽기 마련인 자이면서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전율하는 자입니다.” (A4.184)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자가 있다.
이 생에서 오로지 감각만 즐기며 산 자를 말한다.
감각기관이 망가져서 더 이상 즐기지 못했을 때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라며 슬픈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나도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을 버리게 될 것이다.”
라며 상실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익숙한 것이 하나 둘 떠날 때 강한 상실감을 느낀다.
때로 배신감을 느낀다.
한평생 감각을 즐기면 살았는데 더 이상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늙고 병들었을 때
몸의 배신을 실감한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몸에 대한 탐욕이 있다.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늙음과 병듦으로 인하여 몸이 먼저 배신한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저 사랑스런 몸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도 저 사랑스런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A4.184)
라며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날 것이다.
몸의 배신보다 더욱더 두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죄악’이다. 한평생 감각만 즐기며 살았다면 죄악만 짓고 산 것이나 다름 없다.
탐욕도 죄악이다.
그것도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중죄에 해당된다.
이는 천수경 십악참회에서
“탐애중죄금일참회”
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자에게 피난처가 있어야 한다.
한평생 즐기는 삶만 살았다면 피난처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에게
“아, 선한 일을 하지 않았고,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지 않았고,
두려움의 피난처를 만들지 않았고,
악한 일을 했고,
잔혹한 일을 했고,
죄악을 저지른 자들이 가는 그곳으로 나도 죽은 다음에 가게 될 것이다.”(A4.184)
라며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나는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자는 수행자일 수도 있다.
게으른 수행자에게는 후회가 일어날 것이다.
그가 질병으로 인해 임종을 앞두고 있다면
“나는 의심을 하고 의혹을 품어 올바른 원리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라며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지나간 세월이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향상하는 삶을 산 수행자에게 두려움은 없다.
혹독한 질병에 걸렸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1)“저 사랑스런 몸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도 저 사랑스런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 (A4.184)
2) “나는 악한 일을 하지 않았고,
잔혹한 일을 하지 않았고,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고,
선한 일을 하고,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고,
두려움의 피난처를 만들었다.
아. 악한 일을 하지 않았고,
잔혹한 일을 하지 않았고,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고,
선한 일을 하고,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고,
두려움의 피난처를 만든 자들이 가는 그곳으로 나도 죽은 다음에 가게 될 것이다.” (A4.184)
3) “나는 의심이 없이 의혹이 없이 올바른 원리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A4.184)
이것이 죽음에 대한 당당한 자세이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을 때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죽음은 축복이 될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죽기마련이다.
두 부류의 죽음이 있다.
죽음 앞에서 두려운 자가 있고 죽음 앞에 당당한 자가 있다.
죽음 앞에 두려운 자는 한평생 감각을 즐기며 산 자이다.
이런 자에게는
“이러한 자도 죽기마련인 자이면서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전율하는 자입니다.”
라는 가르침에 해당된다.
죽음 앞에 당당한 자는 한평생 수행자로 산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이러한 자도 죽기마련인 자이면서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전율하지 않는 자입니다.”
(A4.184)라는 가르침에 해당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난 세월 돌아보면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부터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라며 후회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후회없는 죽음은 어떤 것일까?
잘 산 사람은 후회가 없을 것이다.
수행자로 살면 죽음은 축복이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끝나기 때문이다.
천상의 삶이 있다.
그것은
“존자여,
저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인간계는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계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존자여,
저는 여기 신들의 천상세계에서 다음의 보다 높은 천상세계로 올라가서
완전한 열반에 들겠습니다.”(Mil.7)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천상의 삶은 평온한 것이다.
인간처럼 복잡하지 않다.
마치 시골의 한적한 삶이 연상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큰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삶이어서 괴로움이 없다.
더구나 수명도 보장되어 있다.
누구나 천상에 태어나길 바란다.
그러나 천상에 가는 사람은 드물다.
천상이 좋은 것은 복과 수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과 비교된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발판을 마련해 놓았을 때 안심이 된다.
이는
“나는 의심이 없이 의혹이 없이 올바른 원리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A4.184)
라는 말로 설명이 될 수 있다.
나는 지금 죽어도 후회 없는가?
2026-06-10
담마다사 이병욱
[출처] 죽음 앞에 당당하기|작성자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