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아귀
마음이 답답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전을 본다.
나에게 있어서 경전은 마음을 바꾸는 치료약이다.
접촉이 문제이다.
접촉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터넷접촉으로 인하여 분노가 일어났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더 갈증만 날 뿐이다.
이럴 때 머리맡에 있는 경전을 펼쳐야 한다.
경전을 펼치면 반전이 일어난다.
답답했던 마음, 분노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경전 속의 진리의 말씀에 공감하면 마음은 충만된다.
오늘 아침에 그랬다.
분노는 분노를 일으킨다.
결국 분노에 의해 삼켜지고 말 것이다.
현실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이런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경전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두운 결과가 따르는 어두운 행위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분노에 매인 신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인 언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인 정신적 형성을 의도한다.
그는 분노에 매인 신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인 언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인 정신적 형성을 의도한 뒤에 분노에 매인 세계에 태어난다.
그가 분노에 매인 세계에 태어나면,
분노에 매인 접촉이 그를 접촉한다.
분노에 매인 접촉에 접촉되어,
그는 마치 뭇삶들이 지옥에 있는 것처럼,
분노에 매인 느낌을 경험하고 오로지 고통스러움을 경험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어두운 결과가 따르는 어두운 행위라고 한다.”(A4.232)
지옥은 죽어서나 가는 곳일까?
초기경전 니까야를 보면 현실 세계에서도 지옥을 맛볼 수 있다.
이는
“그는 마치 뭇삶들이 지옥에 있는 것처럼,
분노에 매인 느낌을 경험하고 오로지 고통스러움을 경험한다.”(A4.232)
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세계를 말했다.
지금 분노하고 있는 자에게
“분노에 매인 세계에 태어난다.”
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육도윤회에서의 지옥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괴로운 과보에 대한 것이다.
현실이 지옥이 될 수 있다.
분노했을 때 지옥을 경험한다.
분노했을 때 아수라도 된다.
분노했을 때 자신의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분노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떠할까?
분노하는 모습을 누군가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어떤 모습일까?
아수라의 모습일 것이다.
분노의 과보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은 사진은 어떠할까?
지옥의 모습일 것이다.
세계라 하여 반드시 산천초목 삼라만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눈과 귀 등으로 접촉한 것도 세계이다.
시각의 세계, 청각의 세계 등 육처의 세계이다.
세계는 모든 것이다.
자신의 우주 모든 것이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S35.23)라고 말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
어떤 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고 말한다.
대부분 이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한 세상은 다르다.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접촉한 것이 세상인 것이다.
나에게 왜 이런 번뇌가 일어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접촉’에 따른 것이다.
심심해서 유튜브 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싫어 하는 정치인이 땡깡부리듯 하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이로 인하여 마음이 답답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울하게 되었다.
모두 접촉에 따른 것이다.
번뇌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피하는 것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 말뚝, 가시덤불, 갱도, 절벽, 웅덩이, 늪지를 피한다.
그리고 총명한 길벗은 앉기에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앉고,
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로 가고,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와 사귀면,
악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성찰하여 그러한 적당하지 않은 자리,
그러한 적당하지 않은 장소,
그러한 악한 친구를 피한다.
수행승들이여,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M2)
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일까?
도피하듯 사는 것은 비난받을 일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마치 사나운 개를 피하듯,
보기 싫은 대상에서 멀리 떠나라고 했다.
세상은 온통 지뢰밭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잘못 밟으면 터진다.
온라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심하다고 하여 유튜브를 보았을 때 기분이 더러워질 때가 있다.
분노로 부글부글 끓을 때가 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간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이다.
이런 것은 피해야 한다.
성냄은 불선법이다.
분노하면 불선업만 쌓이게 된다.
더 나아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행위를 유발하게 한다.
이로 인하여 죽을 정도로 고통받기도 한다.
현실에서 지옥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어두운 결과가 따르는 어두운 행위라고 한다.”(A4.232)
라고 말했다.
어두운 행위를 하면 고통받는다.
불선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이다.
반대로 선업을 하면 선업과보를 받는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밝은 결과가 따르는 밝은 행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분노를 여읜 신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를 여읜 언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를 여읜 정신적 형성을 의도한다.
그는 분노를 여읜 신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를 여읜 언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를 여읜 정신적 형성을 의도한 뒤에 분노를 여윈 세계에 태어난다.
그가 분노를 여윈 세계에 태어나면,
분노를 여읜 접촉이 그를 접촉한다.
분노를 여인 접촉에 접촉되어,
그는 마치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세계의 신들에 있는 것처럼,
분노를 여읜 느낌을 경험하고 오로지 즐거움을 경험한다.
수 행승들이여,
밝은 결과가 따르는 밝은 행위가 있다.”(A4.232)
당연한 이치이다.
분노를 여의었을 때 그 마음 자리는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 있을 것이다.
이런 기분은 천상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는 마치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세계의 신들에 있는 것처럼,
분노를 여읜 느낌을 경험하고 오로지 즐거움을 경험한다.”(A4.232)
라고 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지옥과 천상을 왕래한다.
죽어서 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에 따른 것이다.
모두 다 내가 만든 것이다.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있는 불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네가 창조한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이다.
내가 마음 쓰는 것에 따라 이 세상은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상이 되기도 한다.
지옥과 천상은 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불선업을 지어 불선과보가 나타나면 바로 그 순간 지옥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1) 신체적 악행,
2) 언어적 악행,
3) 정신적 악행,
4) 잘못된 견해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A4.212)
라고 했다.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에서 지옥을 맛본다.
유튜브에서 못 볼 것을 보고 난 다음 마음이 답답할 때 지옥을 맛본다.
이런 더러운 기분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극적인 전환을 해야 한다.
경전 보다 더 나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경전을 보면 변화가 일어난다.
답답하고 더러웠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진리의 힘일 것이다.
현실에서 천상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천상에 태어난다.”(A4.212)
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지옥만 있고 천상만 있을까?
그 중간도 있을 것이다.
인간세계가 그렇다.
육도윤회하는 세상이다.
육도가운데 인간은 중간에 위치한다.
아래로는 지옥이 있고 위로는 천상이 있다.
중간에 있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갖는다.
때에 따라 지옥이 되고 때에 따라 천상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어둡고 밝은 결과가 따르는 어둡고 밝은 행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신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언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정신적 형성을 의도한다.
그는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신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한 언어적 형성을 의도하고,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정신적 형성을 의도한 뒤에,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 를 여의기도 한 세계에 태어난다.
그가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세계에 태어나면,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접촉이 그를 접촉한다.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접촉에 접촉되어,
그는 마치 인간의 세계나 어떤 천상세계의 신들이나 어떤 타락한 곳의 존재처럼,
분노에 매이기도 하고 분노를 여의기도 한 느낌을 경험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느낌을 경험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어둡고 밝은 결과가 따르는 어둡고 밝은 행위라고 한다.”(A4.232)
핵심은 행복과 고통을 번갈아 가며 받는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지옥을 경험하고 또 한번은 천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둡고 밝은 결과가 따르는 어둡고 밝은 행위”
라고 했다.
오로지 행복만 있다면 천상일 것이다.
오로지 고통만 있다면 지옥일 것이다.
인간은 행복과 고통이 교차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희로애락이 있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하길 바란다.
지금 고통스러운 자는 이 고통이 하루 빨리 끝나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어둡고 밝은 결과가 따르는 어둡고 밝은 행위가 있는 인간은 고락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경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이는 인간의 세계,
어떤 천상세계의 신들,
어떤 타락한 곳의 존재를 말한다.
인간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어떤 천상세계의 신들이나 어떤 타락한 곳의 존재(ekacce devā ekacce vinipātikā)”
는 어떤 것일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어떤 천상세계에 태어난 신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欲界]의 신들을 말한다.
그들은 위신력이 강한 신들을 보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윗옷을 어깨에 걸치고 합장하는 등 때때로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천상의 번영을 누리며 행복해하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타락한 곳에 사는 자들'은 천궁의 아귀들(vemānik apeta)을 말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어떤 때는 행복을 느끼고 어떤 때는 고통을 느낀다.
그들에게 용이나 금시조나 코끼리나 말, 인간들처럼 고통과 행복이 뒤 섞여 있다.” (Mrp.III.213)
천상도 천상나름이다.
천상에서도 지위가 낮은 천신이 있다.
그들은 보다 높은 지위의 천신에게 예경을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인간으로 보았을 때 괴로움 같지 않은 괴로움이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큰 괴로움인 것이다.
고락을 함께 하는 존재 가운데 천궁아귀(vemānikapeta)가 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지속적으로 어떤 때는 행복을 느끼고 어떤 때는 고통을 느낀다.”(Mrp.III.213)
라고 설명되어 있다.
빠알리 사전에서는
“a kind of spiritual beings liable to semi-punishment and semi-enjoyment.”
라고 설명되어 있다.
반은 벌받고 반은 즐거움을 누리는 존재를 말한다.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전을 읽는 맛이 있다.
여기서 경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서를 포함하여 법문집도 해당된다.
나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천궁아귀에 대한 것을 접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뿌라베다숫따 법문’에서 본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밋따윈다까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어머니에게 말로 잘못을 범하고는 집을 나와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가출 청소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어느 바닷가 항구에서 원양어선을 탔습니다.
그런데 그 원양어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배가 원 하는 곳으로 가지 못하자 뱃사람들은
'이 배에 재수 없는 사람이 섞여 있어서 지금 우리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서
나쁜 업을 가진 사람을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주사위를 던지자 밋따윈다까가 걸렸습니다.
뱃사람들은 그를 대나무 뗏목에 태워 바다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 즉시 배가 잘 운항됐습니다.
밋따윈다까는 해류와 바람을 타고 떠내려가다
이전에 포살을 준수한 선업 덕분에
궁전아귀녀(vemānikapetī) 네 명이 사는 한 궁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궁전아귀녀'라는 존재는 '아귀녀'로 표현은 했지만,
선업과 불선 업이 섞여 그 결과를 받는 존재였기 때문에
칠일 동안은 천상의 영화를 누리다가 다음 칠일 동안은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궁전아귀녀들은 처음 일주일간 밋따윈다까를 잘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칠 일이 지나자 밋따윈다까를 자신들의 궁전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칠 일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긴 채
궁전아귀녀들은 지옥의 고통을 받으러 간 것입니다.
하지만 밋따윈다까는 궁전에서 기다리라는 그녀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대나무 뗏목을 타고 여행을 계속했습니다.”(뿌라베다숫따 법문, 178-179쪽)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자타카에서 보는 ‘밋따윈다까(Mittavindaka)의 일화’에 대한 것이다.
신화적이기도 하다.
해양모험영화를 보는 듯하다.
밋따윈다까는 바다에 버려졌다.
그는 뗏목에 의지해서 표류하다가 아귀녀들이 사는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귀녀들은 칠일동안은 천상의 영화를 누리다가
다음 칠일동안은 지옥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삶에 대하여 ‘궁전아귀’ 또는 ‘천상아귀’라고 한다.
인간도 궁전아귀 같은 사람이 있을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군대 있을 때의 일이다.
군대에서는 일년에 한번 유격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일주일동안 입소하여 지옥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천상아귀들과 같은 존재가 된다.
일상에서 천상아귀 같은 삶도 있을 것이다.
반나절 천상 같은 시간을 보내다가도 나머지 반나절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아귀 중에는 낮 동안만,
혹은 밤 동안만,
혹은 칠일 동안만 등으로
불선업과 선업이 섞여서 과보를 주는 '궁전아귀'라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뿌라베다숫따 법문, 181쪽)라고 말했다.
인생은 어쩌면 궁전아귀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초년운은 좋아도 말년운이 좋지 않은 케이스도 해당될 것이다.
아니 매일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한다면 궁전아귀와 같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왜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생에 지은 업에 따른 것이다.
알 수 없는 전생에 선업과 불선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업을 지으면 과보를 받는다.
이번생에 받을 수도 있고 다음 생에 받을 수도 있다.
먼 후생에 받을 수도 있다.
업이 익으면 과보를 받는다.
과거생 언젠가 지은 업이 익으면 지금 받을 수도 있다.
‘무기한의 업’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는 것이다.
고락이 함께 하는 존재가 있다.
인간과 천상과 궁전아귀를 말한다.
이 가운데 궁전아귀는 고락을 반반씩 번갈아 받는다.
일주일동안 천상의 행복을 누리다가 다음 일주일은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래서
“칠 일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마치 군대에서 일주일동안 유격훈련 받으러 가는 것과 같다.
궁전아귀에 대한 이야기는 자타카에 실려 있다.
‘네 성문의 도시에 얽힌 본생이야기(Catudvāra Jātaka)’(Jat.439)가 바로 그것이다.
“이레 동안은 고통을 겪고 이레동안은 행복을 누렸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녀들이 고통을 겪으로 갈 때는 다시 바다 위로 나갔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삶은 괴로운 것이다.
비록 칠일동안 천상의 영화를 누리지만 다음 칠일동안은 지옥고를 겪는 것이다.
어떤 이는 천상이 어디 있고 지옥이 있냐고 말한다.
여기가 천상이고 지옥이라고 말한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육도는 있다.
경전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천상과 지옥을 말했다.
그런 세계는 실재로 있다.
불선업에 의해서 던져지면 지옥이고,
선업에 의해서 태어나면 천상인 것이다.
그런데 선업과 불선업의 과보가 교차되는 데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낮은 지위가 천상의 존재와 궁전아귀를 말한다.
인간은 아귀보다는 수승한 존재이다.
그런데 아귀 가운데에서도 궁전아귀는 마치 인간처럼 고락이 교차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랜덤하게 교차하지만 궁전아귀는 정확하게 반반씩 교차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받으러 갈 때는 마치 유격훈련 받으로 갈 때처럼 풀이 죽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궁전아귀보다는 낫다.
하루에도 여러 번 천상과 지옥을 오간다.
못 볼 것을 보았을 때 지옥을 경험한다.
분노의 감정이 지배되었을 때 타버린다.
그리고 지옥을 맛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피해야 한다.
피함으로써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은 감관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M2)
라고 했다.
여섯 감역에서 시각에 대한 것이다.
이를 ‘수호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라고 한다.
유튜브를 보면 번뇌가 일어난다.
주식 앱을 보아도 번뇌가 일어난다.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보지 않고 살 수 없다.
이런 때는 피해야 한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수호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수행으로 번뇌를 끊는 것이다.
수행자는 번뇌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평정을 유지한다.
설령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죽었어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를 죽였기 때문이다.
자아개념이 없는 자에게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매일매일 행복과 고통이 교차한다.
행복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과거 지은 업에 따라 고통을 받는다.
궁전아귀와 같은 주기적인 고통을 받을 때가 있다.
괴로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이 없다면 늘 그 상태일 것이다.
천상의 삶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인간세상은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도 인간일 때 가능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공부가 될까?
2026-06-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