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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 연꽃

경전브리핑

작성자현문[아리야(Ariya)]|작성시간26.06.15|조회수3 목록 댓글 0

경전브리핑

 

 

어떤 이가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어떤 법사의 유튜브를 링크한 것이다.

들어가 보니 에이아이가 나레이션한다.

 

이를 보고서

“나도 유튜브 함 해볼까?”

라는 댓글을 남겼다.

 

유튜브시대이다.

TV 보는 대신 유튜브를 본다.

그것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튜브에 중독된다.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된 것이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어떤 말인가?

AI개요에 따르면,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상대방이 스스로의 기억,

판단력, 현실 감각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정신적 학대 행위입니다.”

라고 설명된다.

 

이어서

“국립국어원에서는 이를 '심리적 지배'라는 우리말로 다듬어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되겠다.

특정 유튜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가스라이팅된 것으로 보았는데 본래 뜻과 어긋난다.

그러나 ‘심리적 지배’라는 말은 수용가능하다.

 

유튜브를 보고 있다.

끊었다고 보았다가를 반복한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끊는다.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보게 된다.

간사한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유튜브는 자제해야 한다.

하루종일 유튜브만 보고 있다면 수동적이고 소극적 삶이 된다.

하루 종일 TV만 보고 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의존성이다.

특정 유튜브에 매몰되어 있다면 그 유튜버에게 심리적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주로 시사와 정치관련 유튜브를 본다.

유튜버의 진행방식을 보면 뉴스브리핑에 가깝다.

수집된 뉴스를 설명해 주는 형식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가 들어간다.

 

불교 유튜브도 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유튜브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조회수가 형편없이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비불교적인 것에 대한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와 조회수가 높다.

 

불교라고 해서 다 똑 같은 불교는 아니다.

무늬만 불교인 것도 있다.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높은 것을 보면 비법(非法)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정법보다 비법이 활개 치는 세상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경전이라는 잣대를 들이 되면 판별된다.

 

페이스북에 수많은 스님들의 글이 있다.

어느 스님은 노래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경전이라는 잣대,

그리고 율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모두 비법이 된다.

 

매일 장문의 글을 쓰고 있다.

의무적으로 쓰는 것이다.

오래 되었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20년 되었다.

 

나는 왜 매일 글을 쓰는가?

나는 왜 오전은 글 쓰는 시간으로 보내는가?

스스로 족쇄를 채웠기 때문이다.

게으르지 않기 위해서 쓴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된다.

 

무어라도 하나 써야 한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쓸 거리는 많지 않다.

만약에 매일 일상에 대한 것을 쓴다면 매번 똑 같은 내용을 올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점심 때 밥 먹고, 저녁 때 밥 먹는 식의 이야기를 말한다.

마치 초등생의 일기장 같은 것이 되고 만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는 매일 글을 올린다.

주로 일상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사람의 글을 본지 십년 가까이 된다.

그러나 변화는 거의 없다.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이야기, 먹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글에서 배울 것은 없다.

 

나의 글을 길다.

글이 길어지게 된 것은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쓰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일상에 대한 것만 쓰게 된다면 매일 쓸 수도 없을뿐더러 A4 한장 채우기도 힘들다.

 

유튜버는 매일 방송한다.

자신의 일상에 대한 것만 이야기한다면 소재는 고갈되고 말 것이다.

뉴스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매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유튜버는 뉴스브리핑을 한다.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내가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은 경전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매일 경전브리핑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매일 경전을 읽는다.

머리맡에 놓고 읽는다.

가까이 있어서 틈만 나면 읽는다.

그러다 보니 경전을 다 읽게 되었다.

수년 걸린 것이다.

요즘은 다시 읽고 있다.

 

경전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격정적 마음인 상태에서 경전을 펼치면 격정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경전은 영원한 고전이다.

수천년전 사람들의 지혜가 녹아들어간 것이다.

아무리 스마트폰시대,

에이아이시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무상, 고, 무아라는 절대적 진리는 변함없다.

 

좋은 글이 있으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경전을 읽고서 새길만한 것이 있으면 글로 남긴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도 해당된다.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다.'

라고 알 수 있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

 

앙굿따라니까야 ‘밧싸까라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바라문 밧싸까라가

“존자 고따마여, 그렇다면 참 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다.'

라고 알 수 있습니까?”(A4.187)

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변한 것이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본다고 한다.

그렇다면 깨닫지 못한 일반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아볼 수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불가능하다.

 

이는 부처님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다.'

라고 알 수 있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경에서 참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니까야 해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은 해제에서

“경전에서 참사람은 오계(五戒)를 지키는 차원의 윤리적 인간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혈통에 든 님(gotrabhu 種姓者)이라는 말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四雙八輩]이 되기 직전의 사람의 반열에

입문한 자(種姓者)'의 단계를 말하는데,

그는 선정이나 출세간적인 길에 들기 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마지막 의식단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 사람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참사람에 속한다.”

라고 설명해 놓았다.

 

참사람은 빠알리어 삽뿌리사(sappurisa)를 번역해 놓은 말이다.

삽뿌리사는 ‘sat (=sant)+purisa’의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sat’는 ‘being, existing, good, true’의 뜻이다.

존재, 착함, 진실의 의미인 것이다.

‘purisa’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북방불교에서는 삽뿌리사에 대하여 ‘선인’

또는 ‘선남자’로 번역했다.

 

삽뿌리사에서 ‘sat’는 성스럽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전재성 선생의 해제글에 따르면 사쌍팔배의 성자가 삽뿌리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부처님의 혈통에 든 자를 삽뿌리사라고 한다.

 

부처님의 혈통에 든자를 ‘종성자’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을 체험한 사람을 뜻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적 경지에 이르렀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즉 수다원이 되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본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마도 수행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적 경지,

즉 열반에 이른 자는 열반에 이른 자를 알아보는 것이다.

 

열반이 어떤 경지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열반은 명색이 사라진 상태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열반이다.

그럼에도 경전에서는 다양한 비유로 설명된다.

 

참사람은 참사람을 알아 본다.

그러나 참사람이 아닌 일반사람, 즉 범부는 참사람을 알아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범부는 열반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다.'

라고 알 수 있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

라고 말했다.

 

참사람도 참사람 나름이다.

수다원의 참사람도 있고 아라한의 참사람도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3) 타자의 마음을 꿰뚫는 삶] 타자의 마음을 꿰뚫는 앎은

① 한계적·② 확장적·③ 무한적·④ 행도적·⑤ 과거적·

⑥ 미래적· ⑦ 현재적·⑧ 외부적 대상의 여덟 가지 대상에 대해 작용한다.

 

어떻게 작용하는가?

1)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마음을 알 때는 그것은 한계적 대상을 갖는다.

 

2) 미세한 물질계와 비물질계의 마음을 알 때는 그것은 확장적 대상을 갖는다.

 

3) 길과 경지를 알 때는 그것은 무한적 대상을 갖는다.

그래서 그 경우 범부는 흐름에 든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 번 돌아오는 님,

돌아오지 않는 님,

거룩한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

이와 같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4) 길의 마음을 대상으로 삼을 때 그것은 행도적 대상을 갖는다.

 

5) 과거의 칠일 간 내지는

 

6) 미래의 칠일 간 타자의 마음을 알 때 그것은 과거적 대상을 갖거나

미래적 대상을 갖는 것이다.”(Vism.13.110)

 

타심통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범부는 성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범부가 성자의 경지를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아라한은 범부를 포함하여 모든 사쌍팔배의 모든 성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경전을 근거로 말해야 한다.

아라한이 되면,

즉 깨달은 자가 되면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 아니다.'

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합니다.”(A4.187)

라고 말했고,

 

또한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참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다.'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합니다.”(A4.187)

라고 말했다.

 

흔히 부처님 손바닥에서 논다고 말한다.

이는 정신적 능력이 높은 자는 정신적 능력이 낮은 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타심통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수행에서도 말할 수 있다.

 

수행을 하면 점검을 해준다.

위빠사나수행을 하면 스승이 수행문답을 통해서 점검해주는 것이다.

이를 흔히 ‘인터뷰한다’라고 말한다.

 

수행점검은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스승이 점검해줄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의 말을 들어 보면 어느 단계에 있는지 훤히 알 수 있다.

 

이런 것도

“참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 아니다.'

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합니다.”(A4.187)

라는 가르침에 해당될 것이다.

 

범부는 수다원의 마음을 모른다.

그러나 수다원은 범부의 마음을 알고 있다.

수다원은 사다함의 마음을 모른다.

그러나 사다함은 수다원의 마음을 알고 있다.

이는 정신적 경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남아 있는 번뇌와 관련 있다.

 

사다함은 수다원에 비해 탐욕과 성냄이 옅어진 상태이다.

이는 행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라한이 보았을 때는 다 보일 것이다.

번뇌가 얼마나 옅어졌는지,

번뇌가 얼마나 소멸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세상에 똑똑한 자는 많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재산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수행자만 못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왕 엘레이야는 현명해서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에 관해서,

말 해야 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하여,

가장 이익에 밝은 자입니다.

존자여

그 러나 수행자 라마뿟따는 왕 엘레이야 보다 현명해서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에 관해서,

말해야 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하여,

훨씬 이익에 밝은 자이기 때문에,

왕 엘레이야는 수행자 라마뿟따에게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최상의 존경을 표합니다.”(A4.187)

 

왕은 최고 권력자이다.

그럼에도 수행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자가 왕보다 훨씬 이익에 밝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자가 왕보다 정신능력이 더 높은 것을 말한다.

 

왕이 수행자를 공경하는 이유가 있다.

왕이 물질적으로는 많이 가진 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자인 것이다.

단지 정신적 능력만을 놓고 보았을 때 왕은 수행자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빠세나디 왕에게

“대왕이여,

당신은 세속인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북적거리는 수 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까씨국에서

나는 화환과 향수와 크림을 사용하며 금과 은을 받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

를 알기가 어렵습니다.”(Ud.64, S3.11)

라고 말했다.

 

왕은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배운 박사라고 해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은 자라면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떤 부자라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자라면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범부는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여기 많이 배운 자가 있다.

여기 나이가 들어 경험 많은 자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다.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

‘이 분은 참사람이 아니다.'

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

라고 말했다.

 

흔히 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을 한다.

사람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와 같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

즉 범부는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참사람, 즉 깨달은 사람,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에게 얼마나 번뇌가 많은 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오늘도 숙제를 한 것이다.

이렇게 매일매일 쓴 글은 산을 이룬다.

게으르지 않기 위해서 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기 위해서 쓴다.

이런 글을 유튜브에 올리면 어떨까?

에이아이에게 나레이션 하게 하는 것이다.

 

유튜브는 마력이 있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특히 시사와 정치에 대한 것도 그렇다.

게시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도 가스라이팅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튜버는 부지런하다.

매일매일 영상을 찍어댄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뉴스브리핑에 있을 것이다.

 

뉴스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구독자와 조회수가 올라갈 것이다.

이는 유튜브 수익과 직결된다.

 

그래서일까

“구독”,

“좋아요”,

“알림설정”에 목을 매는 것 같다.

 

유튜버는 뉴스브리핑으로 먹고 산다.

구독과 조회수가 높으면 수익도 생긴다.

블로거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경전브리핑으로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는다. 유튜브를 하면 수익이 생길지 모른다.

나도 유튜브 할 날 있을까?

 

 

2026-06-13

담마다사 이병욱

[출처] 경전브리핑|작성자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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