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과의 결별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죽음이란 익숙한 것에서 결별이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모든 것이 거의 변함없다.
이대로 천년만년 살 것 같다.
그러나 종말은 오고야 말 것이다.
세상에 죽음보다 더 큰 변화가 어디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떠나지 못한다.
불편해도 계속 있는 것은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한곳에 있다 보면 타성에 젖게 된다.
어느 페이스북친구는 자신의 고향에서 오래 살고 있다.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어떻게 될까?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삶이 될 것이다.
나태한 습성이 되기 쉽다.
오랜 세월 한사무실에 있었다.
안양에 있던 호정타워 사무실을 말한다.
2007년 11월부터 2026년 2월까지 무려 19년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났다.
이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다.
그때부터 영원한 직장처럼, 영원한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20년 가까이 되었을 때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를 주어야 한다.
잘 나간다고 해서 오래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오래 있다 보면 타성이 되어 게으르게 된다.
삶의 활력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럴 때는 바꾸어 주어야 한다.
포천에 온지 네 달 되었다.
올해 2월 안양 호정타워 사무실을 내 놓은 후 포천 아파트로 왔다.
왕방산 자락 아래에 있다.
아파트의 편리함과 전원주택의 장점을 갖추어 놓은 듯하다.
무엇보다 산책길이다.
매일 산책을 한다.
아침에 왕복 한시간 걷는다.
한국아파트에서 시작되는 왕방산 등산로를 따라 1.5키로가량 걷는다.
산책길에 명상을 한다.
걷기 명상이다.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이럴 때 다른 생각 나지 않는다.
발자국 소리라는 물질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여기에 나라는 개념은 없다.
나를 지워 버리면 세상이 편안하다.
나라는 개념이 개입되면 힘들어진다.
망상을 하는 것도 나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오분명상을 한다.
등산로 벤치에 앉아서 눈을 감는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세팅해 놓는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간다.
오분이 다가올수록 남아 있는 시간은 점차 줄어간다.
사람의 수명이 줄어 드는 것 같다.
마침내 알람 소리가 울렸을 때 눈을 뜬다.
명상 중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눈을 감는 것이고 태어남이라는 것은 눈을 뜨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것이다.
마지막 남은 일초가 지났다.
알람소리가 나자 눈을 떴다.
어두움에서 밝음이다.
눈 앞에는 숲이 펼쳐졌다.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태어남에 대하여 눈 뜬 것으로 묘사했다.
마치 화생(化生)하는 것과 같다.
태생은 태 내에서 열달 있어야 하나 화생은 죽음과 동시에 마치 눈을 뜨는 것처럼
순식간에 태어나는 것이다.
육도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경전에서 그렇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믿는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정한다면 근거를 대야 할 것이다.
경전적 근거를 말한다.
그러나 육도윤회는 초기경전 니까야에서 차고도 넘친다.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싸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싸리뿟따여,
난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싸리뿟따여,
생명체가 그 껍질을 깨고 태어나면,
싸리빳따여,
이것을 난생이라고 한다.
싸리뿟따여,
태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싸리빳따여,
생명체가 태의 막을 까고 태어나면,
싸리뿟따여,
이것을 태생이라고 한다.
싸리뿟따여,
습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싸리뿟따여,
생명체가 썩은 물고기, 부패한 시체, 부패한 굳은 우유에서나 물웅덩이나 연못에서 태어나면,
싸리뿟따여,
이것을 습생이라고 한다.
싸리뿟따여,
화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싸리뿟따여,
신들이나 지옥의 뭇삶들이나 특수한 인간이나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 생겨나는데,
싸리뿟따여,
이것을 홀연히 태어나는 화생이라고 한다.
싸리뿟따여,
이와 같은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M12)
부처님이 네 갈래 태어남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금강경에서 보는 태생, 난생, 습생, 화생에 대한 모티브가 되는 가르침이다.
육도윤회하는 삶에서 태생은 인간과 축생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난생과 습생도 있다.
인간과 축생을 제외한 것은 모두 화생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신들이나 지옥의 뭇삶들이나 특수한 인간이나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 생겨나는데,
싸리뿟따여,
이것을 홀연히 태어나는 화생이라고 한다.”(M12)
라고 말했다.
지옥, 아귀, 아수라, 천상의 존재는 화생하는 것이다.
화생은 홀연히 태어나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이해하기 쉽다.
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하늘아들 만두까 등이 여기서 그 예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세존께서 각가라 연못의 언덕에서 짬빠 시에 사는 주민 들에게 법문을 하실 때
한 개구리가 세존의 목소리에 대하여 인상을 파악하였다.
그때 한 목우자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 있으면서,
그의 머리를 눌렀다.
그는 곧바로 죽어서 서른셋 신들의 천상세계에 12요자나가 되는 황금궁전에 태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듯,
거기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보고
"오! 내가 여기에 태어나다니.
내가 어떠한 업을 지었는가?"
라고 마음을 전향하면서 부처님의 목소리에서 인상을 파악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Vism.7.51)
개구리 만두까가 천신으로 태어나는 장면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말은
“잠에서 깨어난 듯”
이라는 표현이다.
화생하는 것에 대하여 잠자다가 깬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분명상을 하면서 시간이 되자 눈을 떴다.
눈 앞에 숲이 펼쳐졌다.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마치 화생한 것 같다.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한다.
익숙한 것과 이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곳에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타성에 젖기 쉽다.
타성에 젖게 되면 발전이 없다.
한 곳에서 십년, 이십년, 삼십년 살다 보면 지형은 낯 익을 것이다.
타성에 젖게 된다.
그러나 몇 년 살다가 다른 곳에서 살게 되면 삶의 활력이 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오래 있었다.
한사무실에 19년 있었던 것이다.
계절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
단순하게 계산해 보아도 76번이다.
이토록 오랜 세월 있었을 때 타성에 젖게 되었다.
한 집에서 수십년 사는 사람이 있다.
아파트를 분양 받아서 이십년, 삼십년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오래 살면 매우 익숙할 것이다.
익숙한 것만큼 타성에 젖는다.
현재에 머무르게 된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나태한 습성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한직장에 오래 머문 사람이 있다.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사람이다.
한직장을 수십년 다닌 것이다.
이런 것도 타성에 젖게 된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는 것이다.
술과 친구는 오랠수록 좋다고 한다.
익어서 좋은 것이다.
특히 친구는 학창시절 친구가 좋은 것이다.
왜 그런가?
이해관계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다.
한곳에서 수십년 머무르는 것은 익숙해서 좋다.
수십년된 학교친구는 익숙해서 좋다.
그러나 둘 다 타성에 젖을 수 있다.
익숙한 것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익숙한 것을 만나면 반갑다.
어제 동기모임이 있었다.
종교모임이다.
능인선원 37기 동기모임이다.
모임은 22년 되었다.
2004년 능인선원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하면서 인연 맺은 사람들이다.
친구라 하여 반드시 학교친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친구는 그때뿐이다.
특히 업무와 관련되어 만난 사람은 일이 끝남과 함께 다시는 만날 일 없다.
종교모임 사람들도 친구가 될 수 있다.
학교친구처럼 동기모임이 되는 것이다.
불교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동창이고 동기가 되는 것이다.
동기모임에는 신입회원이 없다.
그때 함께 교육받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늙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내가 있다.
올해 환갑이 되었다.
불교교양대학 다닐 때는 서른 여덟이었다.
막내는 바쁘다.
온갖 궂은 일 다한다.
모임을 준비하고 계산을 하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끝까지 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한번 막내이면 영원한 막내이다.”
라는 말이 성립된다.
동기모임은 청담동에서 가졌다.
동기들 대부분이 강남에 살기 때문에 강남에 장소를 정한 것이다.
오늘날 강남은 부자들만 사는 동네로 알려져 있다.
동기들 가운데에서도 부자가 있을 것이다.
강남에 살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파트 가격이 수십억원하는 부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 부자는 아니다.
모임을 앞두고 막내가 카톡방에 글을 남겼다.
막내는
“모임에서 정치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세요.”
라고 써 놓았다.
강남에는 보수적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카톡방에는 심심치 않게 현 정부를 비난 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오랜만에 동기들을 만났다.
요즘은 일년에 한두번 만난다.
만날 때마다 반갑다.
만나면 두 손잡고 안부를 묻는다.
건강에 대한 것도 묻는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생각난다.
“오랜 세월 타향을
헤매던 나그네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귀환을 반기듯
공덕들을 쌓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갈 때
공덕들이 친지들처럼
사랑스럽게 그를 반긴다.”(Dhp 219-220)
요즘은 늙는다는 말보다 익어간다는 말을 사용한다.
동기들은 얼마나 익었을까?
세월과 함께 늙어 가는 것을 보니 많이 익었다.
정신적으로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동기들은 나이가 많다.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1953년생 그룹과 1960년생 그룹이다.
전자는 나이가 이제 칠십대중반이 되었다.
후자는 육십대 중후반이 되었다.
동기들간에 위계는 없다.
나이는 서로 다르지만 한해에 함께 배운 인연으로 모두 동등하다.
그럼에도 나이 든 사람에게는 예우를 갖추어 주어야 한다.
막내는 모임주선, 회계 등 온갖 잡일을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마치 집안의 어른처럼 대접만 받는 것 같다.
한번 형이면 영원한 형인 것 같다.
동기 가운데 회계사가 있다.
1953년생 그룹에 해당된다.
이번에 책을 하나 만들었다.
모인 사람들에게 책을 한권씩 나누어 주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언제 글을 썼을까?
그러나 자신이 쓴 글은 아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좋은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책 제목은 ‘지혜의 샘터’이다.
황재윤 선생이 편저한 것이다.
증정본으로 만들었다.
비매품이다.
아마 자비출판하여 인연 있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책을 열어 보았다.
책에는 16개 챕터에 모두 180개의 글이 실려있다.
이런 글은 카톡방에서도 보았다.
회계사 황재윤 선생은 카톡방에 글을 종종 올린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글에 대한 것이다.
아마 이런 글을 수집하여 책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황재윤 선생이 만든 책은 자신의 글은 아니다.
그래서 서문에 해당되는 프롤로그에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좋은 글 받은 글에는 원래 저자의 이름이 없었 습니다.
원저자 이름없이 글을 올린것을 저자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원저 자님이 이 글을 보시고,
본인 글이라고 알려주시면 다음 판부터 성함을 기재하겠습니다.”
라고 써 놓았다.
책을 열어 보았다.
삶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친구가 있다.
글을 보니
“좋은 친구를 두면.....2년 행복하고 귀여운 친구를 두면....7년 행복하며. 착한 친구를 두면...
.70년 행복하데요.
그런데 사랑하는 친구가 옆에 있으면 일평생 행복합니다.”(25쪽)
라고 쓰여 있다.
종교로 인하여 만난 사람들이다.
종교모임이 이렇게 오래 유지될 줄 몰랐다.
무려 22년 모임이 되었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대학 같은 학번 같은 학과 모임이 전부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모임은 없다.
초등학교 모임도 없다.
서울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에서 학교 다닌 사람은 초, 중, 고 모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졸업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것일까?
불교교양대학도 학교이다.
비록 세 달 과정이기는 하지만 수료증도 받았다.
그리고 모임도 결성되었다.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달랐다.
당연히 살아 온 방식도 달랐다.
그러나 함께 배웠다는 것 하나만으로 하나가 되었다.
모음은 매년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이제는 함께 늙어 간다.
그 사이에 사망한 사람도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 같다.
이쯤 되면 ‘관우’가 된다.
관짝을 메고 가는 ‘관짝친구’가 되는 것이다.
모임은 오랜 세월 유지되었다.
그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다.
매년 몇 차례 순례법회 다닌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갖가지 경조사도 있었다.
이런 것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모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모임은 2004년부터 시작되었지만 글은 2006년부터 썼다.
이후 모임에 대한 글을 남겼다.
갖가지 행사가 있었다.
사진과 함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리고 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100 능인금강37법회’라는 제목의 책이다.
백번째 책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글은 모임의 산역사나 다름없다.
책을 만들고 나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법우들을 사무실로 초대하여 책담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리고 중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22년은 긴 세월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2004년 당시 1960년생들은 44세였다.
1953년생들은 51세였다.
이제 사십대는 육십대가 되고 오십대는 칠십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모임은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다.
만나면 반가운 것이 친구이다.
익숙한 것이 큰 이유이다.
함께 늙어가고 함께 익어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두 다 떠날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모임에서 막내는 바쁘다.
이제 환갑이 된 막내는 활력소가 된다.
가장 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올해 제가 환갑인데 재롱잔치는 다음에 할께요 ㅋㅋ”
라고 카톡방에 써 놓았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
그러나 사는 곳은 오래될수록 타성에 빠진다.
직장에 오래 다녀도 타성에 젖게 된다.
변화를 주어야 한다.
환경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내놓기를 잘 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포천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이제 네 달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천년만년 있을 생각은 없다.
오래 있으면 타성에 젖는다. 바꾸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글 쓰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사무실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매일 오전은 글 쓰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존재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
나이가 들수록 늙어 간다.
늙는 다는 말보다 익어간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또 다른 말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나 저나 막내의 재롱잔치를 언제 볼 수 있을까?
2026-06-14
담마다사 이병욱
[출처] 익숙한 것과의 결별|작성자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