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면서 배우기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강학(講學)이라는 말도 해당된다.
야학에서 강학을 말한다.
한번도 남을 가르쳐본 적이 없다.
강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것도 강박일 것이다.
나는 자영업자이다.
자영업자는 자유인이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감이 없으면 노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유튜브만 보고 시간을 때울 수 없다.
무언가 하나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글쓰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하루일과를 마칠 때 뿌듯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튜브와 같은 외부대상에 마음을 하루종일 두었을 때 허무한 것이다.
이럴 때 글이라도 하나 완성한다면 오늘 하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게 된다.
이른바 하루농사를 짓는 것이다.
농부는 일년농사를 짓는다.
벼농사가 대표적이다.
농부가 농한기 때 노는 것처럼 보여도 전체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자영업자에게 하루농사는 글 쓰는 것이다.
글은 오전에 쓴다.
점심 이후가 되면 마음이 오염되어서 글 쓸 맛이 나지 않는다.
글쓰기 전까지는 일체 뉴스를 보지 않는다.
페이스북 하나만 허용한다.
외부 요인이 글 쓰는데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본격적인 일과는 글쓰기 이후가 된다.
몇시간에 걸쳐 쓴 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리고 나면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는 것이 된다.
이후 시간은 놀아도 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숙고하고 사유해야 한다.
글 쓸 것에 대하여 품고 있어야 한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가 되기 쉽다.
경전을 근거로 쓴다.
마치 유튜버가 뉴스브리핑하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처럼,
블로거는 경전의 문구를 중심으로 하여 글을 전개해 나간다.
오늘 아침 밀린다팡하를 읽었다.
산책 나가기 전에 읽었다.
몇 분만이라도 읽고 싶었다.
읽기를 그만 둔다면 나만 손해이다.
왜 그런가?
산책길에서 사유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밀린다팡하에 강학에 대한 것이 있다.
어떤 내용인가?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이 있다.
“그러자 존자 나가세나는 그 재가의 여자신도에게 출세간적으로 공(空)과 상응하는
심오한 설법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때 그 재가의 여자신도에게 그 자리에서 티끌 없고 때 묻지 않은 눈,
'어떤 것이든 생겨난 그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라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존자 나가세나는 그 재가의 여자신도를 축복하고 자신이 가르쳐준 진리를 성찰하면서
통찰을 확립하고 그 자리에 앉아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Mil.16)
이것이 강학이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것이다.
강학의 본래 뜻은 학문을 닦고 연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학문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도 있다.
나가세나 존자는 재가의 여신도를 가르쳤다.
경에 따르면 ‘공과 상응된 심오한 설법’이라고 했다.
각주에 따르면 ‘SN.II.266’에 실려 있다고 써 있다.
‘SN.II.266’을 찾아 보았다.
상윳따니까야 2권 266페이지에 있음을 말한다.
찾아보니
“여래가 설하시는 모든 법문은 심오하여 그 뜻이 깊고 출세간적이고
공(空)과 상응하므로 그것들을 설할 때는 우리는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슬기로운 마음을 내고,
받아 지녀서 통달하고자 그 가르침에 관해 사유하리라.”(S20.7)
라고 배워야 한다는 내용이다.
‘공과 상응한다(suññatappaṭisaṃyutta)’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각주에
“공과 상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므로 실체성이 없다는 뜻이다.
”(KPTS본 밀린다팡하, 76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른바 ‘연기공’을 말한다.
나가세나는 재가여신도에게 공과 상응된 설법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은 ‘연기공’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과 연기는 같은 것이 된다.
나가세나는 연기법을 설한 것이다.
나가세나는 재가의 여신도에게 연기법을 설했다.
경에 따르면 재가의 여신도는 삼십년동안 나가세나의 스승을 시봉해 왔다.
그런데 나가세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것이다.
수다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설법을 했던 자신도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는 것이다.
가르치면서 배운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나가세나의 스승은
“나가세나여,
훌륭하다. 훌륭하다.
하나의 화살을 쏘아 두 위대한 몸을 꿰뚫었구나.”(Mil.16)
라고 말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는
“어떤 것이든 생겨난 그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yam kiñci samudaya 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ṃ)”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생멸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진리의 눈’이 생겼다고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것이다.
수다원이 된 것이다.
이 말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진리의 눈 (法眼:dhammacakkhu)'은 '흐름에 드는 길'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생 겨난 그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라는 문구는
그 길의 발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그 목표는 열반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장이 팔정도의 실천에 대한 결의라고 파악해야 한다.” (Pps.III.92)
성자의 흐름에 들면 하나의 게송을 읊는다.
이는
“어떤 것이든 생겨난 그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을 수다원오도송이라고 한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보면 수다원오도송이 있다.
초전법륜경에도 실려 있다.
꼰단냐가 부처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을 말한다.
그러나 흐름에 들었다는 표현은 없다.
그런데 밀린다팡하에서 발견했다.
이는
“그 자리에 앉아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Mil.16)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말은 수다원오도송의 근거가 된다.
게송 하나만 듣고서도 성자의 흐름에 드는 자가 있다.
전생에서부터 수행자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오랜 세월 수행을 해서 무르익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다 익었을 때 톡 건드리면 터지는 것과 같다.
게송 하나로 흐름에 든 자라면 ‘약설지자(ugghaṭitaññū)’가 된다.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진리를 꿰뚫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수다원이 되려면 반드시 열반을 증득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열반 없는 수다원은 있을 수 없다.
설법을 듣고서 수다원이 되었다면 그 짧은 시간에 열반에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하지만 몸·느낌 마음 법이라고 하는 네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관찰하지 않고
위빳사나 지혜, 도의 지혜 등을 생겨나게 하는 수행은 있을 수 없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 1권, 109쪽)
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설법을 듣는 도중에 도와 과의 지혜가 생겨난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열반에 이른 것이다.
부처님 법문을 듣고 아라한이 된 자가 있다.
산따띠 장관을 말한다.
약설지자를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된다.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게송을 듣고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또는 이와 비슷한 다른 일화에 대해서도,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고 새기지 않고서 단지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법문을 들으면서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고 새기며 위빳사나 지혜,
도와 과의 지혜가 차례대로 생겨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었다고 알아야 한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 1권, 108쪽)라고 말했다.
“게송을 듣고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또는 이와 비슷한 다른 일화에 대해서도,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고 새기지 않고서
단지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법문을 들으면서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고 새기며 위빳사나 지혜,
도와 과의 지혜가 차례대로 생겨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었다고 알아야 한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 1권, 108쪽)
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그들 산따띠 장관과 빠따짜라 여인도 몸·느낌·마음·법을 새기는 사띠(sati),
즉 새김 확립 수행이라는 도만으로 아라한 과,
수다원 과에 이르러 슬픔과 비탄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알아야 한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 1권, 109쪽)라고 말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열반을 증득해야 한다.
명색과 의식이 사라지는 궁극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1) 대상과 새김들이 모두 ‘탁’하며 끊어져 멈추어 버렸다.
2) 덩굴 줄기를 칼로 끊어내듯이 대상과 새김들이 ‘탁’하며 끊어져 버렸다.
3) 매우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대상과 새김들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4) 잡아당겨 움켜쥐던 곳에서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들에서 벗어나 버렸다.
5) 매우 단단히 묶여 있던 속박에서 갑자기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으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6) 대상과 새김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등불이 ‘휙’ 꺼져 버리듯이 매우 빠르다.
7)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즉시 도달하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8) 얽매임 속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쑥’하며 이르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9) 물속에 ‘쑥’ 가라앉듯이 대상이나 새김이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10) 달려오던 이를 가로막아 갑자기 밀어내듯이 대상과 새김이 멈추어 버렸다.
11)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 2권, 106-107쪽)
이것이 열반의 상태이다.
약설지자가 설법을 듣고서 도와 과를 이룬 것이 가능한이유에 해당될 것이다.
매우 짧은 순간에도 열반에 드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열반은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상수멸정’의 상태를 열반과 같다고도 말한다.
그럼에도 열반은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때인가?
열반에서 나와 반조할 때이다.
이와 같은 반조의 상태에 대하여 경에서는
“벗이여, 나에게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
라는 하나의 지각이 생겨나고 다른 하나의 지각은 사라졌습니다.
벗이여,
마치 모닥불이 타오를 때에 하나의 불꽃이 생겨나고 다른 하나의 불꽃이 사라지듯,
벗이여,
이와 같이 나에게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
라는 하나의 지각이 생겨나고 다른 하나의 지각은 사라졌습니다.
벗이여,
그때에 나에게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지각이 있었습니다.”(A10.7)
라고 표현되어 있다.
열반은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열반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아는가?
이는
“그때에 나에게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지각이 있었습니다.”(A10.7)
라는 문구를 말한다.
이 문구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이 구절을 통해 형성들이 소멸한 그 열반을 인식하는 인식이 있다.”(2권, 486쪽)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나가세나 존자는 가르치면서 배웠다.
스승이 자신을 삼십년동안 시봉한 재가의 여신도에게 설법하라고 했다.
여신도는 설법을 듣고 흐름에 들었다.
설법한 자신도 흐름에 들었다.
이에 대하여 스승은
“하나의 화살을 쏘아 두 위대한 몸을 꿰뚫었구나.”(Mil.16)
라고 칭찬했다.
이것이 강학일 것이다.
가르치면 배우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친다.
매번 똑 같은 교재를 이용하여 가르칠 것이다.
이럴 때도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성립될까?
어떤이는 야학교사를 했다고 한다.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가르치면서 배웠다고 말한 것이다.
처음 가르쳤을 때를 말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깨우침이 일어난 것이다.
글을 쓸 때는 경전을 참고한다.
마치 유튜버가 그날 이야기할 것에 대하여 뉴스브핑하며 말하는 것과 같다.
블로거는 글을 쓸 때 경전을 참고한다.
글 쓰다가 깨우침이 오기도 한다.
이런 것에 대하여 뭐라고 말해야 할까?
글 쓰면서 배운다고 말할 수 있다.
글 쓰면서 깨우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쓰고 싶은 것을 쓴 것이다.
이렇게 오전에 글을 하나 쓰고 나면 해야 할 일을 다한 것 같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리고 나면 순간적으로 강한 성취감을 갖는다.
마치 하루농사 다 지은 것 같다.
이후부터는 놀아도 된다.
숙제를 다한 것처럼 홀가분하다.
나에게 하루농사가 있다.
아침에 산책나가는 것도 하루농사에 해당된다.
오후에 헬스장에 가는 것도 하루농사에 해당된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해도 글을 쓰는 것이다.
오전에 글을 써 놓으면 진정한 하루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마치 농부가 일년농사를 짓고 난 다음 농한기 때 놀고먹는 것과 같다.
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려 놓고 나면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 된다.
이후는 자유시간이다.
2026-06-15
담마다사 이병욱